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공주문화원장.
2월 말에 이사 와 6월에 딸아이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서 더운 여름철이 닥쳤다. 우리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집은 슬레이트 지붕에다 천장까지 낮아서 해가 떠오르기만 하면 아침나절부터 덥기 시작했다.

불가마 속 같다고나 할까. 도저히 방 안에서 견뎌 내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우리에겐 더위를 식히거나 피할 수 있는 아무런 방책도 없었다. 장기간 머물 만한 시골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피서를 떠날 만큼 주변머리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부채와 달달거리는 낡은 선풍기 한 대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피서 도구였다.

해가 지고 나도 방 안의 열기는 여전했다. 낮 동안 햇볕에 달구어진 지붕이며 벽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그랬다. 집이 개울가에 있어서 물것까지 많이 날아 들어와 엉기니 불도 마음놓고 밝힐 수 없었다.

방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무작정 바깥에서 서성거릴 수도 없고․․․․․․․. 하는 수 없이 우리 식구는 덥혀진 방 안의 공기가 어느 정도 식을 때를 기다려 유랑길에 오른 사람들처럼 마을의 골목길을 어정거려야만 했다.

아들아인 걸리고 딸아이는 안고.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장소가 있으면 그 자리에 한동안 주저앉아 있기도 했다.

세 든 집 가까이에 조그만 교회가 하나 있었다(지금도 그 교회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교회 역시 개울가에 자리 잡고 있는데 교회 옆은 야산으로 이어져 있고 야산이 시작되는 곳에 너럭바위 하나가 있다. 우리는 저녁마다 버릇처럼 그 너럭바위를 찾아갔다.

그만한 쉼터가 없었던 것이다. 바위에 앉아서 보면 저물어 가는 하늘에 제 집을 찾아서 날아가는 새들이 보였다. 아, 새들도 자기 집이 있어 저렇게 제 집을 찾아서 날아가는데 도대체 우리는 뭐란 말인가.

바위는 밤이 깊어도 따스한 온기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그 온기가 우리를 반겨 주고 우로해 주는 바위의 마음이라도 되는 듯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오랫동안 바위 위를 떠나지 못했다. 그러나 무작정 퍼질러 앉아 밤을 보낼 수는 없는 일. 두 아이에게 달라붙는 물것들을 조그만 부채로만 쫒기엔 역부족이었다.

우리에게도 집이 있었으면․․․․․․. 터덜터덜 걸어 사글셋방으로 돌아오면서 입을 열어 말은 하지 않았어도 아내의 심정 또한 나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부부는 두 아이를 데리고 좀 더 본격적으로 마을 구경에 나섰다. 집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속칭 지막골. 행정 구역 이름으로는 금학동. 개울을 따라 길이 나 있고 길을 따라 양쪽으로 집들이 들어차 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이 마을에서 하숙이나 자취를 했기에 이 마을에 대해서 대강은 알고 있는 터였다. 이 마을에 있는 집들은 겉모습이 닮았다. 아니, 똑같다. 같은 시기에 같은 목적으로 같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지었기 때문이다. 흔히 이 마을의 집들을 후생주택이라고 부른다.

6.25 전쟁 후 미국에서 보내 준 원조 물자로 지어서 집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싼값에 나누어 준 집이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내가 처음 이사 왔을 때만 해도 이 마을 사람들의 사는 형편은 너나없이 힘들었다. 그래서 다른 동네 사람들은 이 마을 사람들을 생보자 또는 생활보호 대상자라 불렀고, 동료교사들은 나더러도 그렇게 불렀다.

"여보, 교회 윗동네에 적당한 집이 하나 났대요. 우리 한번 가 봐요."

어느 날 아내가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그동안 동네 사람들에게 입 소문을 내놓았는데 그것이 답이 되어서 돌아온 모양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팔려고 내놓았다는 집을 찾아가 주인과 만났다. 주인 내외는 순후한 인상의 사람들로 남편이 나와 같은 초등학교 교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복덕방을 끼지 않고 사고파는 사람끼리 직접 주고 받는 거래가 좋다고 했다.

집값은 400만원.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집이 많이 헐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어쩌면 그리도 집을 가꾸지 않고 살았는지 의아스러울 지경이었다.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지 싶었다.

철대문은 부식될 대로 부식되었고 유리창의 나무틀은 썩어 내려앉기 직전이었다. 집의 몸체라 할 벽도 발로 건드리기만 해도 시멘트 조각이 푸슬푸슬 부서져 내렸다. 좁은 마당 역시 전혀 손을 보지 않아 돌부리가 울퉁불퉁 나와 있었다. 다만 맘에 드는 것은 마당 한 편에 서 있는 커다란 감나무 두 그루였다. 대지는 32평.건평 16평.

이사를 와 집 안으로 들어와 보니 내부는 더욱 엉망이었다. 집을 지은 뒤로 한 번도 도배를 하지 않은 듯 덕지덕지 때가 묻은 벽이며 천장에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창틀이었다. 깨지고 망가진 유리창 사이로 찬바람이 술술 들어왔다.

어쩔 수 없이 널따란 비닐을 구해다가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밖에서 봉해 버렸다. 그랬더니 이번엔 방안에 수증기가 창문으로 서려 창틀이 썩기 시작했다. 그런들 어떠랴. 겨울 추위만 넘기고 봄이 되면 집을 고칠 계획을 우리는 가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비록 헌 집이지만 우리만의 방이 생기고 마루가 생기고 부엌이 생기고 작두샘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식구들은 충분히 마음이 따뜻했고 오랫동안 행복감에 젖을 수 있었다. 그 집에 들어 살기를 13년. 두 번씩이나 대폭적으로 집 수리를 하느라 수월찮이 돈도 들었지만 좋은 일도 제법 있었다.

우선 아이들이 자란 것이 가장 큰 보람이었다. 아들아이는 중학생이 되었고 딸아이는 초등학생교 고학년이 되었다. 나는 그 집에서 두 번씩이나 문학상을 받았으며, 통신 대학 공부에 이어 대학원 공부를 했고, 교직에서는 교감으로 승진했다가 전문직으로 전직하기도 했다.

30대 중반에서 40대 후반까지 인생의 가장 중요하고 좋은 시기라 할 나이를 보냈던 집. 우리 가족이 세상에서 맨 처음으로 자져 보았던 삶의 터전. 그 집에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좁은 마당에 만든 휴식 공간이다. 좁은 마당인 푼수치고는 지나치게 크다싶은 두 그루의 감나무. 그 두 그루의 감나무 사이에 드리우는 짙은 그늘이 좋았다.

그 부분에 시멘트 벽돌을 네모나게 쌓고 겉을 곱게 발랐다. 우리는 그것을 '평상'이라 불렀다. 볕이 들 때면 아이들은 그 평상에서 놀았고 춥지 않은 계절에는 그 위에서 밥을 먹기도 했다. 더러는 강낭콩을 듬성듬성 넣어서 찐 밀개떡을 먹기도 했을 것이고, 애호박을 썰어 넣고 끓인 수제비나 국수를 별식으로 먹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 집은 헐리고 지상에 없다. 우리가 아파트로 이사올 때 우리에게 집을 산 새 주인이 한동안 살다가 헐어 버렸다. 내가 무던히도 아끼고 좋아했던 두 그루의 감나무도 베어 없어지고 우리 식구들이 애용하던 '평상'도 사라져 버렸다. 지금은 마음속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우리 집. 아니 우리가 잠시 살았던 집. 그리고 감나무 두 그루와 '평상'. 무엇이 정말로 있는 것이고 또 무엇이 정말로 없는 것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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