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사 박문수 초상화. 윤여헌 공주대 명예교수 제공.
“공(公)은 유성 학하리 출생이며 만년에 공주읍 교동에서 거주하였다.”

공주의 역사서 ‘공산지’의 공신조(功臣條)에 어사 박문수의 이 같은 기록이 있다. 어사 박문수가 공주에서 말년을 보냈기 때문에 공산지에 이름이 오른 것이다.

공산지에는 정사(正史)를 인용해 ‘박문수는 영조 술신(1728년) 박필몽(朴弼夢), 이인좌(李麟佐) 등이 청주에서 거병해 병사 이봉상(李鳳祥)을 살해하고 서울로 향하자 조정에서는 병판 오명항(吳命恒)을 도원수로, 공(公)으로 종사관을 삼아 출정해 안성에 이르러 공(公)의 계략으로 참적수(斬賊首)하였기 고 공(功)으로 이등공신으로 책하고 영성군에 봉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정사의 기록보다는 지모(智謀)로써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고, 통쾌하게 징악(懲惡)하는 야사(野史)의 어사 박문수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의 입으로 회자되고 있다.

공주의 역사서인 공산지에 등재된 인물이라면 공주와 관련이 있어야 하는 것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가령 이 고장 출신이라거나, 거주했다거나, 아니면 묘소가 있다거나 하는 등 지역과의 연관이 있어야 한다.

공주향토지(1935년, 공주고보교우회 간)에 ‘공주 금정(錦町) 현 권익채씨가(權益采氏家)가 생가(生家)’라는 기사가 보인다. 생가라는 것은 착오가 분명하고 금정(錦町)은 일제 때의 동명으로 지금은 교동으로 개명하였으니, 과연 권익채씨가 교동에 거주했는지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윤여헌 공주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시청 호적계의 도움을 얻어 추적한 결과, ‘대정(大正) 13년(1924년 욱정(旭町) 293번지→금정(錦町) 52번지)로 번지가 변경되었고’ 같은 날 즉, ‘대정(大正) 13년(1924년) 2월 18일 해당가옥이 권익채씨 앞으로 소유권이 이전’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위치는 현 교동의 지번 52와, 지번 62-1의 2필지로, 면적 2,163.3㎡(약 714평)가 어사 박문수가 말년을 보낸 집터이다. 
 

▲어사 박문수 집터 약도. 윤여헌 교수 제공.

저작권자 © 파워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