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헌-오희숙의 역사기행
문회당(文會堂) 기문은 도암(陶菴) 이재(李縡·1680~1746)가 지었고, 글씨는 그의 제자 홍계희가 1750년 충청 감사로 재임 중에 썼다.
기문을 통하여 운영의 실태를 살펴본다면,
가장 융성했던 시절은 숙종 (정묘·1687년)부터 약 60여 년간인데 그동안 세태의 변화에 따라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문회당의 교육과정은 강학(講學)과 제술(製述)을 병행하였는데 매월 5일마다 시험을 치르고 그 과정은 매우 엄격하였으니 낮이나 밤이나 책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시문(詩文) 제작에 있어서도 수천언(數千言)에 이르니 이로서 등급을 가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가장 출중한 사람으로 조성복(趙聖復), 최익수(崔翊秀)가 있었는데 이들로 인하여 문회당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런데 신임사화(辛壬士禍 1721~1723년)로 말미암아 조성복이 죽음을 당하자 사기는 떨어지고 문회당도 쇠퇴하여 재계(齋戒)하는 집으로 전락하였다.
장령(掌令) 최익수가 중흥을 꾀하였는데,문회당의 ‘문(文)’의 뜻은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을 말함인데 아무쪼록 이것을 익혀서 과거에만 연연하지 말고 인(仁)을 구하고 도학(道學)에도 힘 쓸 것을 권하고 싶다.
공주가 반향(班鄕)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렇듯 주변에 명망있는 사설 교육기관이 있고, 그 곳에서 수신(修身)과 치국의 도(治國之道)를 익히고, 나아가 과거에 급제하여 양명(揚名)하고, 이런 과정에서 시예(詩禮)의 유교가 이 마을에서 저 부락으로 번져 나갔기 때문에 유향(儒鄕)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윤여헌 공주대 명예교수는 “요즈음 학생들이 서울에만 몰리는 교육의 편향현상(偏向現象)을 바라보면서 이 지역에 사는 우리에게 문회당 기문은 자성(自省)의 경구로 되새겨 봄직하다”고 밝혔다.
오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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