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를 처음 만난 것은 열여섯 나이 때, 공주사범학교에 들어가면서였다. 사범학교는 초등학교 교원을 길러 내는 학교로 고등학교 3년 과정을 밟도록 되어 있었다. 취직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던 시절이라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공부깨나 한다는 아이들이 몰렸다.

나는 공주에 와 비로소 서양 문물의 실체와 만났다. 피아노 소리를 처음으로 들어 본 곳이 공주이고, 여러 군데 서점에서 문학서적을 마구잡이로 구해서 본 곳이 공주이고, 근대화된 거리, 도시다운 거리를 처음으로 보게 된 곳도 공주이다. 그 거리를 누비고 다니는 새하얀 교복 깃의 여학생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얼마나 가슴 벅차고 설레었던가.

태어나고 자란 고장은 금강 하류에 자리 잡은 서천이고 공주는 금강 중류쯤에 위치한 소도시이다. 물고기로 친다면 제법 많이 거슬러 올라온 셈이다. 공주는 공기부터가 달랐다. 지대가 조금 높아서 그랬던가. 분지라서 그랬던가. 맑고 신선했다. 가을이면 땅바닥으로 쇠리쇠리한(‘눈부신’의 뜻) 햇빛이 쏟아져 내려 쌓이는 소리가 쟁강쟁강 들리는 듯싶었다.
도시를 둘러싼 멀고 가까운 산들이 모두 금방 세수하고 난 얼굴인 듯 선명하게 건너다보였다.

이담에 어른이 되면 반드시 공주에 와 살리라. 그것은 운명적인 만남이었고 무모한 소년의 한 결의였다. 기어코 시인이 되겠노라는 소망과 더불어 공주에 와 살겠다는 소망을 한 가지 더 추가해 갖게 된 것이다. 그런 뒤로 공주는 나에게 그리운 고장이 되었다. 멀리서도 그립고 가까이서도 그리운 공주. 머물러 살 때도 아득하게 그립게 느껴지고 떠나서 살 때는 더욱 그렇게 그리워지는 곳이 바로 공주란 고장이었다. 나에게 공주는 더 이상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설 수도 없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 갔다.

공주에 눌러 살게 된 것은 1979년, 당시 공주교육대학교 부속국민학교(현 공주교육대학교 부설초등학교) 교사로 직장을 옮기면서부터다. 만 나이 34세. 청년이라고 하기에는 적지 않은 나이였다. 그러나 도시로 나가 살 것인지 아니면 계속 시골에 묻혀 살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만 했다. 더 이상 세월을 보낸다면 영영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기도 했다.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 공주로 직장(학교)을 옮기자는 것이었다.

이삿짐이라야 별것이 없었다. 우선 초등학교 때부터 굳세게 사용해 온 앉은뱅이책상이 하나. 책을 넣은 종이 상자가 너덧 개. 그리고 아내의 짐과 살림살이가 몇 덩어리. 비키니장이 그중 제일 덩치 큰 짐이었다. 비키니장이란 속이 빈 등근 쇠막대기로 뼈대를 세우고 그 위에 비닐이나 천을 둘러서 만든 간이 옷장으로, 그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애용했다. 조립식이어서 풀었다 다시 조립해도 됐지만 이삿짐이 너무 초라해서 그냥 자동차에 싣고 가기로 했다. 자동차래야 소형 용달차 한 대면 족했다.

짐을 모두 싣고 나니 사람이 타고 갈 좌석이 문제였다. 조그만 차라서 앞자리에 운전석과 조수석 하나밖에 없어 아내와 아들아이가 타고 가기로 했다. 우리 집 가족은 겉으로는 세 사람이었지만 실제로는 네 사람이었다. 아내의 뱃속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딸아이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짐 실은 차를 먼저 보내고 버스로 뒤따라 갈까 하다가 짐 내릴 때를 생각해서 짐칸에 앉아 가기로 했다. 아직은 겨울의 끄뜨머리인 2월 하순. 아침 공기가 매서웠다. 하지만 그 까짓 추위쯤이 대수랴. 이제부터 공주에 가서 살게 되었다는 생각만으로도 나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찬바람 속에 휘파람이라도 날리고 싶었을까. 자, 가 보자. 공주로 가자. 이제부터 모든 걸 다시 시작해 보는 거다. 그런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주에 도착하여 짐짝을 내리고 보니 앞으로 살아갈 일이 아득했다. 시골에서 혼자 꿈꾸던 것과는 여러모로 상황이 달랐다. 가까이 지내던 사범학교 시절의 은사나 후배 문인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건너다볼 뿐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주려는 눈치가 아니었다. 우리가 글세로 들기로 한 집은 동네 통장의 일을 보는 사람네 집인데 주변 환경이 어수선할 뿐 아니라 우리가 들어가 살 방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후진 방이었다. 평소엔 헛청으로 비워 둔 방 같았다. 게다가 푸세식 화장실까지 가까이 있었다.

그래도 어쩌겠나. 싼값으로 사글세를 살아야 할 처지니 어런저런 악조건을 감내할 수밖에.

이사 와 몇 달이 지나 딸아이가 태어났다. 아내는 날마다 셋집의 작두샘(펌프를 설치한 샘)에서 물을 길어 올려 기저기를 빨아 널었다. 때로는 칭얼대는 아들아이를 등에 업고 그런 일들을 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집주인의 불평이 대단했다. 작두샘물을 너무 많이 퍼서 쓴다느니 빨랫줄을 많이 차지한다느니 하는 식이었다. 이사 올 때는 아이가 하나밖에 없다더니 왜 아이가 둘이냐고 들이대듯 말하기도 했다는 거다. 그것 참! 그러면 방을 얻고 이사 오는 사람이 아내의 뱃속에 자라고 있는 아기에 대해서까지 밝혀 주고 방을 얻는단 말인가.

어쩌다가 학교에서 일찍 돌아와 보면 세 살배기 아들아이가 마당에서 연탄재를 파헤치며 놀기도 했다. 더러는 연탄재 속에 들어 있는 닭똥을 뒤지며 놀기도 했다. 야, 이녀석아. 그건 닭 똥이란 말야. 아들아이의 손에서 닭똥을 떨어내고 우물로 데리고 가 손을 씻어 줄 때면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하고 치미는 그 무엇이 있었다. 집 없는 자의 슬픔이여, 고달픔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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