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변 연기 금남면 봉기리 1번지ㆍ동면 합강리 잿절

역사- 골뱅이 나루가 언제 생겨 났는지는 알수없다.
그러나 금남의 봉기리와 동면합강리 잿절에 사람이 살기시작하면서 왕래를 해왔으니 꽤나 오랜 옛날로 짐작할 뿐이다. 사공을 했던 채창록옹의 기억으로는 아버지 채규상씨가 배를 인수하기 전에 청주사람이 이곳에서 사공을 하였으며 그에게서 인수한 시기는 채창록옹이 태어나기 전 이었으며 아버지가 운영하던 사공일을 자신이 이었고 아들이 도왔으며 아버지와 자신이 사공을한 기간은 100여년이었다.

아버지 채규상씨는 1966년 87세로 돌아가셨으며 채창록옹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사공을 어렸을때 부터 돕다가 초등학교 졸업후에 본격적으로 사공이 되어 운영하였다. 그가 1951년에 군대에 갔을 때에는 일꾼을 두고 배를 운영 하였으며 일꾼중에는 어린이 들도 있었다. 제대후에는 농사를 지으며 운영하다가 이북에서 피난내려온 김창협씨에게 넘겨 주었다. 김창협은 김상이라 불렀으며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이곳에 들어온 그에게 배를 시세보다 아주 싼값에 주고 텃밭도 하나 주었다.

김창협씨 에게는 부인과 아들넷,딸 둘을 두었었는데 아들중에 두명이 어려서 죽고 오래전에 부인과도 사별을 했다. 처갓집이 반곡리 였기에 사공일을 그만두고는 반곡리에서 살다가 행정중심복합도시가 건설되면서 보상을 받기위해 배와 함께 밭았던 텃밭등을 등기를 내기위해서 서울까지 오가야 할 일이 있었었는데 그때 채창록씨가 직접 다니면서 도와 주었다. 지금은 보상을 받아 대전으로 이사하여 아들과 살고 있다고 한다.

▲ 옛날 사공 모습.
김창협씨가 사공일을 한 기간은 10여년이다. 그만 둔 때는 1980년대 였는데 금강 상류에 대청댐이 건설되면서 금강의 수위가 낮아지면서 나룻배를 띄우기가 용이하지 않았고 금강다리가 놓여지게 되면서 버스가 다니고 배보다 상대적으로 빠르고 안전한 버스를 마을사람이 이용하게 되면서 자연적으로 배의 이용이 줄었기 때문이다. 채창록옹은 1963년 까지 금남면 봉기리 나루터에서 살다가 합강의 보석골로 이사왔다. 보석골은 선조의 사당이 있고 전답이 많다.보석골에 1000여평, 명학리에 3000여평이 있고 하천부지 600평은 행정중심 복합도시가 건설되면서 보상받았다.현재에는 부인과 큰아들과 함께 합강리 362번지(보석골)에서 살고 있다.

규모-골뱅이 나루의 규모는 작은 나룻배 한 대와 큰 나룻배 한 대가 있었다.
작은배는 사람을 15명정도 태울수 있으며 주로 작은배가 많이 운영되었다. 큰배는 사람을 50여명을 태우고 소 2마리를 태울수 있었다. 큰 배는 장날이나 사람이 많을때 특히 6.25때 인민군이 금강을 건널때와 혼례가 있을때나 상여가 건널때는 큰배를 이용하였다.  배삯은 1년중 봄에 보리한말, 가을에 나락한말을 받았다. 건너는 사람들이 동네사람 이다보니 1년 단위로 배삯을 받았는데 어떤이는 별로 탈일이 없었다며 3되, 또는 5되를 내는 이들도 있고 외지에서 온 이들은 동네사람, 누구네 친척 이라하며 그냥건너기도 했다.

동네에 연고가 없이 정말 외지인 일 경우에는 10원이나 20원을 받고 건네 주었고 그마저 없다면 그냥 건네주기도 했다. 배삯을 가장 많이 받았던 경우는 혼례를 위하여 건너는 사람들이, 혼례를 치루는 당사자들이 잘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넉넉한 마음으로 두둑하게 주는경우가 있었고 상여를 건네 주었을때 역시 죽은이의 명복을 비는 마음으로 두둑하게 챙겨주는 경우가 있었다.

일어난일- 1950년 6.25가 일어났다. 미군이 후퇴하여 금강방어 작전을 폈을때는 인민군을 건네주지 않았다. 그런데 1951년 인민군이 후퇴 할때는 큰배로 금강을 건네 주었다. 6.25가 일어나자 대전으로 피난갔다가 돌아와 보니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다른 큰 피해는 보지 않았지만 불편함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 어느날은 한사람이 강을 건너 달라하여 건네주고 오는데 갑자기 미군의 비행기가 폭격을 하였다. 채창록씨는 재빠르게 물속으로 피하여 위험은 모면 하였지만 그때의 폭격으로 배에 구멍이 나서 수리를 해야 했다.

북괴군이 후퇴하면서 배에 태우고 건너는데 갑자기 모두 물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당황하여 왜 그러냐고 물으니 건너편 둑을 가리키며 미군이 숨어 있다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밭둑에 깨를 털고 세워두었던 깻대를 보고 미군으로 오인한 것이었다. 채창록씨는 그해에 군대에 입대하였다. 1951년 강원도로 입대하여 양구 어언산 1200고지에서 북괴군과 싸웠으며 훈련은 총쏘는 방법만 배웠고 M5소총 분해 결합만 배웠다.

3년 복무기간이 끝났는데도 계속복무하여 6년만에 제대 하였으며 1956년 제대 할때에도 돈을 쓰고 간신히 제대를 하였다. 이는 보병으로 입대하였다가 헌병대로 옮기자 제대 날짜가 제대로 계산이 되지 않았던것 같다. 군복무시 인민군과 싸우다 파편으로 손가락과 허리에 부상을 입었다. 그 후유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당시 40여명의 중대원이 인민군과 대치하여 전투를 벌여 모두 죽고 혼자 살아오자 중대장이 붙들고 울면서 '너랑 나 둘이만 살고 모두 죽은것 같다. 살아 돌아와 줘서 고맙다' 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 잿절에서 있었던 혼인 모습.
풍습- 배를 운행하는 일은 항상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안전을 위해서 지성을 드리는 일은 당연한 일었던 것 같다. 뱃고사는 두가지 종류가 있었다. 매달 초사흩날 지내는 뱃 고사와 정월 대보름날 지내는 뱃 고사 이다. 초사흩날 뱃고사는 해가 져서 어둑할 때 팥떡을 시루째 올리고 초를 켜 놓은 다음 배주인이 술을 올리고 두 번 절을 한다. 이때에는 소지를 올리지 않고 절을 하면서 무사안녕을 빌었으며 과일이 나오는 달에는 과일을 올리기도 하였지만 대개는 떡만 놓고 지냈다.

정월대보름날에는 크게 지냈는데 대보름전야인 14일 저녁에 배 앞에 상을 펴고 떡,과일,술과 포등 푸짐하게 차려서 제사를 지내듯이 지내고 의식이 끝나면 주변사람들을 불러서 모두 같이 나누어 먹었는데 이때에도 와서는 안되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부정한 사람이라 하여 상중인 사람이나 닭이라도 잡은사람, 또 죽은 사체를 본 사람이면 이곳에 와서는 안되었다. 주로 모든 의식은 주인이 했지만 음식을 먹으러 온 사람중에도 배와 주인이 무사하게 돈 많이 벌으라고 덕담과 함께 술을 올리기도 하였다.

마을 현황1- 봉기리(鳳起里)
백제때에는 소비포현(所比浦縣)에 속했으며 고려때부터 공주(公州)에 속하여 조선말까지 공주지역이었다.
일제시대 에는 공주군 명탄면 전탄리 였다가 금남면으로 편입되면서 봉기리라 하였고 전탄리 라는 지명은 여울이 있어 물살이 화살같이 빠르다는 뜻에서 유래 되었다. 또한 봉기리는 이곳에 비봉귀소형(飛鳳歸巢形)의 명당(名堂)이 있다 하여 이곳을 봉기(鳳起)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 인천채씨 재실.
▲ 임영수 관장이 마을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봉기리 뒷산에는 산제당이 있다. 산신제는 매년 음력 10월1일 지낸다. 9월 15일이 넘어서 동네에 초상이 나면 동짓달로 연기한다. 제관은 생기복덕인을 뽑아서 5일동안 목욕하고 제당을 청소한다.제물을 삼색실과와 통돼지를 즌비하고 소를 올릴때는 앞다리쪽만 올린다. 봉기리에는 고인돌이 많다. 새나루 고개에 2기가 있고 고부랑 재를 지나 분홍고개에 1기가 있으며 이곳에는 선돌도 있다. 동네에는 안동김씨와 허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마을 북쪽에 안동김씨 재실이 있다.

마을 현황2- 합강리(合江里)
백제때 두잉지현(豆仍只縣)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연기현(燕岐縣)으로 고쳐서 연산(燕山)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청주에 속하였으며 조선시대에 연기현에 속하여 조선말기에는 연기군의 동일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연기군 동명 합강리가 되었으며 합강(合江)이란 미호천의 동진강과 금강이 만나는 곳이기에 합강이라 불렀다. 잿절은 합강리의 금강변 마을로 옛날 이곳에 큰절이 있었는데 그절이 불에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잿절 북쪽에 보석골이 있으며 이곳에 인천채씨의 재실인 금연사(錦燕祠)가 있다. 인천채씨(仁天蔡氏)의 시조는 선무(先茂)이며 그의 12세손인 호조참의 승(昇)이 황해도에서 동면 문주리로 이사 하였고 문주리에서 5대를 살다가 6대손 상(祥)이 합강의 용당으로 이주하여 근 400여년을 살아오고 있다. 현재 30여호 살고 있으며 선조중에서 사북사정(司僕司正) 관형(觀亨)과 그의처 경주최씨에 관한 효자효부의 행적이 있어 1968년 잿절어귀에 효자비를 건립하였으며 보석골에 재실, 금연사(錦燕祠)는 1993년에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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