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티 전적지. 동학농민군의 반제·반봉건운동 10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회에서 1994년에 제작한 조형물이 전시되고 있다.
우금티 전적지(국가사적 제387호·공주시 금학동)는 제2차 동학농민운동 당시의 최대 격전지로 동학농민군의 원혼이 서려있는 곳이다.

1894년 2월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 등이 탐관오리의 학정과 부패한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해 보국안민(保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의 기치를 내걸고 봉기했다.

농민군은 정부와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은 후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을 추진했다. 그리고 정부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일제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자 2차 봉기를 했다.

충청도 여러 지역과 공주에서는 남접 농민군의 2차 봉기 이전인 7월 초부터 농민군이 이미 봉기해 반일싸움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공주에서는 유생출신 공주창의소 의장 이유상 휘하에 5,200여명이 모여 전봉준의 주력부대에 합류했다.

농민군 연합부대는 서울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공주를 점령하기 위해 공주전투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천안 세성산 전투’에서 패퇴 후 제1차 우금티전투(이인·효포·웅치싸움)와 그 보름 뒤 동학농민전쟁사상 가장 치열하고 장렬했던 제2차 우금티 전투를 치르게 됐다. 당시 전투에 참가한 3만여 농민군 중 살아남은 사람은 500여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공주부근에는 이 우금티말고도 농민군이 군진을 설치했던 괘등산과 발양, 도장대 등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효포·시화산·곰티·남월·새재 등이 있다.

또 전투가 너무 치열해 마을이 온통 파괴되는 통에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못했다는 승주골· 은골·어은동 등이 있으며, 패배한 농민군이 넘었다는 아리고개와 곰나루가 마지막 격전지였으며 패배한 농민군의 시신이 골을 메우는 바람에 이름이 붙게 된 송장배미 등의 전적지가 있다.

우금티에는 전적비 주변에 동학농민군의 반제·반봉건운동 10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회에서 1994년에 제작한 조형물이 전시되고 있다.

윤여헌 향토문화연구회장은 “공주에 기념관이 세워지고 우금티사적지가 정비된다면 우금티는 더욱더 후세를 위한 역사·교육의 장으로서 제대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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