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주출신 1호시인 임강빈(任剛彬) 선생

 
1. 선생과의 인연
내가 공주문화원장의 일을 맡게 된 것은 지난해 7월부터다. 소식을 듣고 가장 기뻐해준 분 가운데 한 분이 아마도 대전의 임강빈 선생이실 것이다. 그래 그러셨을까. 그 사이 여러 차례 문화원으로 나를 찾아 오셨었다. 별다른 볼일이 있어서 오시는 건 아니었다. 공주에 문득 오고 싶어서 오시고, 누군가 한 사람 만날 사람이 있어서 오신 길에 들리기도 하신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옥룡동에 오래된 친구 한 분이 계시어 그 분을 만나러 오신다는 말씀을 듣기도 한 것 같다.

임강빈 선생은 문화원에 오셔서도 별달리 말씀이 없다. 그저 한동안 자리에 멍하니 앉았다 가시는 게 고작이다. 특별한 공통된 화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선생과 나는 연배가 많이 차이가 날뿐더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기에는 세상이란 것이 또 너무나 멀리 떠나가 버리고 변해버린 형편이다. 하기는 선생은 처음부터 별로 말씀이 없는 분이셨다. 40대 초반에 일찍 내가 병을 얻어 대학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에도 문병 차 찾아오시어서는 아무 말씀도 없이 한동안 앉아만 있다가 가신 어른이다.

그러고 보니, 선생을 처음 만난 게 참 오래 전의 일인가 보다. 그것은 나의 문단 데뷔 연륜과 궤를 같이 한다. 벌써 40년 전인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데뷔했을 때 선자의 한 분이신 박목월 선생은 대전의 박용래 선생에게 나를 부탁하신 일이 있다. 워낙 궁벽진 시골에 살고 있고 세상 물정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같으니 안심이 안 되어 그리하신 것 같았다. 신춘문예 시상식이 끝난 후 서둘러 대전의 박용래 선생을 만나러 갔다. 자연스럽게 나는 대전문단에 소개되었고 박 선생 주변에 있는 분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시절만 해도 참 좋은 시절이었다. 문학의 르네상스 시절이라 그럴까. 사람들에겐 문학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있었고 문학에 대한 깨끗한 동경이 있었다. 문학인 상호간에도 부러움과 존경이 존재했고 작품에 대한 정직한 평가도 있었다. 뿐더러 문인들 세계의 위계질서도 분명했다. 요즘같이 나이나 사회적 지위 가지고 행세하는 게 아니라 철저히 문단 데뷔 순서에 따라 차례가 정해지곤 했었다.

특히, 대전은 시가 강세였다. 문학을 지향했다 하면 거개(擧皆)가 시였다. 소설은 그야말로 가뭄에 콩 나듯 했고 수필은 별로 알아주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야말로 시의 고장 같았다. 그래서 문학청년들의 문학동아리조차 시를 겨냥한 문학동아리가 대종이었다. 아마도 이건 이 고장 시문학의 태두인 정훈 선생의 영향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어쨌든 대전은 문학의 도시였고 그 가운데에서도 시의 고장이었다.

2. 세 분의 시인
그 푸르고 향기롭던 대전의 한 중심에 박용래 선생과 이웃하여 커다란 나무로 서있던 두 분 시인이 바로 임강빈 선생과 한성기 선생이다. 이들 세 분 선생은 한 시절 대전에서 삼가시인으로 정립(鼎立)했던 분들이다. 문학인으로서 선의의 경쟁과 선망이 있었고 변모와 발전을 함께 한 분들이다. 세 분 선생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기도 하고 다른 점이 있기도 하다. 우연히도 세 분은 한국에서 가장 전통 있는 문학잡지인 <현대문학>의 추천으로 시인이 되었고 또 추천해준 선자도 박두진 선생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세 분에게는 나름대로 다른 점이 없지 않았다. 나이가 달랐고 등단연대에 차이가 있다. 또 출신지가 달랐다. 연세로 치면 한성기, 박용래, 임강빈의 순이고 등단 순으로 쳐도 한성기, 박용래, 임강빈의 순이다. 그리고 한성기 선생은 함경도 정평이고 박용래 선생은 논산이며 임강빈 선생은 공주이다. 말하자면 한 분은 북한 출신이고 두 분이 충청도 출신인 셈이다. 그런데 또 직장만은 세분이 다 같이 교직이었다. 허지만 한성기·박용래 선생은 일찍이 교직에서 중도하차하고 임강빈 선생만 외롭게 정년의 연치까지 교직에 머물다 물러나신다.

세 분의 작품을 살펴볼 때도 일단은 세분의 작품이 내용면에서 친자연적이고 생활적이고 그 형식이며 언어가 평이하고 온건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이룬다. 그러나 이 방면에 있어서도 세 분은 약간의 격차를 보인다. 박용래 선생의 작품이 보다 언어의 조탁에 치중하면서 모던한 형식미에 기울었다면 한성기 선생은 보다 헐렁한 형식 가운데 내면적 향기가 저절로 우러나오기를 바라는 시였다. 이에 비하여 임강빈 선생은 그 중간쯤이라 그럴까. 겉으로 고요하고 온건한 것 같지만 안으로는 냉엄한 그 무엇을 선생의 시는 간직하고 있었다.

실상 선생의 시는 언뜻 눈에 잘 띄지 않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그저 평범한 세계를 다룬 쉬운 시처럼 보인다. 그것이 정말로 그럴까? 그야말로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 아름다움과 어여쁨을 놓치기 쉬운 것이 선생의 작품 세계다. 더구나 이 소음의 시대, 뻔질뻔질한 광물질의 시대엔 더욱 그러하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세 분 시인들 가운데서도 일찍이 성숙된 시세계를 확립한 분이 바로 선생이다. 세 분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대학에서 정식으로 문학 수업과정을 거친 분이 임강빈 선생이다. 대학생 시절 수준 높은 문인들을 만나고 또 그들과 어울려 작품 수련과정을 거친 분이 또 임강빈 선생이다. 임강빈 선생은 전국에서도 명문대학으로 꼽혔던 공주사범대학의 초창기 학생이었으며 그 학교 안에서 활동하던 문학동아리인 <시회(詩會)>의 중추 멤버였던 것이다.

인간적인 면이나 문단 활동의 면으로 보아도 임강빈 선생은 두 분 선생과 색깔을 달리하고 있었다. 한성기 선생은 고향이 북한이라 그런지 선이 굵고 강직한 면이 있는가 하면 박용래 선생은 지나칠 정도로 섬세하고 정이 많았다. 그런데 묘하게도 두 분 모두 시인적인 특성으로 그러했던지 에고(ego)가 강하고 변덕 같은 것이 있었고 까다로움 같은 것이 있어서 후배의 입장으로는 대하기가 어려울 때가 없지 않았다. 이에 비하여 임강빈 선생은 달랐다. 어디까지나 과묵했고 후배들에게 말씀 한 마디라도 조심해서 하는 분이었다. (그렇다고 앞의 두 분이 후배들을 함부로 대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래서 소극적이라든가 미온적이라는 느낌 또한 없지 않았다.

신사적인 인품을 지닌 분이었다. 유가적인 삶의 신조에 철저한 분이었다. 늘 주변에 고적한 분위기를 데리고 다니는 분이었다. 아니, 그분 자체가 고적함이었다. 세 분 가운데서도 중앙문단과 가장 활발하게 교유한 분은 한성기 선생이다. 그래서 당신의 출신지인 <현대문학>과 <현대시학>의 신인 추천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박용래 선생 또한 선별적이긴 하지만 중앙문단과 연결고리가 있었다. 그래서 <현대시학>의 추천 심사위원이 될 수 있었다. 허지만 임강빈 선생에게만은 그런 인연이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문단의 논공행상이라 할 문학상 수상의 기회에서도 두 분에 비해 역시 한발 밀리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이것은 오로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선생의 성품과 처세관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오랫동안 선생과 만나오면서 선생이야 말로 이런 분이 아닐까 나름대로 생각해본 바가 있다. 첫째로 모든 일에 있어서 서둘지 않다는 것이고, 둘째는 인간을 대함에 있어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셋째는 그 어떤 경우에도 지나침이 없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의 방식이며 인생철학인가! 문단의 햇병아리 시절 나는 세 분 선생들을 고르게 만나 교유하며 문단활동을 하는 행운을 지녔었다. 그 세 분 가운데서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는 언사나 태도로 대해주신 분이 임강빈 선생이시다. 시종여일이라 그럴까. 조금은 답답하다 그럴 정도로 그것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러하시다.

 
3. 시인은 어떤 사람일까
요즘 세상엔 너무나 시인이 많은 게 사실이다. 문단인구가 얼마고 그 가운데 시인이 얼마라든가 하는 통계적인 사실은 그만 두고라도 시인이 너무 많고 흔한 것이 사실이다. 도무지 희소가치가 없고 문학작품으로서의 위의성(威儀性)이 없다. 너무들 쉽게 시인이 되고 또 너무도 함부로 시를 쓰고 있다. 한 때는 국민 모두가 시인이면 어떠랴, 그런 이야기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다. 너도 나도 시인이고 이 곳 저 곳에 문학매체이고 보니 정신이 다 어지러울 정도이다. 위계질서라고는 찾아볼 길이 없다. 시인들끼리 누가 먼저 된 자이고 나중 된 자인지조차 가리지 못한다. 무질서 그 자체이다. 문단행사 같은 데를 참석해보아도 저희들끼리 잘나서 시인이고 대가인 척한다.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이런 때 흔히 해보는 말이 바로 그레샴 법칙,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 말이라면 너희들만 왜 선민이냐 따지고 들지도 모르는 일이겠다.

이런 판국에 얼핏 떠오르는 분이 바로 임강빈 선생이다. 시인의 형상이 흐려지고 시의 기본적인 위엄조차 사라진 무지막지한 이 시대에 그래도 고토를 지키는 분이 임강빈 선생이고 시의 고향마을을 지키면서 시의 범전을 고수하고 있는 분이 임강빈 선생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다. 중국의 고사로 지주중류(砥柱中流)란 말이 있기도 하지만 변하지 않고 지키는 사람에겐 그 나름대로의 고달픔과 외로움이 따르게 마련이다. 더구나 함께 해오던 또래 시인들마저 일찍 세상을 떠나고 혼자서 남은 처지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선생과 만나 온 지도 어언 40년. 세상은 저만큼 몇 바퀴 돌아가고 사람들도 몰라보게 변했지만 오직 변하지 않은 분은 임강빈 선생 한 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주량이 얼마냐고 물으면/ 좀 한다고 겸손을 떨었다// 세상 한 구석에서/ 대개는 외로워서 마셨다// 몇 안 되는 친구가 떠났다/ 그 자리가 허전했다// 거나하게/ 정색을 하며 마신다// 독작 맛이 제일이라 한다/ 외롭지 않기 위해 혼자 마신다
― 임강빈 「독작」 전문

그렇다. 인간은 누구나 외로운 존재이다. 외롭기 때문에 친구가 필요하고 이웃이 있어야 하고 일감이 있어야 한다. 만나서 이야기하고 어울려 술도 마신다. 그런데 그 친구가 떠나간 자리는 허전하고 썰렁하다. 고독은 남은 자의 몫이다.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형벌이기도 하다. 그래서 남은 자는 혼자서 술을 마신다. <거나하게/ 정색을 하며 마신다>. 어, 여기 <거나하게> <마신다>는 알 것 같은데 그 중간에 끼어 있는 <정색을 하며> 마신다는 구절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물론 글자로서는 이해가 간다. 그렇지만 그 정서적인 내면의 이해가 문제이다. 그 어떤 경지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쉽게 접근이 안 되는 대목이겠다. 이것이 바로 임강빈 시의 진면목이요 그 깊이라면 어떨까. 쉬운 것 같은데 정작 만만치 않고 평범한 것 같은데 결코 또한 그렇지 않은 요소가 이 분의 시에는 있다. 그것은 일찍이
초기의 시부터 그러했다.

하얀 창 앞에/ 마구 피어오르는 것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었다// 바다 앞에/ 날리운 모닥불 같은 것으로// 스스로 전율로 이어온/ 사랑// 여기/ 아무도 반거(蟠居)할 수 없는// 하나의 지역에서/ 가을의 음향을 거두는 것이다.
― 임강빈 「코스모스」 전문

이 작품은 시인의 데뷔할 당시의 작품 가운데 한 편이다. 얼핏 하나도 어려울 것 없이 다가오고 이해될 듯싶은 작품이다. 그렇지만 이 작품 역시 차분히 들여다보면 결코 쉬운 작품이 아니란 것을 이내 알 수 있다. 더러는 비유체계로 되어 있다. 그러나 <스스로 전율로 이어온/ 사랑>이라든지 <여기/ 아무도 반거(蟠居)할 수 없는>이라든지 하는 대목에 와서는 고개가 갸웃해지기도 하고 발걸음이 주춤거리기도 하는 바이다. 이런 것만 보아도 임강빈 시인이 얼마나 등단 초기부터 시의 본질에 핍진(逼眞)해 있었는가 하는 바를 짐작할 만하다 하겠다.

 
4. 오늘도 시인은 외롭다

선생은 그동안 여러 권의 시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첫 시집 『당신의 손』에서 출발하여 가장 최근에 나온 시집 『집 한 채』까지 열한 권의 창작시집과 한 권의 시선집에 이르기까지 도합 열두 권의 책이다. (제 1시집 『당신의 손』, 제 2시집 『동목』, 제 3시집 『매듭을 풀며』, 제 4시집 『등나무 아래에서』, 제 5시집 『조금은 쓸쓸하고 싶다』, 제 6시집 『버리는 날들의 반복』, 제 7시집 『버들강아지』, 제 8시집 『비 오는 날의 향기』, 제 9시집 『시가 쉽게 쓰여진 날은 불안하다』, 제 10시집 『한 다리로 서 있는 새』, 제 11시집 『집 한 채』, 그리고 시선집 『초록에 기대어』)

올해로 문단경력 56년이시다. 적당하다면 적당한 수확이겠고 조금은 조심스럽고 소소한 결과물이라면 또 그러하겠다. 허지만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쉼 없이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는 데에는 틀림없는 일이고 그에 따라 한 결 같이 시에 대한 동경과 열정이 유지되어왔다면 또 그럴 것이다. 여기서 또 확인되는 바는 작품 활동에서도 선생 특유의 서둘지 않음과 함부로 하지 않음과 지나치지 않음이 잘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역시 작품 활동 면에서도 선생은 『논어』에서 공자님이 말씀한 대로 <과유불급過猶不及>의 교훈을 십분 실천하는 분이라 하겠다.

1931년생이시니 선생의 연세 이제 팔순이시다. 인간의 생애가 이러하고 그분의 작품 세계가 이만큼 드높고 향기롭다면 주위에서 알아서 시 전집이라도 내드리고 문화훈장이라도 주선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세상의 일이란 그렇게 도리나 당위에 맞도록 되지 않는다. 평생을 올곧게 시에 헌신하고 봉사했음에도 선생은 아직도 당신의 작품집을 내는 일에 고민을 해야만 한다. 시원시원히 선생의 형편과 사정을 헤아려 책을 내드리는 출판사가 주변에 없는 것이다. 더욱이나 서울 쪽엔 그런 것이다. 이것 또한 선생의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전혀 문단정치라든지 문단적 사교가 없는 어른이고 보니 찾아서 알아주고 헤아려줄 인사가 드문 현실이다.

그래서 그러셨던가. 하루는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시집 내는 문제로 한번 만나러 오시마 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에 선생이 찾아오셨다. 한손에 원고봉투가 들려 있었다. 팔순의 생신이 2010년 1월인데 그 때에 맞춰 신작 시집을 내고 싶은데 서울 쪽에 적당한 출판사가 없겠느냐는 말씀이었다. 이런저런 출판사 이름을 대보면서 말씀을 나누었다. 말씀 중에 선생은 평생 동안 시에 매달리고 헌신해온 것을 조금은 후회스럽게 생각하면서 이렇게 늦은 세월에까지 시집 내는 문제로 고민해야하는 입장을 곤혹스럽게 여기는 속내를 보이셨다. 좀은 뜻밖이다 싶었고 당황스러웠다. 또 아릿하게 마음이 아파오기도 했다. 젊은 시절 이래 선생이야말로 시인으로서 나의 표상과 같은 어른이시다. 그런 어른이 저만한 연치에 저러시니 나도 만약 선생만큼 세상을 버티게 된다면 분명 저러지 않겠나 싶은 심정에서 더욱 그러했다.

따뜻한 어느 봄날/ 구용(丘庸) 선생과/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시를 쓰기란 쉽지 않죠/ 필생의 업으로/ 중도에서 포기하기엔 너무 아깝고// 그 무렵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은/ 시 밖에 없을 것 같아서/ 엉겁결에 약속을 했다// 사람은 쉽게 약속을 하고/ 스스로 그것을 허문다//
철석같은 약속은 아니었지만/ 구용 선생과의 약속은 지켜진 셈이다/ 이렇게 쉽게 되는 일도 있구나
― 임강빈 「약속」 전문

이것은 새로운 시집에 들어있는 시 가운데 한 편이다. 선생의 젊은 시절, 선배시인이었던 김구용 선생과 나눈 대화내용을 소재로 하고 있다. 김구용 선생이 누구신가? 한국시단에서 가장 어려운 시를 쓰신 시인이다. 유불선 삼교를 통합한 입장에서 문학을 보고 시를 창작하신 분이다. 뿐더러 시에서 금기시하는 관념어를 시어로 삼아 시 쓰기를 시도한 분이다. 한 시절 이 분은 공주 계룡산 동학사(東鶴寺)에서 공부한 일이 있고 공주사범대학에 드나들며 <시회>의 고정멤버로 활동하기도 했던 분이다. 그래서 임강빈 선생과 젊은 시절부터 일정한 간격으로 우정을 유지하고 있던 분이다. 이후 성균관대학의 교수로 계시다가 타계하셨는데 임강빈 선생의 첫 시집 『당신의 손』 말미에 이렇게 발문을 남기고 있다.

일생에 있어 20년이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산이야 변할 리 없지만 사람은 연령에 따라 보는 점이 다르다. 변하지 않는 하늘의 참모습을 파악하기 위하여 우리는 부단히 변화하고 있다. 씨의 그칠 줄 모르는 노력이 쌓여 산이 되고 하늘이 되어 우리의 참다운 고향을 제시해주리라 믿는다.
― 김구용, 임강빈 시집 『당신의 손』 발문 중에서

인간과 시에 대한 찬사치고는 조용하면서 대단한 말씀이 아닐 수 없는 문장이다. 그런가 하면 이 시대 맑은 정신의 시인으로 통하는 시인 가운데 한 분인 최하림 시인은 자신의 시작품 한 가운데 선생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선생의 문학과 인간을 높이 받들어 기리고 있다.

달이 빈방으로 넘어와/ 누추한 생애를 속속들이 비춥니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속옷처럼
개켜서 횃대에 겁니다 가는 실밥도/ 역력히 보입니다 대쪽 같은 임강빈 선생님이/ 죄 많다고 말씀하시고, 누가 엿들었을라,/ 막 뒤로 숨는 모습도 보입니다 죄 많다고
(후략)
― 최하림, 「달이 빈방으로」일부

최하림 시인은 임강빈 선생님을 <대쪽 같>다고 표현하고 있다. 대쪽 같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성품이나 사시는 모습이 고결하고 일관되다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존경스럽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이것은 또 인간으로서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시작품에 대해서도 그렇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만하면 최고의 찬사에 해당된다. 동시대 시인들로부터 이만한 존경을 받는 시인이 임강빈 선생 말고 또 누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임강빈 선생이 당신이 평생을 두고 매진해온 시업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고 곤혹스러워하는 것을 보는 것은 아무래도 편안한 마음일 수가 없는 일이다.

다행히 이번에 서울의 동학사(東學社) 주인인 유재영 시인이 선생의 원고를 받아들여 정갈하고 품위 있는 시집으로 내준다 해 원고를 넘기고 후유, 하는 심정이 되었다. 언젠가 나는 선생으로부터 <도리불언 자하성혜(桃李不言 自下成蹊)>란 중국 문장을 들은 바 있다. ‘복숭아와 오얏은 그 꽃과 열매가 아름다우므로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 그 나무 아래 저절로 길이 생기게 되어 있다’란 내용이다. 이는 또 인격이나 인간적 덕망이 높은 사람은 굳이 공교한 언변이나 능란한 주변을 구사하지 않아도 그 인격으로 하여 저절로 사람들이 모여듬을 빗대어 표현한 말일 것이다. 이 말을 들을 때 나는 이 말이야말로 바로 선생의 인간과 삶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말이구나 싶었다.

그러하다. 임강빈 선생이야말로 이 시대 몇 분 안 되는 한국 시단의 원로 가운데 한분이시고 우리가 마땅히 본받아야할 인품과 시인으로서의 모범을 실천해 오신 분이다. 시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새삼스러운 질문 앞에 섰을 때 문득 푸른 산악처럼 다가오는 분이기도 하시다. 만약 선생 자신이 당신의 생애를 시에 바치고 헌신한 것을 후회하시고 참괴로 여기신다면 그것은 우리 시 쓰는 사람 다 같이의 후회요 참괴가 되고 말 일이다. 부디 당신의 생애가 참으로 아름답고 깨끗하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오늘에까지 이르렀으며 앞으로도 오래도록 그렇게 오래오래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찬 생각을 잊지 말아주시기 바란다.

선생님, 선생님이 힘을 잃으시면 저희들 모두가 다 힘을 잃게 됩니다. 부디 홀로 걸어오신 길, 다리가 아프고 고달프시더라도 뚜벅뚜벅 지금껏 그리 해 오셨던 것처럼 멀리 멀리까지 가 주십시오. 뒤따르는 저희들 몇 사람이 있음을 부디 잊지 마십시오. 이렇게 말하면 또 선민의식을 가졌다 핀잔을 들을 이야긴지 모르지만 세상에 시인이란 이름으로 행세하는 사람은 많아도 정작 좋은 시인이란 많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또 선생님이 아시는 바대로 시라는 것이 결코 손쉬운 파트너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팔순에도 건장하신 선생님의 시정신과 아름다운 시집의 출간을 즐거운 마음으로 하례 드리는 바입니다. 언제 맑은 날, 공주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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