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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 그 눈물겨운 인생
나태주 공주문화원장  |  tj45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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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11.14  20:4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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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무용가 최선 교수

   
▲최선 공주대 교수.
하나의 감동으로

실상 나는 무용의 문외한이다. 무용은 그저 연예의 한 가지일 따름, 예술무용까지는 이해가 없는 처지다. 그런데 최선 교수에게 덥석 붙잡히고 말았다. 이유는 감동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난 6월 18일(2009년) 저녁 시간, 공주문예회관 공연장에서 「단청(丹靑)」이란 무용을 보고 크게 느낀 바가 있었다. 연이어 공주문화원 <문화가족전> 테이프 커팅 시간에 최선 교수 단독으로 추는 「부채 산조」를 보았고, 다시 고마나루 여름축제에서 최선무용단의 「천무(天舞)」를 보았다. 나로서는 놀라움이었고 새로움이었다. 기껏 무용이라 하면 살풀이나 궁중무용, 승무 같은 고전무용을 떠올리고 대중들을 즐겁게 하는 기방 춤 정도로만 각인되어 있던 나의󰡐춤 관󰡑에 일대 변혁이 일어난 것이다.

무용은 나에게 무엇인가?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최선 교수에게 ‘무용은 나에게 무엇인가?’ 하고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예술가에게는 가장 결례가 되는 무모한 질문이다. 허지만 그것은 그만큼 중요한 질문이기도 하다. 최선 교수는 쉽게 대답을 마련하지 못한다. 하긴 시 쓰는 사람인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언필칭(言必稱) 나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시는 나에게 공기요 밥이라고. 나는 대답 듣기를 잠시 유보하고, 그러면 언제부터 왜 무용을 시작했는가, 무용가의 연원을 묻는다. 최 교수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무용가로서의 꿈을 키웠는데 논산 쌘뽈여자고등학교 교사였던 막내이모의 권유에 따라 무용을 시작했고 엄마의 지지가 무용가의 길을 가는데 밑 걸음이 되었노라 한다. 그저 춤추는 것이 좋았노라 한다. 공주사범대학에 진학, 유학자 교수를 만나 제자가 되었는데 그 인연이 한국무용의 맥을 잇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유학자 교수는 김백봉 교수의 제자이고 김백봉 교수는 또 일제시대 전설적인 춤꾼인 최승희의 제자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최승희→김백봉→유학자→최선의 줄로 한국정통무용의 맥이 이어져 내려온 셈이다.

한국 정통무용의 계승자
최선 교수는 현재 공주대학교 무용학과 교수이며 중요무형문화제 제 27호 승무 전수자로, 김백봉 춤 보전회 이사로, 최선무용단 단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선 무용단은 공주대학교 대학원생이나 졸업생으로 구성되었는데 주로 창작 춤을 공연하는 무용단이다. 최 교수는 창작 춤을 ‘일정한 주제를 가지고 새로운 내용으로 새롭게 만든 춤’ 이라고 정의하는데 무용가로서 창작 춤을 공연한다는 것이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사람, 의상, 무대, 안무와 같은 인적․물적 자원이 만만치 않은데 유관기관이나 단체의 지원금으로는 턱없이 모자라 본인이 부담할 수밖에 없고 또, 어렵게 공연하는 작품이 번번이 단발로 끝나게 되어 여간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고 한다. 본인이 대학 교수로 있어 직접 안무도 할 뿐더러 출연도 하고 제자들을 무용단원으로 동원할 수 있어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1회 공연 때마다 3천만원의 비용(무대 장치와 장비가 있는 상태에서 조명, 연출, 무대감독에 드는 돈이 기본적으로 2천만원 이상 필요)이 든다는 것이다.

다시, 무용은 나에게 무엇인가?
이쯤에서 나는 다시 맨 처음 던졌던 물음을 꺼내 놓는다. 그럼 무용은 나에게 무엇인가? 비로소 최선 교수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무용관을 내려놓는다.
󰡒무용은 삶을 이루는데 다시 한 번 활력을 주고 자신의 삶을 되새기게 하고 북돋아 오르게 하는 촉매제입니다. 때로는 저도 편안하게 살고 싶지요. 그렇지만 무용은 쉽사리 포기하기 어려운 상대입니다.󰡓
왜 아니겠나? 창작의 길엔 고통과 회의가 따르게 마련이다. 무용가 최선 교수에게 있어 무용은 애기 낳는 엄마의 입장이 아니겠나, 짐작해본다. 다시는 애기 낳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서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애기를 낳고 싶어 하는 여자들의 마음처럼 말이다.

   
단청 공연 가운데 ‘상실’에서의 최선 교수.
창작 무용 「단청」
그만큼 이야기를 접고, 나는 지난번 보았던 창작무용 「단청」에 대해서 듣기로 한다. 「단청」은 2003년 전국무용제 금상 수상작품이다. 당시 세 개의 신(scene)으로 구성, 35분짜리 중편이었는데 이번에 다섯 개의 신으로 확대하여 70분짜리 대작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총동원 무용수 32명. 가운데에는 최선 교수 자신과 객원 무용수 네 명이 포함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최 교수는 예술 총감독, 안무 및 출연을 담당하고 있다. 그녀의 혼이 고스란히 바쳐진 작품이라 할 것이다. 「단청」은 신마다 독특한 주제를 담고 있다. 신화, 역사, 시간, 상실, 단청 등이 그것이다.

「단청」이란?
전통적으로 단청은 건물이나 회화작품에 그림이나 무늬를 그려 넣는 것을 말한다. 다섯 가지 색을 사용한다. 청, 적, 백, 흑, 황 등. 이는 또 동양사상의 근본이라 할 음양오행설에 바탕을 둔다. 음양오행설은 방위나 계절, 색깔, 사신(四神), 사덕(四德)이나 사단(四端), 시의 형식과도 통하는데 무엇보다도 인생의 단계를 설명하는데 좋은 단서를 제공한다. 하므로 창작무용 「단청」은 보통의 춤이 아니다. 바탕에 철학적 흐름을 깔고 있으며 나름대로 스토리를 차용하고 있다. 얼핏 보기로 「단청」은 한 사람의 일생을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사전지식이 없는 관객의 눈으로는 <출생→유․소년기→청․장년기→노년기→영혼의 세계>로 읽혀지기도 한다. 실상 「단청」은 그다지 이해하기 쉬운 작품이 아니다. 내용이 깊숙하고 말해주는 바가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막이 열리면서 관객은 현란하고 신비한 무대장치와 조명과 음악에 압도된다. 그리고 무리지은 무용수들의 독특한 몸놀림에 눈을 크게 뜨게 된다. 분명 묵은 주제임에도 전혀 새롭다는 느낌을 준다.

인생의 사계
생명체가 알에서 깨어나듯 수많은 무용수들이 꼬무락대면서 일어나는 ‘신화’의 세계, 1장을 지나 2장에서는 커다랗고 둥근 원을 무대 가득 그리면서 동남서북 사방위에 남자 무용수들이 각각 청, 적, 백, 흑의 복장으로 마주서고 중앙에는 황색의 옷을 입은 여자 무용수가 서서 네 남자를 어우르면서 ‘역사’의 장을 펼친다. 바로 최선 교수다. 중앙은 색깔로선 황이요, 사단으로선 신(信)이요 계절로선 환절기인 바, 바로 동남서북을 조화시키는 어미의 역할이기도 하다. 3장은 ‘시간’의 장으로 여름을 의미하는 붉은 옷의 남자 무용수가 나와 독무를 하면서 여자무용수들과 어울린다. 힘차고 장쾌하다. 춤이 끝난 뒤 붉은 옷의 무용수가 서 있던 자리의 무대가 꺼지면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간다. 아! 조그만 탄성이 나온다. 그것은 우리 공주의 문예회관에도 저런 장치(오케스트라 피트orchestra pit)가 있었는가 하는 데에 대한 감탄이기도 하고 무성하던 인생의 여름이 지나간 것에 대한 애석함의 표출이기도 하다.

아, 가을!
무대 앞자리가 꺼진 상태로 가을을 의미하는 흰옷 입은 남자 무용수가 나와 여자 무용수를 이끌며 춤을 춘다. 동시에 애절한 무대음악이 흐른다. 무대 가득 보이지 않는 낙엽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다. 아, 가을이구나. 가을이야말로 인생의 결실기. 인생의 황금기. 무엇이든 가득 차 있다. 넘쳐흐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완성이 아니다. 어울려 춤을 추던 남녀 두 사람이 손을 잡는다 싶더니 여자 무용수가 가볍게 뛰어올라 남자 무용수의 품에 안긴다. 그야말로 잠시 동안이다. 잠시 동안 그렇게 남자의 품에 딱 한번 안겼다가 내려왔을 뿐이다. 아! 나의 입에서는 다시 한 번 탄성이 나온다. 저러면 안 되는데……. 저러면 가을이 끝나 가는데……. 저러기 위해서, 저 한 번의 따뜻한 만남을 위해서 우리네 인생은 그렇게도 부대끼며 고달프게 살아왔던 것이다. 저걸 어쩌면 좋으랴……. 여자 무용수의 가벼운 옷자락에 음악은 부서져 달빛처럼 나부끼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 대목에서 와락 눈물을 쏟아놓고 만다.

다시 봄의 세계
가을의 장이 끝난 뒤 꺼진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먹장삼을 휘두르며 여러 무용수들이 올라온다. 마치 죽음의 세계로부터 회생하는 사람들 같다. 겨울의 장이다. 한동안 겨울의 정경이 스쳐간 뒤 봄의 세계를 보여준다.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환한 영상이 나타나고 울긋불긋 꽃잎을 숨긴 듯한 초록빛 의상의 무용수들이 천천히 움직이면서 봄이 왔음을 고지(告知)한다. 전체적인 흐름으로 볼 때 사계절을 봄→여름→가을→겨울의 순으로 다루지 않고 여름→가을→겨울→봄의 순으로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계절과 인생에 대한 독특한 해석이 들어있다. 춘하추동으로 하면 지극히 고식적인 해석이다. 그냥 그것으로 끝나고 마는 결말이다. 그러나 봄을 맨 나중에 놓음은 다시 사계절이 반복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인생과 계절이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역설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동양적 인생관의 입장이다. 서양의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사계」와는 구별되는 점이다.

상실과 대단원
4장은 ‘상실’의 장이다. 최 교수가 다시 무대에 나와 무용수들을 무대로 끌어내면서 활기를 되찾고자 한다. 무용수들도 ‘퇴색’과 ‘상실’을 떨쳐내려고 몸부림치는 동작이 역력하다. 뒤섞인 혼돈의 삶 속에 조화를 찾기 위한 노력이다. 노랑 옷을 입은 최 교수가 질서의 조정자 역할을 맡는다. 카오스 속에서의 로고스의 열망이겠다. 마지막 장 5장은 에필로그. 대단원으로서의 ‘단청’을 종합하는 장이다. 세 개의 백색 문이 하늘에서 차례로 내려온다. 4장에서 쓰러졌던 최 교수가 일어나 그 문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한 남자 무용수도 따라서 들어간다. 연출가의 의도는 ‘유구하고 변함없는 단청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 하지만 관객의 눈으로는 인간의 사후세계, 영혼의 세계처럼 보인다.

끝나도 끝나지 않은 ‘단청’
어쨌든 「단청」은 끝났다. 그러나 ‘단청’은 끝난 것이 아니다. 단청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발전하고 또 변모해나갈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네 인생과도 같다. 한 사람의 인생이 끝난다 해도 쉽게 끝나지 않는다. 그의 업적과 후일담과 추억과 향기가 우리 주위에 남는다. 뿐더러, 그의 인생의 의도가 다음 세대로 이어져 계승되고 있음을 보기도 한다. 아, 이 얼마나 깊은 인생인가! 눈물겨운 사연인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여러 차례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이 얼마나 철부지 노년인가! 그럴 때마다 마주 앉은 최 교수도 따라서 여러 장의 크리넥스를 뽑아 눈두덩을 훔치는 사람이 된다. 이렇게 한 시간도 넘게 마주앉아 상호간 인생과 예술에 공감하면서 함께 눈물을 훔치는 시간을 가졌다는 사실! 이것은 분명 귀하고 특별한 경험이다. 대담을 마치면서 최 교수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또다시 좋은 무용을 해보겠다는 의욕이 저절로 생기는 군요. 그러고 보면 무용은 저에게 끊임없이 에너지를 제공하는 생명의 원천입니다.󰡓
그것은 당초 내가 던졌던 질문인 ‘무용은 나에게 무엇인가’에 대한 최 교수의 최종적인 답변처럼 들린다. 
 
   
▲최선 무용단의 단청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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