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설명을 듣기위해 기념관엘 들렀다.
오늘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263 월남 이상재선생 생가지에 다녀왔다.
마리아 여신도 및 몇몇 성도들과 함께 제자훈련 종강여행이었다.
아니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는데 예배후 저녁시간까지 답사를 한 것이다.

마침 신학을 중퇴한 해설사가 있어서 감동적인 시간이었다.
조선후기 사회 운동가인 이상재(1850∼1927) 선생은 종교가·정치가로
일찌기 기독교에 입교하여 신앙운동을 통해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노력했다.
고종 18년(1881)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고종 25년(1888) 전권대신 박정양을 수행하여 주미공사 서기로 부임했다.
미국에 다녀온 뒤, 신문명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광무 2년(1898)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민중 계몽에 앞장섰다.
1927년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단일 전선을 결성하여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표로 신간회를 조직할 때,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저서로 논문집 『청년이여』, 『청년위국가지기초』 등이 있다.

선생의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초가집으로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대문은 솟을대문을 두었다. 안채는 1800년경에, 사랑채는
1926년경에 지었다고 하나 원래 건물은 1955년에 없어지고
지금 있는 건물은 1972년,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복원한 것이다.
생가 옆에는 유물전시관이 있어 선생이 생전에 남긴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초대 YMCA 이사장으로 야구 시구장면.
▲이것이 유품 전부이다.
 
 
 
 
▲마을 모형.
▲이선생이 지은 기역자 교회 - 지금은 헐리고 없슴.
▲현재의 종지교회.
▲좌측 서 있는 분은 이승만 청년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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