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두루 다녀 보았지만 공주처럼 아기자기한 고장도 별로 없다. 공주의 자연처럼 웅숭깊은 자연도 흔하지 않다. 예로부터 공주에는 ‘춘마곡(春痲谷) 추갑사(秋甲寺)’라 하여 봄에는 마곡사 봄 경치(신록)가 볼만하고 가을에는 갑사의 가을 경치(단풍)가 볼만하다는 말이다.

이 말에는 경치 구경 얘기만이 아니라 보다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봄과 가을, 춘추(春秋)라니! 춘추는 사람 나이의 다른 이름이요, 그 자체가 세월이요, 또 역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야말로 인생과 철학이 스며든 말로 공주의 자연과 그곳 사람들을 잘 나타내 준다.

그뿐만 아니라 계룡산(鷄龍山)과 금강(錦江)은 어떠한가? 이만큼 우람한 산 하나, 이만큼 기나긴 강물 하나 만나 어울리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금강 물 천 리라 하지만 금강 물은 공주 어름에서 계룡산을 만나야만 비로소 서럽고도 아름다운 비단강을 완성한다. 계룡산 또한 금강 물과 어울려서야 그 자신 신령스런 산으로 깊어진다.

공주 시내로 시야를 좁혀도 마찬가지다. 공산성(公山城)과 제민천(濟民川)! 이 또한 보통의 만남이 아니고 보통의 어울림이 아니다. 도심 한가운데로 유유히 흐르는 개울 하나도 그러하려니와 그 끝자락에 금강물을 등에 지고 동그마니 나앉은 산성 하나야 말로 공주 시가지의 핵심이라 할 것이다.

일찍부터 계룡산에는 네 개의 절이 있었다. 동쪽에 동학사(東鶴寺), 남쪽에는 신원사(新元寺), 서쪽에는 갑사(甲寺), 북쪽에는 구룡사(九龍寺). 이 절들은 절로서만이 아니라 계룡산을 지켜주고 계룡산을 더욱 계룡산답게 만들어 주는 산의 일부이다. 이렇게 네 방위에 그럴듯한 절을 하나씩 앉히고 있는 산이 또 있다는 이야기를 아직은 들어 본적이 없다.

동서남북 그리고 중앙. 이는 동양의 음양오행설에 근거한다. 서울의 사대문(홍인지문,숭례문,돈의문,숙정문)이 그러하고 공주의 공산성의 네 개의 누각인 동문루(東門樓), 진남루(鎭南樓), 금서루(錦西樓),공북루(供北樓)의 존재가 또한 그렇다. 이런 사례들은 예로부터 공주 사람들이 살아온 삶의 품격을 짐작하게 한다.

공산성도 보통의 산성이 아니다. 가히 백제 왕궁이 들어설 만한 터전이다. 도심 한가운데 이만큼 고색창연한 수풀을 이루기도 어렵거니와 산성 곱이곱이에 품고 있는 자취 또한 수풀 못지 않다. 공산성에 들어갔다 나오면 언제나 한바탕 기나긴 꿈을 꾼 것만 같이 느껴짐은 그러한 산성의 매력 때문일 것이다. 공산성 둘레를 돌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동문루 사이의 토성 부근이다.

그 위에 높이 서서 바라보면 공주 시가지뿐만 아니라 멀리 공주 분지의 산봉우리들까지 그대로 내려다보인다. 봉긋한 산봉우리들 하나하나가 젊은 어머니의 젖가슴같이 보이기도 하고 봉분이나 초가지붕같이 보이기도 하다가 끝내는 그 모든 산봉우리들이 한데 어울려 한 송이 커다란 꽃송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꽃송이라도 그저 그런 꽃송이가 아니다. 소담스러운 함박꽃이거나 작약, 그 너울대는 넓은 이파리의 꽃송이로 보인다.

공주가 그런 곳이다. 자연이라 하더라도 쓸쓸히 홀로 있는 자연이 아니라 어울리고 짝 지어 의초로운 자연이요, 자연과 산천을 이야기하면서도 인생과 철학에 바탕을 두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공주 사람들이다. 그러니 내 일찍이 공주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공주에 살고자 했고 지금도 공주에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공주에 살고 싶은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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