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시 옥룡동 월성산(月城山)에서 서북쪽 수원골에 위치한 백제시대 수원사지 절터에 윤여헌 공주대 명예교수가 서 있다.
수원사지는 공주시 옥룡동 월성산(月城山)에서 서북쪽 수원골에 위치한 절터로 오랫동안 백제시대의 사지(寺址)로 인정되어 오던 곳이다.

면적은 7,219㎡이며, 탑지(塔址)는 사각형으로 지대석(地臺石)을 기준으로 한 변의 길이가 3m이다. 주춧돌의 일부와 기와조각, 납석제 소탑(蠟石製小塔), 석불두(石佛頭) 등의 유물이 발굴됐다.

수원사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사명(寺名)과 관련된 설화가 기록돼 있다. ‘삼국유사’ 권3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彌勒仙花未尸郞眞慈師)에 실려 있는 이 설화에 의하면,

‘월성산의 서쪽 산기슭을 세상에서 일러 절 골이라 한다. 옛날에 큰 절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백제 때 이곳에 큰 절이 만들어졌는데 수원사(水源寺)라 불렀다.

신라 25대 진지왕 때 흥륜사에 진자(眞慈)라는 스님이 있었다. 그에게는 커다란 소원이 하나 있었다. 부처님께서 화랑으로 화신하여 세상에 나타나시게 된다면 평생 그 곁에서 모시겠다는 그런 바램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스님이 나타나 “웅천(熊川·지금의 공주)의 수원사에 가면 미륵선화(彌勒仙花)를 볼 수 있으리라 하였다.” 진자는 현몽대로 수원사를 찾아 길을 떠났다. 진자는 떠난 지 열흘만에 수원사에 당도했는데 문밖에서 한 동자를 만났다. 그 동자가 말하기를 “나는 신라의 서울사는 사람인데, 대사가 멀리 오시는 것을 위로하기 위해 왔습니다.” 하고 말하고 문을 열고 나갔는데 그가 간곳을 알 수가 없었다.

진자가 수원사 사승에게 찾아 온 내력을 말하자 “여기에서 남쪽으로 가면 즈믄산(千山·현재의 舟尾山)이 있는데 예로부터 현인과 철인이 머물러 있다하니 그곳으로 가보시지요?”하고 말했다. 진자가 즈믄산(舟尾山)에 이르자 한 노인이 나타나 진자에게 “여기에 와서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하고 물었다. 노인은 원래 산신령으로서 잠깐 사람으로 몸을 바꾼 것이다.

“미륵선화를 보고자 여기까지 찾아 왔습니다.”하고 대답하자, 노인은 “아까 수원사 문 밖에서 이미 미륵선화를 만나 보고서 무엇을 또 구하느냐?”고 했다. 진자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급히 수원사로 돌아갔다. 진지왕이 이 소문을 듣고 진자를 불러 “성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니 왜 서울 성중에서 찾아보지 않았는고!”라고 다그쳐 물었다.

진자는 왕의 뜻을 받들어 서울 성내를 샅샅이 물색하다가 한 동자가 영묘사 길가에서 노는 것을 보고 그의 성명과 집을 물으니 “나의 이름은 미시(未尸)이나 일찍 부모를 잃어서 성을 모른다” 했다. 진자는 그 소년을 가마에 태워가지고 궁중에 들어가 왕께 뵈었다. 왕이 보고 경애하여 받들어 국선으로 삼았는데 낭도들간에 화목하게 지내는 것과 예의가 뛰어났으며 풍교 또한 빛났다. 그러다가 7년 뒤에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진자는 몹시 슬퍼했다.’

▲윤여헌 공주대 명예교수가 수원사지에 대한 안내표지판을 살펴보고 있다.
윤여헌 공주대명예교수는 “이런 내용으로 보아 수원사가 미륵불과 매우 깊은 인연을 맺고 있음을 엿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윤 명예교수는 “수원사지는 탑지의 위치, 탑재석, 와편의 퇴적층으로 미루어 보아 건물의 배치는 남향으로 추정된다”며 “하지만 지형은 북쪽이 확 트여 있어 건물이 정상적으로 배치되면 북향이 되어야 하는데 이 점은 고찰의 대상이 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1967년에 탑지 등 절터 일부에 대한 조사 후 보존 대책 및 추가 조사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현재 절터 일대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고 탑의 지대석과 석재 일부가 지표상에 노출돼 있다. 1982년에 탑지가 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된 바 있으나 사지 내에서의 경작 활동이 계속되고 있어 사역의 유실·파괴가 심해 공주시의 대책이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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