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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영원한 학장님
나태주 공주문화원장  |  tj45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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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8.19  09: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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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학교수 서연(栖然) 이화영(李華永) 선생

공주지역에 살면서 바깥출입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화영 학장님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화영 학장님은 오늘날 공주대학교가 종합대학이 되기 바로 직전 공주사범대학의 마지막 학장으로 계셨던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를 떠나서도 즐겨 그분을 학장님이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애칭인 셈이다. 이화영 학장님은 일찍이 이름난 수학 교육자였으며 그 이후로는 세예가로 이름이 높은 분이다. 그런가 하면 고미술품에도 상당한 안목을 지니고 계신 분이다. 또한 젊은이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컴퓨터 조작능력이 탁월한 분이다. 말하자면 전인적인 인간적 능력을 지닌 분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2009년 6월 16일 11시, 공주문화원 원장실에서 <공주문화> 편집의 일을 하고 있었다. 편집회의를 간단히 끝내고 몇 사람이 앉아서 담소를 하고 있었다. 정재욱 원장과 이극래 교장과 그리고 나. 우리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이화영 학장님에게로 집중되어 있었다. 손님용 탁자 유리판 아래 정 원장이 그동안 받아온 연하장이 여러 장 깔려 있었는데 그 가운데 이화영 학장님의 연하장이 가장 눈에 띄었음으로서다. 정 원장의 말에 의하면 이화영 학장님은 해마다 정성스레 연하장을 만들어 보내주기로 유명한 어른인데, 그 내용이 정성스럽고 글씨체 또한 다양하여 아름다울 뿐더러 연하장이 갖추어야 할 격식을 제대로 갖추었노라 한다. 그것은 품격 있는 연하장의 세 가지 조건으로 연하장 내용을 육필로 직접 쓰고, 보내는 해의 간지(干支)와 받는 이의 이름을 쓴다는 것이다.

그러자 앞자리에 앉아있던 이극래 교장은 이화영 교수님이 당신이 대학에 다닐 때 교수님이셨는데 수학강의를 아주 재미있게 하셨던 분이라고 회상한다. 그건 나도 조금은 아는 일이다. 나는 사범학교를 나오고 대학교를 나오지 못한 사람으로 초등교단에 있으면서 방송통신대학을 통해 대학교 과정을 공부했다. 아마도 3학년 과정 수학과교육에 대한 강의였을 것이다. 대략은 공주교육대학을 협력학교로 지정, 현지교수로부터 강의를 듣고 학점을 이수토록 되어 있는데 몇 과목만 공주사범대학으로 협력학교가 지정되어 그곳으로 공부하러 갔을 때, 이화영 교수님의 강의를 들은 바 있다. 어떻게나 강의를 재밌게 하시는지 까다로운 수학강의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였다. 도표와 예화를 많이 들어 수강자들로 하여금 쉽게 강의내용에 접근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충북 청주 교원대학교에서 초등학교 교장 연수를 받을 때 이화영 교수님의 특강을 들은 바도 있다. 전국에서 모여든 초중등 각급의 교장 후보자들을 넓은 대강당에 모아놓고 하는 대형 강의였다. 전체적으로 재미있고 인상 깊은 강의였지만 그 가운데 특별히 아직도 기억에 남는 내용은 인간의 나이와 오관의 기능에 관한 것이었다. 이 교수님은 왜 사람이 나이를 먹게 되면 시력이 나빠지고 귀도 조금씩 어두워지는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었다. 사람이 나이를 먹고 차츰 학교의 교장과 같이 높은 자리, 지도자의 자리에 가게 되면 작은 것은 더러 눈감기도 하고 작은 소리는 더러 흘려들을 줄도 알라고 눈도 조금씩 흐려지게 되고 귀도 그렇게 어두워진다는 말씀이었다. 그것은 전혀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내용이 아니라 인생론적이고 형이상적인 내용이었지만 오래 오래 간직하고 음미할만한 말씀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나는 이화영 학장님의 정식 대학교 제자는 아니지만 마음 속으로 그분을 은사님으로 모시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선생의 고향은 논산. 1930년 출생(음력으로 10월 3일이 생일). 올해로 산수(傘壽: 80)의 연세이신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어른이다. 일찍이 공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제 공주사범대학을 졸업학고 6․25 당시 논산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서울대 사범대학에 편입하여 다시 졸업하고 중등학교 수학교사가 된다. 1953년 23세의 나이로 서울사대 부고에서 1년 근무하다가 그 이듬해 경기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겨 1957년 공주사대 교수로 부임하기까지 대한민국의 내노라는 수재들을 가르친다. 오늘날 이름만 대면 누구나 대번에 아, 그 사람! 하고 알만한 이름들이 떠오른다. 이미 이때 중등학교 수학과 참고서를 7권이나 집필하는 학문적 업적을 쌓는다.

1960년, 상당히 늦은 나이에 논산 훈련소에 입대한다. 나이는 30세, 대학에서는 이미 부교수가 된 뒤였다. 1년여 우여곡절 끝에 교보(한 시절, 학교 교원을 대상으로 했던 특별한 병역제도)로 병역을 마치고 다시 공주사대 교수로 복귀하여 2년 남짓 준비하여 중등학교 수학과 검인정 교과서를 저술하여 전국적으로 활용토록 하는 동시, 유명한 수학과 교수로 이름을 드날리면서 미국 미조리주 콜롬비아대학에서 명예이학박사를 받기도 한다. 선생이 공주사대 교수로 봉직하면서 가장 두르러진 업적은 이렇게 수학교육자로서 뿐만 아니라 공주사대를 공주대학교로 만든 초석을 놓은 분이라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공주사대가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어야한다는 신념을 지닌 당시 이화영 학장님은 교육부와 서울의 정계 요로를 수없이 찾아다니며 관계자들을 설득한 끝에 1990년도 12개 과를 새롭게 배정받아 공주사대를 공주대학으로 이름을 고친 뒤, 그 이듬해 공주대학교를 발족시키도록 튼실한 주춧돌을 놓았던 것이다.

세 사람이 한동안 이화영 학장님을 화제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출입구 쪽에 인기척이 있었다. 바로 이화영 학장님이셨다. 7월 1일 자로 정재욱 원장이 퇴임을 하고 내가 새롭게 원장에 취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시고 우리 두 사람을 위해 점심 대접을 해주마 해서 찾아오신 길이었다. 선생이 들어서자 이극래 교장이 웃으며 인사를 드린다.
“선생님도 참 양반이 되기는 틀리셨네요. 금방 선생님 말씀을 하고 있었는데 오시는군요.”
선생을 맞이해 네 사람은 잠시 차를 마시며 담소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극래 교장은 다른 곳에 점심약속이 있다 해서 그리로 가고 결국 세 사람만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선생이 점심을 내시는 자리. 선생은 미식가이기도 하다. 미리 유성시내 함 음식점에 예약을 해놓고 우리더러 함께 가자 하셨다. 자동차 운전은 정 원장이 하고 운전석 옆에 내가 앉고 뒷자리에 선생이 앉았다. 일사천리 유성으로 뻗은 길. 자동차 안에서 나는 선생에게 평생에 지침이 될 만한 교훈의 말씀을 들려 달라 청했다. 선생의 말씀은 다양하다. 그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다. 인생을 사는데 과거나 미래보다는 현재를 최우선으로 살아야 한다. 과거는 화석 같은 존재이고 미래는 신기루 같은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람이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있다 해도 그 자리에서 역사에 남을만한 일을 할 수도 있다는 신념으로 살아야 한다. 그 구체적인 예로 군대생활에서 겪었던 일들을 소상하면서도 재미있게 들려주셨다.

식사 자리에 가서도 선생의 말씀은 강물같이 이어졌다. 주로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과의 일화가 아주 재미있었다. 화제 중에 선생의 입에서는 어려운 고사성어나 문장들이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평생을 수학교육을 전공하신 분이라고는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다. ‘장기신대시동(藏器身待時動: 재능을 간직하고 있다가 때를 기다려 움직인다.『주역』).’ ‘화광동진(和光同塵: 자신의 능력을 부드럽게 화합하여 대중과 같이 한다. 『노자』).’ ‘고조진이양궁장(高鳥盡而良弓藏: 높이 뜨는 새가 없어지니 좋은 활이 소용없고), 교토사이주구팽(狡兎死而走狗烹: 토끼를 다 잡았으니 개를 삶는다.), 적국멸이모신지敵國滅而謀臣之(적국을 격파했으니 모신이 가버린다.),『초한지』).’ 마지막 것은 긴 문장인데도 줄줄 외우신다. 당신의 연세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면모이시다. 다재다능하시다 할까. 선생은 컴퓨터에도 젊은이 못지않게 취미와 기량이 있어 동영상(UCC)을 자작할 정도요, 앞에 말한 바와 같이 서예실력은 한국의 대가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선생한테 사사하여 훌륭한 서체를 구사할 정도다. 선생의 호는 ‘서연(栖然)’이라고 하기도 하고 󰡐심백헌(心白軒)󰡑, 󰡐관재(觀齋)󰡑, ‘날빛’을 두루 사용한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공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30년 전에 보았던 <세계의 어린이>란 방송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1979년, 공주교대 부국 교사로 발령받아 공주에 왔을 때 특별한 영상물 한 가지를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일본 동경의 TBS영화사에서 세계 56개국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제작한 것인데 우리 한국 어린이 편에서는 공주에서 사는 두 명의 여자 어린이가 출연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학교 뒷산을 뛰어다니며 놀기도 하고 운동장 가에서 고무줄놀이 땅뺏기놀이도 하고 집에 돌아가서는 또 어른들에게 한복을 입고 큰절을 올리기도 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담장 너머로 삐죽이 가지를 내민 채 익어있는 붉은 감이라든지,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 아스팔트길 위로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정겨웠다. 자전거 바퀴에 눌려 바스락거리는 낙엽의 소리는 오래 동안 가슴에 남았다.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한국적인 정취요 바로 공주가 공주다운 모습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알고 보니 그 영화에 주인공으로 나온 여자 어린이 가운데 한 사람이 이화영 학장님의 따님이라 했다. 그것이 30년도 훨씬 전의 일이니 그 영화 속에 나왔던 선생의 어린 따님도 이제는 중년의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날은 옛날이야기도 하고 선생으로부터 격조 있는 점심도 대접받고 유성으로 오가며 좋은 강의도 듣고 이래저래 기분 좋고 유익한 한 날이었다. 이화영 교수님. 우리들의 영원한 학장님으로 오래 건승하시어 우리들 곁에서 좋으신 어른으로 계시기를 소망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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