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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호의 카메라 루시다

제목

오랜시간 금강 바라보기

닉네임
이공
등록일
2013-05-01 19:46:48
조회수
4666
첨부파일
 018_공주대교(축소가) copy.jpg (122582 Byte)
한가지 대상을 특별하게 오랫동안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바라본 경험이 있습니까?
그냥 취미로 또는 시간날 때는 보고, 그리고 말다 그런 시선 말고, 정말 오래 말입니다.

오랜 바람봄 의 시간은 주 대상 이외에 주변 것 어느하나까지 소중한 요소라는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소중 과 소중하지 않은 것의 구분은 모호 하지만요.
그것은 의미, 느낌 등 단정지어 말할 수 없는 한웅큼의 덩어리가 가슴으로 몸으로 확 들어왔다는 그 느낌을 동반 합니다. 그 때를 절정이라 표현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금강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100시간 바라본 대상을 가지고 있나요,
그렇다면 1,000시간, 10,000시간 !!!
사진을 한다는 것도 역시 마음공부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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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는 나의 무기

三絃六角 >

▲ 이상엽(포토저널리스트)

다큐멘터리 전문 웹진인 <이미지프레스> 운영자

전 사회평론 길 사진기자

한겨레21, 아사히신문 <아에라>등 전속 프리랜서

<우리교육>, <말>, <환경운동>, <참여사회>, <신동아>등 시사 매체에 기고.

2000년 기획 전시. <젊은사진가 모임전> 참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전지역과 중국 사천, 광주, 서안, 계림 등 중국 취재. 인터넷 기획자, 작가, 사진가로 활동




<1>. 거리로 나가라 그리고 인간을 찍어라

산비탈 비포장도로를 힘겹게 오르는 낡은 트럭 위엔 허름한 옷차림의 난민들이 가득하다. 그 뒤로는 멀리 시커먼 한줄기 연기가 금방이라도 이들을 덮칠 것처럼 자욱히 피어오른다.

<이미지프레스 www.imagepress.net> 작업실 벽에 걸린 한 장의 흑백 사진이다. 이 사진은 지구 어느 곳인가의 내전 상황을 찍은 것이다. 살육의 대지가 된 자신들의 땅에서 내쫓기는 사람들의 고통, 그들의 공포와 두려움은 흑백의 거친 입자에 아로새겨져, 보는 이들은 잠시 시공간을 넘나들게 된다.

사진은 사진 찍은 자가 물리적으로 그곳에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한 장의 사진은 '현장존재 증명서'가 된다. 그는 목격자이며, 기록자이다. 그는 사진가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본질적으로 기록의 작업이며, 진실을 위한 탐색의 과정이다. 스스로를 '포토저널리스트'라고 말하는 이상엽, 그 역시 사회와 인간을 기록하며, 뷰파인더를 통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사실 사진가와 인터뷰를 하겠다고 자청하긴 했지만 내가 사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철없는 대학 신입생 시절, 공짜로 주는 동아리 티셔츠 한 장 얻어보려고 사진동아리에 가입해 약품 냄새 퀴퀴한 암실을 몇 번 들락거렸던 기억뿐이다. 그래도 꽤 괜찮은 사진전을 보면, 무거운 장비를 메고 뛰어다니던 그 시절이 기억나곤 한다.

이상엽을 알게 된 것은 몇 해 전, <다큐네트Docunet>라는 다큐멘터리 사진 사이트에서였다. 그 사이트는 사회적 발언과 기록에 관심 있던 몇몇 젊은 사진가들이 의기투합하여 만든 곳이었는데, 우리가 살고 있지만 무심히 지나치는 세계의 여러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사이트는 없어지고 말았다. 절판된 귀중한 책을 미로에서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작년 웹에서 그를 다시 발견한 것은 그래서 더욱 기쁜 일이었다.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 전문 웹진 <이미지프레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미지프레스는 '현장 취재에서 어떠한 어싸인먼트도 수행할 수 있는 훈련된' 수십 명의 사진가들의 네트워크이기도 하다. 이들은 달려간다. 부르는 곳이건 부르지 않는 곳이건, 자신들이 관심 있는 주제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히 사진가로 구성된 용병부대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은 총기 대신 카메라를, 약간 수상쩍은 정부나 군부의 돈 대신 '표현과 발언'의 자유를 매개로 계약을 맺는다는 게 다를 뿐이다.


시위가 일상이었던 8, 90년대. '찍사'들은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백골단과 함께 최루탄 속을 뚫고 달렸다. 그들은 '카메라냐, 짱돌이냐' 라는, 지금 생각하면 순진한 고민을 하면서 '카메라는 운동의 무기'라는 생각으로 시위현장이나 민중들의 삶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들은 '재수 없는' 몇몇 언론사 기자들과 몸싸움을 불사하면서, 시위현장과 철거촌을, 뜨거운 함성으로 가득찬 거리를 내달렸다. 사회와 인간 삶의 기록이라는 객관적인 생각 이전에, 철거촌의 아픔과 파업현장의 노동자들의 절규에 귀기울이지 않는 기존 언론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찍지 않으면 아무도 찍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찍었던 때였다. 아니, 언론매체들도 찍었다.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불온한 집단으로.

그 시절 <사진통신>이란 젊은 사진집단이 찍은, 파업장에서 머리띠를 두른 노동자들이 활짝 웃는 모습을 담은 사진들은 '불순세력'으로 노동자들을 사물화한 게 아니라, 새롭게 변화하는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최초로 노동자들을 강인하고 힘찬 모습으로 담아내었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이미지를 둘러싼 일종의 싸움이었다. 카메라 뒤에 선 자가 누구냐에 따라, 동일한 '현실'도 달리 해석되고 보일 수 있다. 사진가들은 그래서 '사실'(fact)을 단순히 보여주기 이전에, 하나의 '관점'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방식은 사진가들에게 무척 중요하다.

서울 충정로 사무실에서 직접 만나본 이상엽 씨는 예상보다 젊었다. 86학번이라고 했다. 몇 장의 흑백사진과 전쟁 반대를 외치는 포스터가 인상적인 오후의 사무실은 조금 한적했다.


▲ 이상엽(포토저널리스트)
다큐멘터리 전문 웹진인 <이미지프레스> 운영자
전 사회평론 길 사진기자
한겨레21, 아사히신문 <아에라>등 전속 프리랜서
<우리교육>, <말>, <환경운동>, <참여사회>, <신동아>등 시사 매체에 기고.
2000년 기획 전시. <젊은사진가 모임전> 참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전지역과 중국 사천, 광주, 서안, 계림 등 중국 취재. 인터넷 기획자, 작가, 사진가로 활동


퍼슨웹>> 그 험난한 길이라는,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된 계기는요?

이상엽>>> 원래 전공은 정치외교학이에요. 사진한 지는 91년부터니까 10년밖에 안 됐지요. 대학 때 운동을 했어요. 그러다 4학년 때 <길>이라는 잡지가 창간되면서 입사했죠. 대부분 노동운동가, 사회운동가들이 모여 만든 곳인데, '학출'로 들어간 거죠. 제가 제일 막내였구요. 처음 들어가서는 뭐든지 다했어요. 독자사업부부터 제작부까지. 6개월 뒤부터 문화부 기자로 기사를 쓰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1년 정도 지나서 사진부 기자들이 월급 안 줘서 다 도망갔어요.(웃음) 사진부가 비니까 편집장이 너 그냥 사진부 가서 사진 찍어볼래, 하더군요. 문화부에서 만평과 삽화를 제가 그렸거든요. 그땐 사진기도 없었고, 사진 찍어본 경험도 전혀 없었는데, 일단 부서를 옮겼어요. 마침 동생이 미대생이라 카메라가 있었거든요. 그걸 빌려서 처음 사진을 찍었죠. 습작과정도 없이 프로로 시작한 거죠.

사실은 말이 안 되는 거죠.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고, 사진공부를 혼자 했어요. 회사에 암실이 있으니까 매일 밤 찍어본 거 현상도 하고, 인화도 해보고... 실패도 많이 했구요. 물론 처음에야 남이 찍은 사진을 편집하면서 화보 구성하고 편집하는 일부터 한 거죠. 그러다 3개월 지나서 첫 사진을 실었죠. 인천 대우자동차 노조위원장 복직투쟁 과정을 퍼스널 스토리로 1주일 정도 작업해서 <길>지에 93년에 냈지요. 그게 처음이에요.

퍼슨웹>> 처음에 일반 기자로 일한 경험이 사진 작업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됐겠네요. 글도 써야하고, 정치경제학적 시각에서 분석도 해야 하니까요.

이상엽>>>예. 사실 사진을 시작한 계기는 제 의지와 전혀 상관이 없었던 거죠. 매체에서 활동할 땐 여러 방식이 있잖아요. 기사를 쓸 수도 있고, 사진을 찍을 수도 있고 칼럼이나 평론을 할 수도 있고…. 사진을 해보니 생각보다는 굉장히 재미도 있고. 조금 지나니까 어떻게 보면 글쓰는 것보다 이미지로 이야기하는 게 더 적성에 맞을 수 있겠다 생각했죠. 그리고 기자로 일했으니까, 사진과 글을 결합하는 방식에선 다른 사람보다 빨랐던 편이에요.

퍼슨웹>> 잡지에서 일하시다가 독립하게 된 건가요?

이상엽>>>95년까지 <길>지에 있었어요. 한두 명 정도 사진부에 있었는데, 전혀 사진이 안 늘어요. 좋은 사진 찍어야겠다고 생각해서 계속 찍고 남한테 보여주고 평가해도 늘기가 힘든데, 이런 기회가 거의 없었어요. 조직 안에 있으면 안주하게 되요. 누가 내 사진 가지고 후졌네, 뭐네 할 사람도 없고, 그 잡지 상황에선 사진 찍어다 주기만 해도 감읍(感泣)할 경제적 상황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만두게 되었죠. 다시 취직할 생각은 없었어요. 사진을 좀더 제대로 해보고 싶었고 막판까지 스스로를 몰아가보자 생각했죠. 그런 후, <한겨레 21>에서 프리랜서로 사진과 글을 기고했어요. 그 다음해는 8면 짜리 기사도 써보고. 그때 나름대로 훈련한 셈이죠.

퍼슨웹>> 그야말로 몸으로 구르면서 배우신 거네요. 그 후에는 어떤 식으로 연습하셨어요?


이상엽>>>저는 일단 제가 포토저널리스트라고 생각해요. 관건은 취재원에 대해 얼마나 용기있게, 심도있게 취재를 해내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한겨레 21>에서 배운 게 많죠. 거기 사람들은, 말하자면 큰물이고, 프로페셔널 기자들이에요. 해외 르뽀나 취재경험이 풍부한 사람들 밑에서 많이 배웠죠. 사실 월간지에서 원고 매수 많이 쓰는 건 일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한겨레21>에서 3매짜리 기사 쓰면서 구박 엄청 받았어요. 팩트가 뭐냐, 따지는데 그게 기자로서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짧은 글에서 장문의 기사까지 많은 연습을 했죠. 또 내부 스텝이 아니라 프리랜서여서 오히려 그 사람들이 부담없이 가르쳐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내부 스텝이면 누가 미주알고주알 가르쳐주겠어요. 하여튼 많이 배웠죠. <길>지 초창기 분위기는 운동가들이었지, 프로페셔널 기자들이 아니었으니까. 아침에 모여 회의하고는, 다방으로 우르르 몰려가서 이걸 어떻게 취재하라는 거야, 이런 적도 많았으니까요.

퍼슨웹>> 작업 주제는 어떻게 정하셨어요? 편집진의 의뢰를 받거나 본인이 직접 기획서를 제출하는 식으로 하나요?

이상엽>>>기획안을 먼저 내죠. 주제요? 가릴 것 없이 이것저것 다했어요. 스텝들이 안 하는 원고도 매주 하면서 르뽀를 썼어요. 르뽀는 스텝이 기획을 안 하거나 귀찮아하는 데를 찾아가는 거죠. 르뽀를 했던 건, 우선 사진을 써주니까요. 어쨌거나 거기선 사진이 필요하고 그걸 써주는 분야니까 좋았죠.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이점이고요. 4면 정도 되는 르뽀를 하나 쓰면 한 100만원 가까이 나오는 거죠. 왜냐면 사진 10장만 써도 50만원이고, 기사글도 4면이면 30만원 정도 원고료가 나오니까요.

퍼슨웹>> 장비나 취재비 문제도 해결해야 했을 텐데 원고료로 다 충당하기 힘들지 않나요?

이상엽>>>장비는 원래 안 대주니까, 제 걸 썼죠. 취재비도 제가 감당하고요. 그러니 원고료도 별로 남는 건 없었어요. 그때 결혼해서 아이도 있었는데, 먹고 살아야 하니까, 여러 군데를 동시에 뛰는 길밖엔 없었죠. 다행히 그 당시엔 그렇게 사진과 글을 동시에 소화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이 활동하기 시작한 초창기라서 일거리가 없진 않았어요.

퍼슨웹>> 처음에 받아줄 때 매체를 뚫는 게 제일 어려웠을 텐데, 어떻게?

이상엽>>>시작이 중요하죠. <한겨레 21>에서 일했던 걸 포토폴리오로 만들어서 보여줬는데, 그것만으로도 웬만한 시사잡지에서는 통했어요. 역량을 의심하지도 않았고... 또, 사진하고 글을 동시에 하면서 시사잡지를 대상으로 활동하는 프리랜서는 그때 거의 없었죠. 안해룡 씨나 몇몇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어요. 경쟁상대가 없었으니까 좋았겠지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사보를 대상으로 하는 사람은 많아도 시사매체를 대상으로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아요. 물론 예전보다는 많아졌지만요.

퍼슨웹>> 먼저 그렇게 시작한 분들이 있으니까, 또 그 길로 뛰어든 분들이 많겠죠. 위험도 아랑곳하지 않고 개척정신이 넘치는 찍사들요. 군말 없이 가고, 가지 말래도 가는 사람들이잖아요.


이상엽>>>사실 편집자 입장에서도 좋죠. 원고료가 적게 들잖아요(웃음). 두 사람 보낼 데를 한 사람 보내니 비용도 적게 들고요. 그런데 돈도 중요해요.

텍스트보다는 사진 한 컷 당 지불되는 원고료가 크다고 해도, 사용하는 필름이나 취재, 활동비, 숙박비, 감가상각비는 고스란히 프리랜서 사진가의 몫이기 때문에, 본전치기 정도거나 재생산 비용이라고 봐야 한다. 게다가 그런 꼭지를 따내는 것도 빈익빈 부익부의 법칙에 지배된다. 경험 있는 사진가들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아 초짜들은 어디에서나 시작하는 게 힘들다. 포트폴리오를 들고 다니며, 자신의 사진이 입맛에 맞다는 매체를 찾아다니는 사냥도 작업 틈틈이 해야 하는 것이다.

퍼슨웹>> <이미지프레스>는 어떻게 만들게 됐나요?

이상엽>>>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젊은 사진가들끼리 모여 1년 정도 조그만 세미나 그룹을 운영했었어요. 20대 후반 사람들이 모여 해외 다큐멘터리 흐름도 파악하고 그들의 작업방식도 이해하는 작업을 하다가 <다큐네트>라는 웹사이트를 97년에 창간했죠. 그 사람들이 지금도 활동하는 사람들이에요. 그 전사(前史)를 얘기하면, 91년에 BBS(사설게시판)를 돌렸어요. 호롱불이라는 프로그램이 나와 있었죠. 여기에는 전화선이 하나 물리는데 오직 한사람만 들어와서 그 게시판을 구경하고 갈 수 있죠. 하루에 들어와 보는 사람이 24명, 25명 정도였죠. 그러다가 95년 시기부터 웹을 했어요.

퍼슨웹>> 우리 나라 최초의 다큐전문 웹진이었죠. 그때 반응도 좋고, 괜찮은 사이트 목록에도 선정되었는데, 갑자기 안 뜨더군요.

이상엽>>> <다큐네트>가 창간된 '97년이면 우리 나라에 웹진은 손에 꼽을 정도였지요. 사진가들이 글도 직접 쓰고요. 그때 사람들이 지금 <이미지프레스>까지 연장된 거죠. 그러다 IMF 터지고 내부적으로 의견차이도 있어서 1년만에 접은 거죠. 7명이 공동으로 운영했었어요. 지금은 한국 최대 포탈사이트가 된 '다음'(Daum)도, 시작은 웹 갤러리 같은 사진으로 시작했어요. 그러다 웹 메일 사업으로 나간 게 현재의 다음커뮤니케이션이 된 거죠.

그 비슷한 시기에 나름대로 잘 알려진 웹진을 만들어놓고도 잘 안된 건, 우리한테 비즈니스맨이 없었다는 거죠. 오직 사진가들만 존재했어요. 그래서 1년만에 어려워지니까 바로 접은 거죠. 한 해 잘 놀고, 99년에 천리안에서 제가 스폰서를 얻어냈어요. 기획안을 내서 일년에 2천만 원 정도 받았죠. 그래서 <이미지프레스>를 만든 거죠.

퍼슨웹>> 운영은 어떻게 하세요?

이상엽>>>비용은 많이 들죠. 다큐 프로젝트 하나에 수천만 원 들어요. 그런 자금을 끌어오는 건 쉽지 않죠. 기업체나, 통할 만한 데 찾아가 설득도 하고, 그러려면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해요. 어려운 일이죠. 그런 프로젝트는 두 건이나 할까... 그 외엔 개인적으로 알아서 해야 하는 게 아직도 많지요.


한국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을 계속 사줄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좋은 모습도 많은데, 왜 이런 칙칙한 것들만 담아 오냐', 라는 식이다. 그나마도 지구촌의 풍물을 다루거나, 국제적인 이슈가 되는 사건 위주로 사진 지면의 기획이 잡히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동영상이 일반화되는 시대일수록, 사진작업이 설 수 있는 영역도 좁아지기도 한다. TV에서 이미 본 것이니까. 어쩌면 인터넷은 이런 조건에서 나온 대안이겠지만, 여전히 다큐멘터리 사진은 비주류의 몫이다. 대부분의 사진학과 출신들이 유학가거나 그나마 돈 되고 다양한 표현기법을 실험할 수 있고, 시장이 보장되는 광고 사진계로 진출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유달리 다큐멘터리 사진판은 '딴짓' 하다가 사진의 매력에 포섭되어 몸으로 구르면서 사진을 배우거나, 신문사 사진가로 시작해서 프리랜서로 나선 '용감무쌍한' 사람들이 많다. 사진판에서 버티겠다고 마음먹는다 해도, 장비, 필름값이나 현상비, 인화비, 출사비로 필요한 기본비용은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디지털 기술이 도입되면서 약간 달라지긴 했지만.

워낙 인간이 한심해선지 모르겠으나, 언제부터인가 모험가들이 등장하거나 작가나 화가들이 나오는 책을 보면 '이 사람들은 무슨 돈으로 이렇게 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대충 답을 깨달았다. 갑부집 자제이거나, 엄청난 후원자를 두는 행운이 없는 한, 고대로부터 탐험과 발굴의 영역을 개척해 간 모험가들이건, 현대의 사진가들이건 돈문제는 위궤양처럼 따라붙는 과제였을 거라고.



< 2 > 사진술 또는 사진을 찍는다는 것

카메라가 발명된 지 150년이 지난 지금, 카메라 렌즈는 인간 사회의 모든 모습을 기록해왔다. 몇 년 동안 지구 곳곳에서 난민과 망명자들의 기나긴 탈출과 이주의 과정을 기록하는 사진가들도 있으며, 세계의 급격한 변화의 현장들을 추적하는 사진가들도 있다. 물론 이런 커다란 주제들에만 매달리는 것은 아니다. 일상적인 모습들, 이를테면 가족, 젊은이들, 불야성으로 변하는 도시의 밤거리, 유적지, 쇠락해가는 농촌, 타지에서 뿌리내리려는 외국인 노동자, 기지촌, 입양아, 노숙자, 집시들, 작은 소도시의 고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조용한 삶의 모습 등의 사회적인 주제들. 혹은 사진가 자신의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주제 등,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진 작업의 주제이다.


사회적인 쟁점이 되는 사건과 그 자체의 센세이셔널한 측면에 기대어 작업을 하는 방식은 소재주의나 계몽주의로 흐를 수도 있고, 찍을 대상을 스스로 점차 한정하게 만드는 족쇄가 된다. 이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작업은 무척 힘들다. 사진가들의 초기 작업과 현재를 비교하면 점차 이런 고민들이 어떻게 해소되어 가는지를 추적해 볼 수 있다. 또 다른 측면도 있다. 세대에 따라 관심사와 집중하고 싶은 주제는 다르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탄광촌이나 농촌현실을 찍어오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어느 중견 사진가는 일침을 가했다고 한다.


퍼슨웹>> 사진의 어떤 면이 좋았나요? 몇 십 통 힘들 여 찍어도 한두 컷 건지기도 힘들잖아요. 암실작업할 때, 덱톨 현상액 속에서 처음 흐릿하게 상이 떠오를 때의 기분 같은 것은 각별하지만.


이상엽>>>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이미지를 구성하는 방식은 원래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 한 화면 안에 사물들을 배치할지, 그게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 고민도 많이 했었죠. 사진도 비슷해요. 프레임 안에 표현하는 바를 어떻게 가둘 것인가 하는 문제잖아요. 토대는 같은 거죠. 물론 그림은 실사도 있지만 상상이나 배치가 마음대로예요.

그런데 사진은 다르죠. 특히 스트레이트한 사진은 상상한대로 연출하는 게 아니라, 사각 프레임 안에서 현실을 잡아내는 동시에 이미지들을 배제하고 재구성하는 거잖아요. 제 생각엔 그림보다는 고도의 작업이라고 봐요. 그게 또 매력이고요

퍼슨웹>> 찍을 때 생각과는 다른 컷들이 나올 때 괴롭죠. 메카니즘과 머릿속 생각과의 괴리라고 해야 하나요?


이상엽>>> 메카니즘적으로 50mm 렌즈는 인간의 시각과 비슷해요. 그런데 눈이 본 걸 그대로 담는 게 아니지요. 망원렌즈는 뒤 배경이 사라지고, 광각렌즈의 경우 사람의 얼굴이 정상 시각보다 크게 보이죠. 머릿속에서도 마찬가지죠. 무엇을 의도적으로 특화시킬 것인가,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는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거든요. 그게 사진 메카니즘을 통해서 조화가 되야 돼요. 대부분 사람들은 사진에 찍힌 것이 자신의 눈으로 바라본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죠.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죠.

사진도 그래요. 36컷 짜리 필름 모두를 대중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몇 컷만을 대중에게 보여주게 되죠. 그게 사진 질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자신이 보여주려는 것을 더욱 심층적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그만큼 필름을 소모했다고 봐야 하는 거죠. 사진이란 게 아까 말한 것처럼 보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런 작업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데, 음악이나 그림 등 다른 예술과는 다르게 사진은 기계, 즉 메카니즘을 통해 나타나죠.붓이나 악기와는 다르게 카메라라는 기계가 도구가 되니까요. 결국 두 가지가 다 조화가 되야 하는 것이죠.


사진을 찍어본 사람들이 누구나 느껴본 문제일 것이다. 사람의 눈과 카메라 렌즈 메카니즘의 차이 때문이다. 이 단계를 건너는 게 쉽지 않다. 많이 찍어보고, 인화해보고, 왜 의도나 생각과는 다른 사진이 나오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그리고 또 찍으러 나간다. 이 과정이 오래 반복된다. 글쓰기처럼, 사진 찍기도 자신의 머릿속과 손이 실제로 만들어내는 것 사이의 싸움이다. 글을 잘 쓰려면 무조건 많이 읽고, 많이 쓰라고 했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찍고 찍고, 또 찍어라.


퍼슨웹>> 다큐 사진의 경우, 강렬한 인상을 주기 위해 광각렌즈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누가 찍으나 비슷한 느낌을 준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아나 빈곤, 전쟁, 인권, 환경 등 공통된 포토저널리즘의 주제를 다루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요.


이상엽>>> 그건 사실이에요. 20년 전만 해도 50mm 렌즈가 주종이었을 때는 35mm 이하의 렌즈만 해도튀었죠. 그런데 지금은 17mm까지도 내려가거든요. 그건 예술사진하는 사람들은 잘 안쓰죠. 저널리즘 사진에서 주로 광각렌즈를 많이 사용하는 이유는 사진가들이 계속 피사체에 다가가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이렇게요. 그런데 35mm로는 인물밖에 못 보여주죠. 주변 배경을 못담으니까. 배경과 주변 일을 더 넓게 담고, 주제를 특화시키려는 의도 때문에 광각을 선호하게 되는데, 그건 우리 나라나 외국이나 전혀 차이가 없어요.


2차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찍은 한 장의 사진으로 일약 유명해진 프리랜서 종군 사진기자 로버트 카파(Robert Capa, 1913-1954)는 비록 인도차이나에서 지뢰를 밟고 요절했지만, 포토저널리즘사에 길이 남을 말을 남기게 된다.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그건 충분히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사체에 최대한 접근하는 것을 중요시하는 이런 입장은 단순히 물리적인 거리뿐만 아니라 사진가의 '자세'에 대한 언질도 담고 있다. 사진가는 단순한 방관자가 아닌, 진솔한 목격자이며 그 고통과 진실의 압력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기록하려는 사람이다. 광각렌즈의 사용도 이런 측면과 맞물린다. 광각 렌즈 특유의 강렬함과 함께 더 많은 정보를 담기 위해서.



퍼슨웹>> 그런 사진들을 많이 접하다보니 광각렌즈가 보도사진계를 평정했다는 생각조차 들어요. 더 많은 정보를 담기 위한 노력일 수도 있는데 더 극적인 사진을 만들려는 의도에서 메카니즘에 의존한다는 생각도 들거든요.



이상엽>>> 그것도 유행이에요. 사실 광각렌즈는 24mm에서 더 내려가면 양 귀퉁이 즉 프레임 사면이 다 휘어요.


퍼슨웹>>그런데 그 휘는 것 자체도 매력적인데, 광각이 주는 하나의 효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나요?


이상엽>>> 영화에서 그런 기법이 적극적으로 사용이 되었죠. 왕가위 영화 보세요. 그전 영화들이 eye level, 즉 정상 시각에서 작업이 되었는데 핸드헬드 기법과 광각렌즈로 화면을 왜곡시키면서 인기를 끌었지요. 사진기법에서 차용을 한 것이죠. 사실 흑백 사진계에선 너무 강한 왜곡은 잘 안 줘요. 흑백사진의 감을 통해 칼라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새로운 충격을 주는 작가들도 많지요. 매그넘(MAGNUM)*에서 활동하는 세바스티오 살가도(Sebastiao Salgado)나, 제임스 너트웨이(James Naghtwey)**는 흑백을 고집해요. 현대사회에서 사용하는 수많은 칼라 정보들을 배제시키고 자신이 바라본 피사체를 훨씬 더 강조하는 방식을 쓰는 거죠. 다른 미디어와는 차별을 두는 거지요. 근데 20mm 이하론 내려가지 않아요. 너무 왜곡이 심한 렌즈를 사용하면 사진이 지나치게 단순해지죠. 신문사진은 한 장 짜리라 지루하지 않지만, 사진집으로 보면 사람들은 금세 피곤해하거나 식상해하겠죠. 그래서 좀더 편안한 분위기의 35mm나 24mm 범위에서 사용하죠. 라이카나 캐논, 니콘…, 카메라마다 렌즈 특성에 맞춰서 쓰기도 하구요.



tip1> 매그넘(MAGNUM)은 1947년, 종군기자로 유명한 로버트 카파, 삶의 진수를 포착하려는 '결정적 순간'으로 유명한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데이비드 세이무어 등에 의해 창립된 세계적인 사진 에이전시이자 사진가 조합이다. 이들은 1936년 파리에서 신문사 사진부 입사에 다같이 사이좋게 떨어진 후, 어느 카페에서 특대(magnum) 샴페인을 나눠 마시면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빌어먹을 편집자들의 간섭없이, 자유롭고 제약 없이 사진을 찍는 모임을 만들자는 약속을 하고 그 맹세를 지켜 후일 매그넘을 결성했다. '기록을 예술의 단계로 끌어올린다'는 모토를 토대로, 지금도 전세계 60여 명의 회원이 지구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1993년, 2001년 등 딱 두 번 전시회를 연 적이 있다.


tip2>탁월한 전쟁 사진가인 제임스 너트웨이는 최근 체첸지역이나 코소보, 인도네시아, 발칸반도, 루마니아 등지의 내전을 기록한 <증언의 눈 L'ochhio Testimone> 라는 전시회를 열었다. 한국에선 열리지 않았는데, 이처럼 국내에 오지 않는 전시회가 많다.


퍼슨웹>>메카니즘 이야기는 이제 하나만 더하지요. 디지털 카메라가 나타나면서 이전의 현상, 인화 등 귀찮은, 고전적인 암실작업 과정들이 생략되니까 일반인들에게도 인기가 많고, 사진의 저변이 더 넓어진다는 이야기들도 많이 해요. 작업 방식에서 바뀐 점은 없나요?


이상엽>>> 카메라가 발명된 지 사실 오래된 것도 아니고, 카메라 메카니즘은 계속 변화해 왔어요. 필름이나 인화지가 필요하지 않는 디지털 카메라가 나타났다고 해서 반동적으로 회귀하는 경우가 드물거에요. 아마 대부분 카메라를 소지한 사람들은 디지털로 가겠죠. 디지털 카메라도 계속적으로 발전을 할 거에요. 그런데 현재 모습은 그렇게 긍정적인 것은 아네요.


퍼슨웹>> 해상도 문제 때문일까요?


이상엽>>> 그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찍은 다음에 본인이 생각해서 아니다싶은 사진 정보들은 다 지워버리잖아요. 저장매체의 한계 때문에요. 결국 찍어놓은 사진들이 후에 그 가치를 인정받을 기회도 없이 사라지는 거지요. 그러나 필름은 그렇지 않죠. 필름은 몇 장만 선택하더라도 전체를 보관하게 되어 있고, 몇 년이 지나서 다시 보았을 때도 그걸 다시 활용하거나 가치를 재발견할 수도 있죠. 디지털은 그게 안돼요. 디지털 카메라가 앞으로 그런 문제점을 보강하려면, 저장 용량도 훨씬 커져야 하고, 쉽게 저장을 할 수 있어야 해죠. 현재로선 그게 한계예요.

물론 일반인들이야 현상비, 인화비 안 드니까 편하죠. 그런데 프로 사진가들 가운데 인화나 현상작업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있을 거에요. 그것도 수십 년 뒤엔 무의미한 짓이 될지도 모르지만. 필름보다 해상도가 높게 저장되고, 아무리 크게 인화해도 필름보다 나은 결과가 있다면 그때는 정말 이런 작업들이 사라지겠죠.


퍼슨웹>> 사진은 기술의 발전에 따라 표현이나 작업방식이 변화하는 매체니까요.


이상엽>>> 책도 마찬가지잖아요. 옛날엔 책이 커다란 기록매체면서 재산이었죠. 책 한 권을 만들려면 나무에 새기고 참 어려웠죠. 그래서 한정본만 만들어졌어요. 기껏해야 중세 때 500부, 이렇게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당연히 값도 비쌌죠. 도서관에서 그 책들이 도난될까봐 책마다 쇠사슬을 걸어 고정을 시켜놓을 정도였다고 하니까요. 지금 보세요. 누가 그런 일을 해요? 사진도 처음엔 어렵고, 작가들만 찍었죠. 지금도 그런 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 받고 사진찍기를 즐기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많죠. 사진 배운다고 하면 먼저 똑딱이 카메라 -자동식-가 아니라 비싼 카메라부터 사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오히려 사진을 즐기지 못하게 되는 거죠. 디지털 카메라가 사진을 쉽게 접하게 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해요. 반면 분명히 사진은 지금보다 훨씬 아트의 영역에 들어갈 거에요. 필름으로 기록하고 인화하는 사람들은 아티스트가 되겠죠.


기술복제시대를 연 사진술은 영화만큼이나 메카니즘의 역사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발전해왔다. 앞으로 사진이 어떻게 발전하고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를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디지털 시대가 오면서 더더욱 이미지들은 넘쳐날 것이다. 그 이미지들은 끊임없이 변형되고, 재구성될 것이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그 이미지들의 원판은 바로 현실이라는 것. 이미지의 조합과 가공의 영역이 무한대에 도달한다해도, 우리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 위에서 날개를 펼 뿐이다.


< 3 > 우리속의 아시아, 우리밖의 아시아

정신없이 사진을 찍어대는 행위는 급박하게 지나가는 순간의 현실에 완전히 몰입하거나 압도되어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된다는 인식에서 나온다. 하나의 표정이나 눈빛을 잡으려면 지금이 아니면 안 돼, 바로 이때다, 라고 무의식중에 느끼는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이 순간은 영원히 사라지며 소멸한다. 상황에 치밀하고 강렬하게 몰입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즐거움이다.


퍼슨웹>> 사진 찍을 때 무아지경에 빠져 찍는다고 하는 이야기를 많이 하죠. 본인은 어떠세요?


이상엽>>> 그것도 그런 피사체가 있어야 가능하죠. 그림이 안 되는 상황에 가서 그림을 만들려면, 정말 이성적이고 냉철해야죠. 얼마나 생각을 많이 해야겠어요(웃음).

근데 무아지경에 빠질 정도의 상황이 있어요. 정말 갖다대기만 하면 하나하나가 버릴 게 없는 경우지요. 지난번 동티모르에 갔을 때 쓰레기장에 수백 명의 아이들이 몰려드는 것을 봤을 때, 그럴 때는 정말 흥분하게 되죠. 쓰레기장에 애들 모이는 걸 찍어서 뭘 보여 줄거냐,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사실 자체가 이미 그 사회가 어떤 단계에 있는지를 웅변적으로 대변해주죠. 그게 현실인 거에요.

서방 사진가들이 아시아에 와서 왜 맨날 그런 사진을 찍어가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게 현실이에요. 아시아를 이렇게 보여주면 안 돼, 그건 사진가가 자기검열을 하는 거죠. 어떻게 다른 모습을 보여줄 건데요? 사진가들이 정보에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건 기본이지만, 그 다음에 자기 관점을 심어야 해요. 취재 자체를 거부해선 안 된다는 거죠.



퍼슨웹>> 그 정도 정신무장이 되기까지 고민도 많겠어요.


이상엽>>> 옛날에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 당했을 때 있던 사진기자가 한 말이 있어요. 어떤 기자가 그거 찍지마, 했더니 "역사란 말이야, 역사" 하면서 찍었다고 해요. 암살 자체는 안타까운 일이었겠지만, 기록하지 않고 그게 부당한 일이라는 걸 어떻게 설명할 거에요? 사진가의 기록정신이란, 일단 어떤 상황이 있을 때 주저 않고 찍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해요. 현장에서 굶주린 아이들에게 카메라 들이대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에요. 자기도 인간인데. 그 애들과 눈빛이 한번 부딪치면 가슴이 퍽퍽 찔려요. 저런 거 찍어서 내가 밥먹고 사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죠. 그러나 과감히 떨쳐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해요. 그렇다고 잔인하게 굴 필요는 없지만....

<조 페시의 특종>이란 영화가 있는데 주인공이 실존인물이죠. 거기서 광주리에 애를 버리는데, '애를 바늘로 찔러 울린 다음에 찍는 게 사진기자란 인간들'이라는 이야기가 나와요. 그만큼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들이란 거죠. 포토저널리즘이 생긴 이래 그런 비아냥은 어제오늘이 아니죠. 포토저널리스트한테는 자신의 감성을 낮추고 객관적으로 사실을 바라보고 기록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해요.



공격적이고 비인간적인 사진가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이나 영화에 무지 많다. 이들은 냉혈한이며, 사진을 팔아먹는 개자식들로 묘사된다. 카메라는 따스한 시선이 아니라 차갑고 무정한 총에 비유된다. 그러나 현실은 복잡하다. 다 허물어져가는 판잣집에, 타인들의 삶에 침입해 들어가 그들의 삶을 담는 작업을 하기 위해선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단순히 수줍음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작업들을 하면서 미안함, 혹은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많지 않다.

기록을 위한다는 사명감도 이걸 쉽게 지워내지는 못한다. 그건 좀더 본원적인 문제들이다. 그래서 사진가들은 피사체로 사람들을 응시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하나의 인간으로 만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들과 친구가 되는 것이다. 그들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면서 작업할 용기를 가지게 된다. 노숙자들과 함께 지냈던 어느 사진가는 그런 경험을 이렇게 말한다.

"20대 초반, 불행하다고 느끼던 시절, 93년에서 97년 사이에 이 사진들을 찍었다. 나는 병원에 가듯 그들의 삶에 잠시 들렀던 것이다. 그 사진들은 그 속에 나온 사람들보다는 나에 대해 더 많은 걸 얘기해준다."


퍼슨웹>> 정치경제학적인 공부가 많이 필요한 것 같아요. 동남아시아의 노동문제나 필리핀 무슬림 사회나 필리핀 이슬람 반군집단, 묵직한 주제의 작업들을 많이 하셨는데요. 어떻게 작업하시는지?



이상엽>>> 일단 사진 작업하기 전에 한두 달 리서치 작업을 하죠. 일단 많은 독서를 해야 되요. 동남아 교육 문제에 대해 작업할 일이 생긴다, 제가 평소에 그 나라 교육에 대해 뭘 알겠어요? 아무 것도 모르잖아요. 그러니 열심히 공부를 하죠. 이 나라는 '어떤 기본 개념을 가지고 초등학교 교육을 하고 있는가' 하는 거요. 동남아시아는 자료도 별로 없어요. 우리 사회의 인문․사회과학적 주제도 아니고. 가깝고 밀접한 나라임에도 우리 나라의 주된 관심은 일본, 중국 즉 동북아나 미국, 유럽 등 서방에 편향되어 있어요. 그러니 동남아시아학도 없고. 그저 학회 정도나 있지요. 동남아시아는 싸구려 패키지 여행이나 가는 데라고 생각하지, 어떤 진지한 학문적 주제라고 생각하지 않죠.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대응할 수 있는, 혹은 정확한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학자도 없고, 관료도 없어요.



이상엽 씨는 요즘 부쩍 아시아의 역사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사실 아시아의 급격한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이라는 역사적 현재는 사회과학하는 사람들에게나 사진가들에겐 풍요로운 과제를 산더미같이 던져주는 게 아니겠는가.


퍼슨웹>> 주로 외국 사이트나 외국 서적에서 자료를 찾으셨나요?


이상엽>>> 한국에서는 KOICA(한국국제협력단) 등 기초자료가 있는 곳이 있으니까, 거기를 많이 참고하죠. 기초자료를 분석하고, 하나의 테마를 정하는 거야 작업하는 사람의 몫이구요.

퍼슨웹>> 현지인이나 통역을 제대로 만나는 일이 중요하겠네요. 어떤 식으로 도와줄 사람들을 만나세요?


이상엽>>> 전에 싱가포르 초등학교를 취재할 때 그곳이 IT산업으로 활성화되고 있다는 정보가 있었어요. 싱가포르는 도시국가니까 여러 신기술이나 프로젝트가 만들어지면 시험장으로 활용되는 곳이에요. 그걸 초등학교 문제와 어떻게 연결시킬지 생각을 해보는 거지요. 현지에 있는 KOICA, 한국 대사관, 한국인 학교에 미리 연락을 해봤어요. 방문해보니 가능하겠더라구요. 나중에 그 나라 사람들과도 만나 계속 조사하고요.


퍼슨웹>> 외국어로 인터뷰까지... 놀랍습니다. 할 줄 알아야 하는 게 너무 많네요(웃음).

이상엽>>> 어휴, 당연히 통역이 다 해주죠(웃음). 좋은 통역을 구하는 게 아주 중요해요. 사진만 찍는다면야 통역까지 구할 필요는 없겠죠. 그런데 글도 써야 하니까 명확한 인터뷰를 할 수 있는 통역이 필요해요. 근데 비싸요. 어느 곳이나. 보통 동남아도 하루에 100불씩 달라고 해요. 큰돈이죠. 나 같은 사람 만나 하루만 일을 해도 일주일 먹을 게 생기는 거지요(웃음). 그런 비용을 감수해서라도 정확한 통역을 통해 인터뷰를 하고 취재원을 찾아야 해요. 일단 싱가포르 교육부를 찾아가 정책담당자를 찾아 인터뷰를 먼저 하는 게 제일 편해요. 그럼 그 사람들이 또 관련된 학교를 소개하고. 그럼 취재하러 가죠. 그런 다음에 곁가지를 쳐야 해요, 왜냐면 정부 관리는 자기들 뜻에 맞는 학교를 소개했을 거에요. 최첨단, 모범학교를 소개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학교를 찾아가야 해요. 그러면서 그 사회 전반의 교육문제를 알아 가는 거죠.


퍼슨웹>> 주제에 따라 접근 방법도 달라지네요. 그 작업만도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텐데요. 한정된 시간 안에 사진 작업도 해야 하고.

이상엽>>> 그러니 한국에서부터 준비하지, 가서는 못해요. 대부분 현장에 들어가면 생각한 것과 어긋나는 부분도 정말 많지만, 일단 현장에 들어가기 전에 리서치 과정에서 반은 해결하고 가야 해요. 현장에선 할 수 없는 것들이거든요.

또 르뽀를 쓰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정보가 별로 없을 때 아래부터 훑어서 최종적으로 정책적인 판단을 하는 윗선으로 가는 방법, 애초에 위에서부터 밑으로 떨어지는 방법. 두 가지 다 장단이 있죠. 밑에서 시작하면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리고, 위에서부터 하면 시간은 절약해도 한정적인 범위만 보게 되죠. 이 두 가지는 따로 사용해요. 필리핀에 가서 무슬림 반군을 만난다면 어디 윗선을 만날 수 있겠어요? 밑에 있는 선부터 차근차근 쌓아 올라가요. 그런데 그 국가의 교육정책 문제 같은 경우는 당연히 윗선부터 가는 게 낫죠.


퍼슨웹>> 기간이 보통 어느 정도 걸리나요?

이상엽>>> 촬영기간은 소재에 따라 다 다르죠. 필리핀에선 한 달을 머물렀지만 실제로 목적했던 게릴라 캠프에 들어가서 사진 찍은 건 한나절밖에 안돼요. 오직 한나절을 위해 한 달을 소비했다고 생각해봐요. 얼마나 짜증나는 과정이에요. 하지만 이렇게 아래서부터 구축해서 결국 무슬림 캠프 사진이 있어야만 완성되는 르뽀니까, 캠프 사진이 있어야만 해죠. 겉핥기로만 한 걸로는 안되니까요. 다큐멘터리 작업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 뭔가,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도 저널리스트로서의 몫이죠. 누가 해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하지만 이미 그림 다그려진 상태에서 찍고 빠지는 경우들도 있는데, 당연히 그런 건 내용이 얄팍하죠. 그런 상황도 요즘은 많아요. NGO시위가 있다, 미리 프레스에 알려주고 자기네들이 그림 다 만들어주잖아요. 자 찍으세요, 하고 찍고는 가버려요. 신문에만 나면 된다는 사고도 문제라고 봐요.


퍼슨웹>> 워낙 사진작업 하다보면 촬영금지 영역도 많잖아요. 필리핀 이슬람 반군은 더 접근하기 힘들지 않았나요?

이상엽>>> 운도 따라야죠. 유리한 점도 있어요. 필리핀 민다나오 섬이란 깡촌에서 한국 사람이 들어와 반군을 취재한다고 하면, 어차피 한국 언론사 프레스 카드도 안 먹혀요. CNN이나 알아줄까... 근데 나 같은 처지의 외국인이 어떻게 피사체에 다가갈 것인가는 다르죠. 민다나오 섬에서 배타고 2시간 들어가면 바실란 섬이 있는데, 거긴 필리핀의 3대 반군이 다 있는 곳이에요. '모로 민족해방전선'(MNLF), '민다나오 이슬람해방전선', 그리고 얼마 전에 미국인들 왕창 잡아넣었던 '아브 샤 야프' 등 다 있어요. 밀림이고 섬이라 게릴라 활동에 유리한 곳이죠. 근데 여기 들어가서 끈을 찾을 수 없어 한참 고민하다가, 시청 관계자들과 얘기를 했죠. 그랬더니 바실란주 주지사를 만나보래요. 소개한 사람 차를 타고 갔는데, 주지사 이 사람이 의외로 호의적이었어요. 알고 보니 게릴라 출신이더라구요. 근데 합법활동으로 나와 정치활동을 하다 주지사가 된 거죠. 많은 대화를 나눴죠(웃음). 물론 제 입이 아니라 통역을 통해서지만. 기다려 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하룻밤 그 사람 집에서 묵었어요. 잠이 안 오더라구요. 이게 될 수는 있는지, 도대체 여기까지 접근하는데 벌써 20일은 지났고...


사진작업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주제에 접근하는 전략이다. 그런데 냉혹하게도, 허비하는 시간이나, 피로, 무료한 기다림은 항상 이 일에 따라붙는 잡일이다. 그러나 모험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 작업의 결과를 더 대단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건 아니지 않은가. 얼마나 힘겹게 작업을 했는가, 라는 무용담은 사실 별개의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더 끈기 있게 기다리고, 기다림 자체가 일의 일부라고 그는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상엽>>> 그러다가 새벽 기도시간이 되었죠. '오직 신은 유일하다'라는 이슬람 기도소리, "알라 오 아크발..."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리더라구요. 갑자기 주지사 똘마니들이 방으로 오더니 갈 준비를 하재요. 깜짝 놀랐죠. 니가 원하는 데로 데려다 주겠다는 거예요. 주지사가 내준 미쯔비시 픽업트럭 두 대에 사설경호원들 세 명, 운전기사 두 명, 통역하고 나 이렇게 나눠 탔죠. 그리고 어디론가 갔는데, 가보니 바실란 섬에 주둔하고 있는 필리핀 정부군 기지에요. 거기 산토스란 대령이 있었는데, 안 된다, 어디로 가든지 밀림 안으로 가는 건 안 된다고 해요. 너같은 외국인이 와서 여기서 총 맞아 죽으면 난 뭐가 되냐, 해서 또 거기서 하루를 죽였죠. 결국 주지사가 책임을 지겠다며 압력을 행사했죠. 정부군 창고에서 장갑차 한 대랑 군인 30명을 내줬어요.


퍼슨웹>> 하하, 국빈대접을 받으셨군요

이상엽>>> 그게 아니라 나 하나 안 죽게 하려고 자기들 입장에선 최선을 다한 거죠. 그리고 밀림 앞까지 와서 정부군들은 자기들 영역이 아니니까 간다고 해서 거기서부터 트레킹을 했죠. 밀림캠프에서 온 가이드랑 5시간을 걸었죠. 캠프에 도착하니 정오예요. 반군캠프라고 해서 남자들만 있는 게 아니라 가족들이 다 있어요. 민다나오는 경제적으로 굉장히 낙후된 곳이에요. 마닐라시티가 있는 루손 섬은 카톨릭이 지배하고 있고 발전된 반면, 이쪽은 무슬람 지역이에요. 그러니 무기나 이런 것들이 중동을 통해 들어와요. 리비아 등에서 지원하고 있고요. 그 사람들은 게릴라라는 말을 싫어해서, 자기들을 코만도라고, 즉 용사라고 부르죠. 코만도들은 리비아에서 유학한 인텔리들이에요. 군사훈련부터 이슬람 종교교육까지 해외파들이 장악하고 있죠. 이 해외파들이 군사교육은 또 북한 사람들한테 받았구요.


퍼슨웹>> 사진을 보니 무척 젊은 사람들이 많던데요, 가족들이 농사짓는 장면도 있던데..

이상엽>>> 거기서 한나절 취재했죠. 가족들과 어떻게 사는지도 보고. 그 사람들, 농사도 짓고, 군수품도 받고 그러죠. 그러다 정부군이 토벌하러 오면 싸우는데 어떨 땐 가족까지 몰살당해요. 제가 들어가기 전 2개월 전에도 두 개 캠프가 완전히 짓밟혔죠. 30년 동안 15만 명이 민다나오에서 죽었어요. 필리핀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내전이죠. 동남아에서도 그런 내전은 드물죠. 그렇게 취재하고 나왔어요.

"MILF가 장악한 투부란과 아브샤야프가 장악하고 있는 띠뿌띠뿌를 거쳐 말라위에 도착한 것은 출발한 시각으로부터 5시간이 흐른 뒤였다. 말라위에 도착하자마자 정부군 장갑차와 병력은 쏜살같이 자기 부대로 돌아갔다. 우리는 캠프에서 마중을 나온 5명의 무장 MNLF게릴라의 안내로 밀림 '하이킹'을 시작했다. 35도를 넘는 더위와 찌를 듯이 솟아있는 야자수로 햇빛마저 스며들지 않는 밀림 속에서 2시간 가까이 곤충과 수풀을 헤치고 다녔다. '내가 안전할 수 있을까'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오직 '알라'만이 알고 있었다."

- 이상엽,「경제발전을 위한 민다나오의 새로운 투쟁」에서


퍼슨웹>> 그 작업 의뢰는 어디서 들어왔어요?

이상엽>>> <한겨레21>요. 기획안 제출하니까, 성공할지 안 할지 모르겠는데, 가져오면 실어주겠다고 했지요. 특집으로 실렸어요.

퍼슨웹>>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은요?

이상엽>>> 필리핀 반군 취재 때도 그랬지만, 대체로 취재 자체를 즐길 여유는 없었어요. 이 취재를 성공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굉장히 크죠. 그런데 운이 닿아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같아요. 사실 취재의 즐거움을 주는 건 그런 주제들이 아니죠. 재미있는 작업은 제가 예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주제에 대해 사심없이 카메라를 가지고 노는 거예요. 말레이시아 말라카 여행이 그 좋은 경험이죠. 작년의 동티모르 경우도 기획을 해서 충분한 자금을 가지고 가서 부담이 없던 편이었구요.


퍼슨웹>>사진으로 소통하는 방식에 대해 좀더 구체적인 계획이 있으시다면?

이상엽>>> <이미지프레스>의 진짜 목표는 사실 우리가 사진 에이전시 겸 하나의 미디어가 되는 거지요. 사진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정확하게 세우는 거요. 사진은 사실 객관적인 것이 아니죠. 사진가의 주관이 개입을 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어요. 또 캡션(caption, 짤막한 사진 설명) 하나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도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구요. 진실한 이미지를 어떻게 사회에 제공해줄 것인가, 이게 미디어적 기능이죠. 그리고 그 미디어를 운영하고 사진가에게 투자를 위한 자금이 필요하죠. 사진을 팔고 자금을 마련해주는 게 에이전시죠.

이 양자를 하기 위해 웹진을 통해 사진가를 모으고, 사진을 생산하고, 또 이게 한국사진, 미디어산업의 또 하나의 축을 만드는 일이 되는 거죠.

인구 4천만에 불과한 내수시장에서는 다양한 목소리를 내기 힘들어요. 적어도 일본처럼 1억 정도는 되어야 미디어시장이 제대로 굴러간다고 하거든요. 근데 우리 나라 인구가 갑자기 폭발적으로 늘 수는 없는 거니까 한국 사진가들의 해외진출이 필요하다 생각해요. 한국 사진가가 해외로 진출하고, 반대 경우도 있을 수 있고요. 이미지프레스는 바로 그걸 위한 전단계, 그 정도라고 생각해요.


<매그넘>이란 최초의 사진통신사가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편집자들이 요구하는 사진을 찍어야 했던 관행을 거부하고, 사진가의 관점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사회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편집자들과 싸우고, 때려치우는 사진기자들은 많다. 이상엽이나 다른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생각하는 것은 바로 독립적인 시각을 견지할 수 있는 사진가 네트워크이다.


< 4 > 시각의 충돌, 해석의 싸움

1930년대부터 1950년대 사이에 뉴욕에 <포토리그>라는 사진가 집단이 있었다. <국제노동자구조협회>의 문화활동으로 시작했으니 꽤나 정치적인 목적이 뚜렷한 집단인 셈이다. 그 목적의 일부는 이렇다. 미국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반영하는 기록영화를 제작하고, 또 소비에트의 위대한 예술적 업적을 널리 알린다. 물론 공산주의적인 이런 요소는 활기를 부여함과 동시에 몇 년 뒤엔 문제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다들 알다시피 50년대는 메카시즘의 해였다.

활동방식도 좌파다왔다. 사진을 찍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저렴하게 수강할 수 있었고, 젊고 활기찬 사진가들이 강사로 활동했다. 사진 자체도 훌륭한 것들이 많았다. 이들의 선언문을 보라. "사진은 막대한 사회적 가치를 가진다. 사진가들에게는 오늘날의 세계에 대한 참된 이미지를 기록할 책임과 의무가 주어져 있다. 오랫동안 사진은 조형주의자들의 헛된 영향 때문에 고통받았다. 포토리그의 할 일은 미국을 촬영하기 위해 카메라를 사용하려는 정직한 사진가들의 손에 카메라를 되돌려주려는 것이다"

선언문은 다소 과격하지만 의외로 사진들은 소박하다. 이들은 주로 할렘가, 변화해가는 대도시의 거리들, 일하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대상으로 작업했다. 그리고 '회화적이거나 예쁘장한 사진들'은 혐오했다.(아더 로드스타인 지음, 임영균 옮김, {다큐멘터리 사진론}) 달콤한 건 딱 질색이라는 식이다.


1920년대에 독일에서는 노동자/사진가(Arbeiterfotograf) 운동이 출현했다. 누구나 셔터를 누르기만 하면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사진은 '최초로 대중들의 손에 쥐여진 매체'였다.

한국사회에서도 민중문화에 대한 관심과 함께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을 기록하려는 움직임들이 활발했다. 사회사진연구소나 대학의 사진집단들, 노동조합의 사진패들이 그들이다. 물론 사람들 사는 곳이 싸움과 갈등만 있는 건 아니니까, 그 뒤에 이런 경향들은 좀더 다양한 주제로 넓어진다.

사회개혁이나 모순에 관한 것만이 다큐멘터리 사진은 아니다. 게다가 계몽주의와 사회고발이란 거창한 목적의식을 벗어 던지게 되면서, 사적인(私的) 다큐멘터리로 불리는 주제들에 대한 작업도 많아지고 있다. 즉, 사진찍기는 글쓰기와 비슷하다. 그래서 평론가 존 버거(John Berger)는 사진을 '말하기의 다른 방법 Another Way of Telling'이라고 명명했다.



퍼슨웹>> 사진은 강렬한 이미지를 주잖아요. 주관에 의해 왜곡되기도 하고 다르게 해석되고, 보는 사람에 의해 다르게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측면도 있지만. 일단 현실을 그대로 찍어낸다는 점에서는 정직한 매체이기도 한 건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다큐멘터리 사진은 가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진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구요. 물론 놀러가거나 기념으로 찍는 사진은 흔하지만요. 다큐 사진은 어떻게 보면, 한 권의 책이나 글처럼 사진가의 시각이 담겨진 건데, 현실적으로 대중과 가까운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요.

이상엽>>> 아니에요. 사실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천 장의 사진을 봐요. 근데 수천 장의 사진 중에서 시각을 1초라도 머무르게 하는 사진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거죠. 사진이야 너무나 많이 보죠. 텔레비전 이전에는 인쇄 매체를 통해 사진을 봤죠. <라이프>지라든지. 근데 이젠 리얼타임으로 정보가 제공되죠. 그때부터 사진은 사멸하는 것처럼 보였죠. 그런데 전지구상에서 인쇄매체들이 한번이라도 줄어든 적이 있느냐면 그건 아니거든요. 사진 역시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이 쓰이구요. 그건 사진의 평준화인 동시에 하향평준화인 셈이죠. 통신사 사진들이 대부분 뛰어나진 않아도 속보를 위주로 하기 때문에 사건을 전달하는 데는 쓰여요.

하지만 <매그?gt;이나 사진 전문 에이전시의 경우는 다르죠. 그런 곳에 청탁하는 걸 많이 꺼리죠. 자신의 시각이 담기고, 또 얼마나 이 사건들을 이해하는지를 보여주려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당연히 비용도 많이 들죠. 그러니 편집자들이 싫어해요. 좋은 사진들이 안 쓰이는 건 자본주의 사회라 더 그런 거죠. 비유하자면 마이크로소프트가 오히려 컴퓨터 신기술을 사장시키고, 독점하는 거나 마찬가지 맥락이죠.


다큐멘터리 사진이 사람들의 관심을 예전처럼 사로잡을 수 있을까, 미심쩍어 묻는 내 말에 그는 강력히 "아니다!"라고 했다. CNN식 속보 경쟁의 문제점, 이를테면 치고 빠지는 식의 작업방식들은 많은 비난을 받아온 것들이다. 그들은 우르르 몰려들어 찍고 떠나버린다. 내전과 난민, 기아에 허덕이는 검은 피부의 사람들은 이제 너무도 흔해져서 사람들은 예전처럼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하게 된 것 아닌가. 이런 사진들도 일종의 cliche처럼 된 것 아닌가, 내 머릿속엔 이런 의아함이 뭉쳐졌다. 이런 부분에 대해 묻는 건 꽤 곤혹스러웠다. 마치 정서적 불감증을 드러내는 것처럼. 인터뷰를 하면서 자꾸, 예전의 오래되고 똑같은 낡은 의문들을 더듬거리는 초보자의 마음이 되었다.


퍼슨웹>> 60년대 이후 현대사진은 예전의 정보제공이나 신속한 전달이라는 보도의 기능에서 다른 영역으로 옮겨가는 경향을 띠잖아요. 즉 해석이나 의미를 중요시하는 사적 다큐멘터리 등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잖아요. 단순한 정보전달이 아니라, 사회와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고요. 텍스트처럼 이젠 사진도 해석의 영역으로도 넘어가지 않았나요. 즉 사진가는 이제 작가라는 거죠. 뭐 개인적으로 작가라는 말은 좀 싫어하긴 하지만(웃음).


이상엽>>>사진의 변화 흐름은 항상 존재했죠. 유진 스미스(Eugene Smith)처럼 도덕적인 관점으로 무장된 사람도 있었지만 5, 60년대 이후에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가 다큐멘터리를 사적인 단계로 이전시켰다고들 하지요. 다큐멘터리는 사실적이고 기록적인 것 같지만, 거기에는 사진가의 주관성이 담겨 있다는 걸 보여준 거죠. 지금의 현대 사진도 마찬가지예요.

신문 사진을 예로 들어보죠. 신문기자들이 사다리를 들고 다녀요. 사다리에 올라가 카메라 앵글을 밑으로 하고 찍으면 객관적이라는 느낌을 주죠. 그런데 그걸 뒤집어서 아래에 앉아 위를 찍으면 굉장히 다른 느낌을 줘요. 그리고 상당히 주관적으로 보여요. 그건 카메라 앵글이 가진 이데올로기가 되겠죠. 이걸 어떻게 활용하고 어떤 느낌을 줄 건가에 대해선 이미 많은 연구가 되어 있구요. 사진도 처음에 전쟁 상황 같은 경우 그렇게 끔찍하고 살벌한 장면을 보여주지 않았는데, 지금은 점점 강도가 세지고 있어요. 영화도 그런 단계를 밟아 왔죠. 사진가들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걸 요구하는 대중들의 요구도 문제라고 봐요. 점점 자극적인 걸 원하는 거요.


예를 들어보자.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내전, 기아, 빈곤, 도시 빈민가 등이 대부분이다.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주제들이라 여기에 집중하게 된다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이런 소재에 편향된 사진들이나 사회모순을 담은 사진들이 계속 재생산되면서 때론 소재주의에 치우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실제로 아시아가 이런 모습을 지니기 때문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겠지만, 서구의 일부 사진가들이 그런 스테레오 타입으로 아시아에 접근한다는 느낌이 사실 꽤나 불편하다.

이상엽>>> 어떻게 보면 소재주의냐 아니냐는 종이 한 장 차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표현해서 대중에게 보여줄 것인가는 전적으로 사진가의 세계관에 맡겨야 해요. 살가도*의 작업을 보면, 제3세계 노동의 현장을 담았죠. 그것도 어떻게 보면 소재주의죠. 그런데 그 소재가 모여 가 되었죠. 그 사진집은 자본주의에서 노동에 대한 편견과 병폐가 어떻게 제3세계 사람들에게 전가되는가를 잘 보여주죠.

스리랑카 차잎 따는 일꾼의 거친 손과, 영국 살롱의 고상한 '차 마시기'를 비교해 보세요. 그 차 한 잔과 찻잎 사이에 있는 거친 손 사이에서 노동의 의미는 어디로 증발되는지, 사진집에서 웅변적으로 말을 해주죠. 그걸 해석하는 사진가의 역량에 그 부분을 맡겨야지요. 저도 옛날에는 사진을 찍을 때 이건 소재주의 아니냐, 그런 고민도 했는데, 사실 그거라도 제대로 했으면 좋겠어요(웃음).


*세바스티오 살가도(Sebastiao Salgado): 7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아프리카 사헬, 유럽의 이주 노동자, 제3세계 노동현장, 걸프전, 브라질 노천광산, 남미 인디오들의 삶, 난민들을 주제로 작업해온 브라질 출신의 사진가로 , 등의 사진집이 있다.

http://sazine.pe.kr/photographer/salgado.htm


퍼슨웹>> 약간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2차 대전이나 한국전쟁 때 종군기자로 활약했던 미국의 더글라스 던컨(David Douglas Duncun)의 전쟁 사진을 보게 되면, 이 해석의 문제가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쟁의 본질은 제국주의나 이념을 둘러싼 비극적인 전쟁인데, 사진 하나하나는 미군들을 영웅적인 모습 혹은 숭고한 희생자로 표현하거든요. 사진은 기막히게 멋진데, 역사적 맥락 속에서 볼 때는 이 사진들이 도대체 뭘 말하느냐는 걸 한번 더 생각하게 되요.


이상엽>>>그 당시에서는 냉전시대였죠. 거기에서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은, 지금 부시가 말하는 것처럼 선악의 대결이죠. 미국 사진기자들이 보는 자기네 병사는 선의 화신이죠. 사진가가 이미 이데올로그가 된 거죠. 근데 결정적으로 그게 베트남전부터는 달라져요.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을 쓰레기 같다고 미국 기자들이 찍기 시작했거든요. 현대사진에 와서 기자가 어떻게 가치중립적일까 고민을 하게 된거죠. 종군기자들 역할이 달라진 거죠. 미국 정부도 이걸 알고 있으니까 걸프전 때는 사진촬영을 무진장 통제했죠. 베트남전 꼴 날까봐. 사진 못 찍게 하고, 굳이 찍을 때는 탱크 갖다놓고 군인들 데려다 놓고 완벽히 연출을 시킨 다음에 찍으라고 했대요. 그러니 사진가들이 화가 나서 안 찍어 버리고, 비밀리에 쿠웨이트로 잠입해서 찍어버리게 되는 거죠. 쿠웨이트 유전 화재 사진들은 또 다른 전쟁의 측면을 보여주고 감동들을 줘요. 현대의 저널리스트들은 정말 예전보다 가치중립적이고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고 생각해요.


퍼슨웹>> 오히려 반전을 고취시키는 사진들이 이젠 많죠.

이상엽>
작성일:2013-05-01 19:46:48 180.81.3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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