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곡동

느지막한 아침 시간, 외출하기 위하여 옷을 갈아입던 참이었다.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고 있던 아내가 무심한 듯 한마디 했다.
“여보, 여부, 저기 좀 보세요. 올해도 산수유 꽃이 폈어요.”
우리 아파트에서 바로 건너다보이는 앞산의 발치 부분에 노랑 옷을 걸친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해마다 이맘때면 노란색 꽃을 피우고 가을이면 붉은 단풍을 보여 주는 산수유나무다.

“어디, 어디, 어디요?”
호기심 많은 나는 빠른 걸음으로 거실을 가로질러 베란다 쪽으로 나간다.
“ 얼라, 정말로 산수유꽃이 피었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꽃이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어느 사이엔가 저렇게 꽃이 피어버린 모양이다.
“산수유꽃만 핀 게 아니에요. 개울가 양 선생 댁에는 영춘화도 피었어요.”
“아, 그래요? 그럼 얼른 보러 가야지.”

봄에 피는 꽃들은 빨리 지고 만다. 그러기에 꽃이 핀 것을 알았을 때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보러 가야만 한다.
와이셔츠 차림인 채로 카메라를 걸치고 아파트를 나갔다. 정말 양 선생 댁 대문 앞에 한 무더기 샛노란 꽃 덤불이 보인다. 영춘화다. 영춘화는 꽃이 노랗고 꽃가지가 휘어져 멀리서 언뜻 보면 개나리꽃과 혼돈하기 쉽다. 그러나 조금만 성의를 가지고 보면 개나리 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선 개나리 꽃은 종 모양의 꽃부리인데 영춘화는 꽃잎이 여섯 잎으로 갈라져 있다. 영춘화는 맞을 영(迎), 봄 춘(春), 이름 그대로 해마다 오는 봄을 반가이 맞아들여 환영하는 마음으로 피는 꽃이다.

그러고 보니 봄에 피는 꽃 가운데 노란 빛깔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수유, 개나리, 영춘화, 수선화, 민들레 모두가 노란색이다.
노란색이야 말로 겨울을 이긴 승리의 빛깔이다. 그들은 비교적 꽃송이가 작고 빨리 꽃을 피웠다. 진다는 점에서도 같다. 아마도 다음에 오는 꽃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아파트로 돌아오면서 나는 산수유꽃이 많이 피어나는 한 마을을 떠올려본다.

우금티 너머 부여 쪽으로 자동차로 10분 정도 달리다가 왼쪽으로 꺽어져 들어가는 산골짜기에 있는 한 마을이다. 이름이 오곡동. 골짜기가 많아서 오곡동이었을까? 오곡동은 젊은 시절의 글벗 김현기 씨의 고향 마을이다. 김현기씨는 공주 태생으로 1970년대 초 나와 함께 ‘새여울’이란 시 동인지에 시를 발표하곤 했다. 그는 현재 공주 시내 한 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공주시내의 한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거기서 내가 사회를 맡았다.

결혼식을 마치고 친구들이랑 어울려 그의 고향마을에 갔다.
산골 마을이었다. 지대가 높고 돌맹이가 많았다. 꼬불꼬불 돌아서 가는 마을길이 아늑하고 정감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 잊혀진 마을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봄날 가운데서도 흐드러진 봄날이었다. 마을 곳곳에 산수유꽃이 피어 있었다. 샛노란 너울을 뒤집어쓴 듯한 나무들. 그날 산수유꽃을 처음 보았다. 아니다. 처음 알았다고 말하는 것이 적당한 표현일 것이다.

이전에도 여러차레 보기는 했지만 주의 깊게 보지 않다가 그날에야 비로소 산수유꽃을 산수유꽃으로 알아보았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봄 햇빛 아래 마을 전체가 샛노란 물이 든 것처럼 보였다. 그날 나는 친구들이랑 어울려 수월찮은 술을 마셨던 것 같다. 허튼소리도 꽤나 지껄였던 것 같다.
산수유꽃은 자세히 보면 복잡한 꽃이다. 꽃대의 끝에 여러 꽃자루가 방사형으로 나와 그 끝에 꽃이 하나씩 피는 산형(傘形) 꽃차례로, 한 개의 꽃송이 속에 30개도 넘는 아주 작은 꽃들이 모여 있다.
(실지로 꽃송이들 따서 세어 보았더니 35개나 되는 꽃도 있었다.)

그 작은 꽃송이들이 입을 벌려 빠끔빠끔 숨을 쉬는 것 같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들으면 뿅, 뿅 하는 소리를 내면서 노란 물감을 하늘과 공기 속에 풀어 넣고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봄을 자꾸만 노란빛으로 바꾸는 게 아닐까. 내일이라도 날씨가 좋으면 짬을 내어 오곡동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산수유꽃을 다시 보러 가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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