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자연미술가협회(야투) 고승현 회장

▲ 고승현  회장.
<1편에 이어> 나태주: 작가들이 와서 어떻게 활동하는데요?

고승현: 그들은 이곳의 열악한 환경 가운데 함께 숙식하고, 7-8월의 폭염아래 낮에는 중노동에 가까운 현장작업을 하고 밤에는 모기에 물려가면서 작가별 작품 프리젠테이션과 토론회를 갖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자유로운 친교의 시간도 갖습니다. 관심 있는 시민과 학생들도 참관을 할 수가 있습니다.

나태주: 2010년도 비엔날레에는 몇 개 나라에서 몇 명의 작가가 오나요?

고승현: 올해는 한국작가를 포함해서 15개국, 45명이 참여하고 이와 별도로 체류작가 프로그램(Artist in Residency)에는 10개국 11명 정도가 참여하여 총 56명이 될 것입니다.

나태주: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보았을 때 가장 감동적으로 참가하면서 고 회장님의 기억에 남는 작가는 누구입니까?
고승현: 여러 작가들이 생각나는데 그중 영국의 여류작가 케리 모리슨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녀는 1995년에 공주 곰나루에서 개최되었던 금강국제자연미술전에 참가하였다가 당시 초대작가였던 독일의 헬므트 렘케와 몇 년 후에 결혼을 하게 되었지요. 공주 금강에서 만나 인연이 되어 결혼하게 된 국제 커플이지요. 그녀는 95년 처음, 곰나루에서 손수 체인톱으로 나무를 조각하여 약 3m 높이의 새싹 풀잎을 제작 설치를 했었습니다. 우리가 밭은 느낌은 아주 씩씩한 여류 조각가가 분명했었습니다. 그런데 13년이 지난 2008년 비엔날레에 참여했을 때는 아주 색다르고 흥미로운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그녀는 한국으로 오기위하여 영국의 본인 집에서 참외, 토마토 등 과일만을 먹고 출발하였지요. 그리고 한국의 공주 연미산에 도착하여 부드러운 흙 밭에 똥을 쌌고 몇 일후 몸속으로 운반된 씨앗들의 싹이 나고 그 싹은 작가 본인에 의하여 여러 개의 화단과 화분에 옮겨 심어 자라는 과정을 관람객들에게 보여주어 매우 흥미를 끌었습니다. 그녀는 또 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공주 재래시장에 가서 그곳에서 파는 우리나라 참외, 수박 등 여러 과일들을 사먹고 영국에 돌아가서는 똑같은 방법으로 똥을 쌌고, 한국, 공주의 수박과 참외 등의 싹을 내어 재배하였습니다. 그녀는 이러한 모는 과정을 기록하였고 이 기록까지의 전 과정이 그녀의 작품이었습니다. 진정으로 자연미술가로서의 좋은 작업을 보여준 한 예라고 할 수가 있었습니다.

나태주: 회장으로서 지내온 소회는 어떠십니까?

고승현: 제가 회장을 맡고 있는 것이 명예직이 아닙니다. 만일 명예직이라면 저는 이 회장직을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야투는 어떤 회칙이나 회장도 없이 진행만 맡았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1991년부터 국제교류전을 개최하다 보니까 행정적인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단체가 조직화되어야 했고 대표성을 지닌 회장직이 필요하게 되어 제가 그 역활을 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 밖에 사회단체활동을 거의 못합니다. 지금 맡고 있는 일만해도 너무나 벅찹니다. 그리고 저는 단체장들과 연대해서 갖는 그 어떤 모임에도 일체 참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형식적인 자리는 심정적으로 불편하고 어색해요. 체질적으로 잘 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다른 회원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냥 본연의 순수 자연미술 활동만을 하는 거지요.

나태주: 지금도 여전히 수줍어 보이십니다. 고 회장님과 자연미술과 연결시켜 오래 동안 묻고 싶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고가네 칼국수’하고 고 회장 댁, 본인의 주거공간과 야투와 어떻게 관계가 있나요?
그 얘기를 좀 해주시지요. 자연미술가로서 내 주거공간을 어떻게 꾸미고 살았는가?

고승현: 자연미술가로서의 저는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창작이란 말을 사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미 창조된 자연 속에서 우리의 최소한의 의식과 행위를 통해 작업을 할 뿐이지요. 왜냐면 자연 그 자체(자연공간과 자연물)가 이미 완벽한 세계입니다. 거기에 제가 뭘 아름답게 하겠습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것이에요. 자연 세계 속에서 우리가 아름다움을 더하거나 뺄 수도 없는 것이지요.

나태주: 자연이 아름다움 그 자체인데 그 위에 무엇을 더한다 하겠는가, 무엇을 더 아름답게 하겠는가, 참 좋은 생각입니다.

고승현: 그건 처음부터 안 되는 일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제가 자연미술을 하면서 얻은 것은 적응력입니다. 내가 자연환경 속에서 적응하면서 살기 위한 노력이에요. 사람인 나도 자연의 일부분이니까요. 거기서 조화를 이루어야겠다는 것이지요.

나태주: 거기서 얻은 것이 적응력이라? 그 또한 좋네요!
고승현: 조화를 이룬다는 것, 그것은 이미 있는 것을 잘 활용한다는 것이기도 하지요.

나태주: 참 좋은 말씀입니다.

고승현: 예, 정말입니다. 자연에서 체득한 거라니까요. 지금 살고 있는 집은 과거에 아버님이 가업으로 운영하셨던 공장이었는데 그 공간을 재활용한 것이지요. 저는 그 공간이 어릴 적부터 살아왔던 곳이고 아버님이 생업을 위해 애쓰셨던 공간인데 무가치하게 헐어 없애버리기보다는 그 공간을 새로운 생활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손수작업을 하게 되었지요.
또 하나 그 이면엔 우리 가정이 어려웠던 사정도 들어있지요. 형님이 교통사고로 별세하시면서 혼자되신 형수님을 위해 무언가 해드려야 하는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의 책임감도 있었지요. 더 이상 직조업을 이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거든요. 그 당시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돈도 아니었고 오직 몸으로 때울 수 있는 방법 밖에 없었거든요. 그래서 자연미술 활동을 통해서 15년간 체득한 몸에서 반사적인 기질이 나온 것이지요. 가능한 한 기존 상태를 살리고 부분은 털어내어 정원도 만들고 비싼 나무를 심는 것도 아니고 얻을 수 있는 나무를 가져다 심으면서 주변에 있는 돌을 가져다가 놓기도 하고, 폐자재를 활용해서 작업을 했지요. 옛날에 있던 공장의 구조와 공간을 활용해서 만든 것이 제가 했던 일의 전부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그 연장선상에서 한 것이지요. 그래서 저의 집 정원에는 비싼 소나무가 한 그루도 없습니다.

나태주: 그런데요. 지금 ‘고가네 칼국수’와 고 회장 댁 그 생활공간은 공주의 명물로 자리매김되어 있습니다.

고승현: 소박한 자부심에서 말한다면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얼마 전 중국의 북경미술대학 교수 한분이 왔었어요. 그는 저와 대화를 하면서 주변을 살펴보더니 칼국수집과 그 옆 생활공간을 사진으로 찍어요. 중국에서 발간되는 <중국미술>이란 격월간지에 내겠다는 거예요. 나중에 책을 받아보니 그 책은 1회에 4천만부나 발간되는 아주 영향력 있는 잡지였습니다. 그 책에 특집기사로 실렸습니다.

나태주: 그래요? 거 참 놀랍군요.

고승현: 왜냐고 제가 물었습니다. 국제적으로 당신이 소개할 장소도 많을 텐데 왜 하필이면 여기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진지하게 말씀하는 거예요. 중국에는 너무나 자기들이 지키고 싶은 도시나 건축물들이 많은데 자본주의가 도입된 뒤로는 당에서 정책적으로 결정만 하면 한 순간에 공주만한 도시가 사라진다는 거예요. 싹 때려 부순다는 거예요. 그리고 8차, 10차선, 12차선 도로가 나고 거기에 외국자본투자에 의해 어마어마한 공장이 세워지고 건물들이 쑥쑥 올라간다는 거예요. 10년이면 한 도시가 어마어마하게 새로 생긴다는 거예요.
그런데 공주에 와 보니까 50여년 아버지 세대가 가업으로 활용한 공장 공간을 아들 세대에서 그 기능이 다하니까 그곳을 부수지 않고 새로운 용도로 재활용해서 생업으로 이어간다는 데에 너무나 감동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특집으로 꾸며서 자기는 중국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고 그래요.

나태주: 그런 건 우리도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리 한국에 있는 미술잡지들에서도 이런 사례를 충분히 평가해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건 그 집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형태의 진지성을 위해서지요. 건물을 때려 부수지 않은 것 자체가 진지한 거예요. 그리고 고민을 했잖아요. 한 부분은 정원으로 했고 쑥 들어가서 주거공간이 있고 그 옆집으로 갤러리가 있고 또 상업공간이 있지요.
이렇게 연합해서 있다는 것 자체가 훌륭한 거지요. 지난번에 문학강연 차, 시인 고은 선생이 공주문화원에 오셨을 때에도 ‘고가네 칼국수’에 가서 칼국수를 자셨는데 너무나 좋아하시더라구요. 그리고 가끔 공주문화원에서 문화원 관계자 모임을 갖는데 논산문화원의 박응진 원장이 엄청 그 집을 좋아합니다. 만두도 좋아하고 우리밀 칼국수도 좋아하고 나중엔 수육을 사가지고까지 갑니다. 그런 걸 함께 몰아서 이 공간이 가치 있는 공간이라고, 살아있는 공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고 회장 말씀을 들어보니까 매우 명상적이고 종교적이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이 커다란 강물 옆에 살면 명상적이 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근원에의 그리움 같은 것을 갖는다 하는데 아마도 금강 옆에서 금강을 지켜보며 사랑하면서 살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한줌의 모래알 같은 자연물을 두고서도 창조주 하나님의 근원적인 섭리를 전제하는 것도 매우 뿌리가 깊다고 여겨집니다. 자연을 두고서 미술이라고, 미(美)라고,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는 것조차 송구스럽다, 이미 아름다운데 무얼 더 아름답다 하겠느냐 하는 대목이 그렇습니다.
미술가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안내자와 활용자로 보는 자각이 놀랍습니다. 이런 생각이나 표현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환경과 삶을 진지하게 관찰하고 성찰한 나머지 얻어지는 깊은 울림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야투도 초기의 낭만적 자연관에서 요즘의 엄격한 자연관으로 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고승현: 조금 전 저희 야투가 변했다고 그러셨는데 그 변화는 변질이나 발전과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사계절의 변화와 그 진리에 순응하며 연구하는 자유로운 방법론은 지금도 유지하고 싶어요. 이것은 끝까지 가야할 중요한 부분입니다. 자연의 순수성에 반응하고 적응해나가는 것 말입니다. 국제교류전이나 비엔날레를 개최하다보니까 전에는 자연스러움을 중시하고 굳이 주변을 의식하지 않아도 좋았는데 이제는 무언가 보여주어야 할 의무가 저희들에게 생겼습니다.
관람객들에게 보여주는 전시라는 틀과 형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걸 만들다 보니까 거기에는 일정기간 동안 야외에 보존되어야 하는 작품의 견고성, 안전성, 일정규모의 크기나 형태가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무 속에서 한정된 장소를 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자연은 언제든지 열린 공간이고 절차 없이 만날 수 있는 대상이지요. 지금도 처음에 시작한 창립 정신과 고뇌와 태도는 저희들 안에서 여전히 살아 흐르고 있습니다.

나태주: 그런 노력과 의도와 성과들이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바라고 초창기 멤버들이 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승현: 그렇습니다. 초창기 동지들이 여전히 함께하고 있음은 저희들의 축복입니다. 앞에서 거론한 분들은 비록 모임을 떠났지만 그 뒤에 곧장 합류한 분들이 많습니다. 이응우, 강희준, 고현희, 정장직, 이종협, 전원길, 김해심, 허강 등이 그 주요 멤버들입니다.

나태주: 그렇습니다. 이런 분들이 앞으로도 계속 자리를 지켜주어야 할 것입니다. 제 짧은 결론은 이렇습니다. ‘야투는 아직도 젊다. 고승현도 아직은 젊다.’

고승현: 고맙습니다. 그 정신과 도움 말씀에 맞도록 앞으로 열심히 야투를 지켜내겠습니다.

원장실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점심식사 시간이 되었다. 이학식당으로 식사를 하러 갔다. 김민영 양이 기왕이면 고 회장의 형수님이 운영하는 고가네 칼국수집에서 점심식사를 함께 하려고 전화를 했으나 전화가 잘 연결 안 되어 식사 장소를 그렇게 잡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고 회장과 나는 식탁에 마주 앉아 식사를 하면서도 내내 야투에 대한 이야기만 나누었다. 평소 그렇게 우리는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였다.

▲고 회장이 제민천에서 "어렸을 때부터 여기서 놀면서 자랐다"고 얘기하고 있다.
고 회장 이야기에 의하면 독일에서 발행하는 국제적인 미술잡지인 <KUNSTFORUM>(2009,1+3)은 광주, 부산, 금강 3개의 우리나라 비엔날레를 한 달간 직접 취재하고 분석 것을 특집으로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호의적인 평가를 했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증거가 그 잡지에서 다룬 지면인데 세 군데 비엔날레 가운데 금강 자연 미술 비엔날레한테 총 30페이지 가운데 16페이지를 할애해 주었다는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김민영 양과 나는 카메라를 들고 고 회장을 따라나섰다. 고 회장 댁과 고가네 칼국수집을 찾아 사진기에 담으려는 참이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오간 일이 있는 공간들이다. 고 회장네 집 뜨락에서는 오래전에 문학행사를 한 적도 있다. 고 회장 댁은 겉에서 언뜻 보기에도 특별하게 되어 있다. 대문간부터 특별하다. 일단은 알루미늄 샷시(내리닫이창)로 되어 있고 그 뒤에 유리문이 받쳐주고 있다. 그리고 대문간 머리 위에 ‘Gallery Ko(갤러리 고)’란 문패가 붙어 있다. 유리문에도 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한 때는 같은 자리에 ‘마당 깊은 집’이란 문자가 쓰여져 있기도 했다. 정말로 고 회장 댁 마당은 깊은 마당이다. 대문간에서 내려서 네 개의 계단을 내려야만 마당의 바닥에 닿도록 되어 있다.

고 회장 댁 마당에는 아주 많은 나무들이 심겨져 있다. 대부분 꽃이 피는 나무거나 상록수 종류이다. 일 년 내내 고 회장 댁 뜨락에서는 꽃이 피고 진다. 나는 그것이 보기 좋아 가끔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내려 안쪽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심지어 대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고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도 한다. 대개는 마당에 아무도 없기 십상이다. 어떤 때는 고 회장의 어머님이나 아버님과 마주칠 때도 있다. 그러면 나는 또 너스레를 떨며 대문 안으로 무단출입한 까닭을 밝히고 한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한다.

고 회장네 정원에는 여러 가지 나무나 꽃이 심겨져 있을 뿐더러 몇 종류의 자연미술 작품도 세워져 있고, 마당 한 가운데에는 연못도 자리해 있다. 아주 오래된 느낌이 드는 연못이다. 거기에는 실지로 물고기가 살고 있다. 가끔 고 회장 아버님이 나와 물고기 밥을 주시는 것을 보기도 한다. 김민영 양과 나는 회장을 모델삼아 이 곳 저 곳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고 회장은 자기네 집에 와서도 여전히 열성적으로 설명을 해준다. 뜨락에서 안쪽으로 쑥 들어가 자리 잡은 공간은 가족들이 기거하는 생활공간이다. 여전히 공장 건물을 개조해서 만든 구조물이다. 그 앞에는 원두막 비슷한 건물도 한 채 버티고 있어 집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
“저희 집에서 화초 담당은 어머님이십니다. 무슨 꽃이든 잘 기르세요. 다 죽어가는 꽃을 가져다 드려도 용케 살려내시지요.”
고 회장의 말이다.
“여기는 갤러리로 사용하는 공간입니다. 여기서도 사진 한 장 찍어주세요.”
고 회장은 자청해서 마당의 오른쪽에 위치한 한 건물의 문간에 기대어 선다. 역시 낡은 공장 건물을 개조해서 만든 공간인데 담쟁이 넝쿨이 뒤덮고 있어 시원스럽게 보인다. 아마도 고 회장이 자기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인가 보다.

고 회장 댁을 나와 우리는 잠시 고가네 칼국수집을 기웃거린다. 그러나 건물 안까지 들어갈 이유는 없다. 김민영 양이 전화할 때는 연결이 안 되었으나 여전히 음식점은 문을 열고 있었다. 나는 고 회장더러 칼국수집 입구의 나무의자에 앉기를 청한다. 기다란 나무의자가 폭포수처럼 높다라이 자란 으름넝쿨 아래 깊숙이 놓여 있어서 참 편안해 보인다. 이것 또한 고 회장의 손으로 만든 특별한 생활미술품이다. 으름넝쿨 아래 고 회장을 앉혀놓고 역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고가네 칼국수집을 나오면 곧장 행길이고 그 옆이 바로 또 제민천이다. 성큼성큼 걸어 나오던 고 회장이 제민천 가에 있는 시멘트 둑에 가 털썩 앉는다.
“기왕이면 여기서도 한 장 찍어주세요. 제민천이 내려다보이게 위에서 앵글을 잡아 주세요. 제민천은 말이지요, 저에게 잊을 수 없는 개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여기서 놀면서 자랐지요.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멱 감기도 했지요.”
아닌 게 아니라 제민천을 바라보는 고 회장의 눈길이 여간 다감한 것이 아니다. 목소리까지 조금은 애잔하게 들린다. 크게 휘저으며 이것저것 설명하는 고 회장의 팔이 매우 힘이 있으면서 정감있게 보인다. 사람은 이렇게 자기의 유년과 관계된 일에 대해서는 흥분하도록 되어 있다.

이제는 헤어질 시간.
“우리 다음에 만나지요. 비엔날레가 열릴 때 그 때 만나지요.”
“그러세요. 미술공원에서 뵙겠습니다.”
“고 회장님, 지금 어디로 가시나요?”
“예, 다시 연미산 작업장으로 갑니다.”
단호한 어투로 말하면서 고 회장은 제민천 가에 세워둔 승용차에 오르고, 우리는 잠시 떠나는 자동차를 바라보며 제민천 가에 남기로 한다.

▲고승현 회장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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