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헌 충남향토사연구회장이 공산성 금서루를 오르는 길에 세워진 사적비들을 살펴보고 있다. 
비선거리는 ‘비(碑)를 세운거리 혹은 비(碑)가 서있는 거리’의 준 말이다.

현 공주대교 옆에서 강 건너 느티나무 거목이 서 있는 맞은편 언덕(현재 금강 홍수통제소 앞)까지의 도선장(渡船場)을 ‘장깃대 나루’라 부르고, 현 금강 홍수통제소 앞에서 공주대 인사대 앞까지를 ‘비선거리’라 했다.

그런데 이 ‘비선거리’야 말로 전라도 지방으로 통하는 서민들의 대로였다.

강을 건너 공산성 공북루의 북문을 통과하는 것은 불편할 뿐 아니라 중영중군(中營中軍) 즉, 주둔군사령부가 산성에 있는 군량고와 사창(司倉)을 수호하는 임무를 띠고 남문 밖에 주둔해 있고, 공북루 서편에는 파유대(派遺隊)가 있어 통행인을 검문했을 것이다.

또한 때가 되면 북문, 남문을 폐문했을 것이기에 일반 서민들의 자유통행은 어려웠을 것은 뻔한 일이다.

이런 까닭으로 ‘비선거리’는 대중들이 서울 방면으로 가거나, 반대로 전라도 방면으로 행차하는 데는 필수적으로 이용하는 길이었다.

비석 가운데서도 사적비의 경우는 개인의 치적을 기리고 또 그것을 널리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들의 눈에 잘 뜨이는 곳, 왕래가 빈번한 대로변을 택하게 된다. ‘비선거리’는 바로 그런 곳이다. 그래서 많은 비석들이 길가에 세워져 있었다.

1987년 공주대교의 준공과 동쪽 강변도로의 확장으로 ‘비선거리’의 일부는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사적비의 일부는 현재 공산성 금서루를 오르는 길옆에 세워져 있다.

윤여헌 충남향토사연구회장은 “비선거리는 역사를 간직한 우리의 향토 사적”이라며 “근대화의 물결 속에 새 길이 뚫리고 아스팔트 포장이 되는 것을 나무랄 사람은 없지만, 원래의 모습은 아니더라도 지금 남아 있는 옛길 옆에 산재된 비석들을 세워 보존해야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공산성 금서루를 오르는 길에 세워진 사적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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