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문답으로 사랑을 확인케 해준 시‧‧‧ 귀천, 성우 배한성

귀       천
                                      천사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시문답으로 사랑을 확인케 해준 시...귀천

                                                                                                   배우 배한성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그 해에도 아내와 함께 몇 군데 송년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요즘은 전 국민이 가수화, 개그맨화가 된 듯 누구나 노래를 잘 부르고 야한 개그도 잘들 하니까 여흥시간에 노래 안 부르겠다는 부부가 없는데, 평소에도 다소곳하던 그 부부는 노래 대신 시를 낭송하겠다며 흥겨운 분위기를 깰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노래에 싫증을 느낀 팀들이 와- 하고 성원을 보내자 그 부부는 워즈워스의 '초원의 빛'을 낭송하기 시작했다.
"‧‧‧‧‧‧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관객(?)들은 모두 영화 '초원의 빛'의 주인공이 된 듯 보석 같은 언어, 시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결혼 전 데이트하면서 처음 본 영화 '초원의 빛'의 주인공이 된 듯 보석 같은 언어, 시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결혼 전 데이트하면서 처음 본 영화가 '초원의 빛'이었는데, 사랑의 아픔과 혼돈에 시달리던 나탈리 우드가 울먹이며 낭송하던 장면이 너무도 인상적이어서 가장 좋아하는 시가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시 역시 그들 부부처럼 사연을 담고 있다.
아이들의 엄마와 사별하고, 삼 년 가까운 홀아비 생활에 건조해질 대로 내 앞에 나타난 그녀에게 아이들 엄마의 빈 자리, 아내의 빈 자리에 앉아 달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마흔을 넘긴 황혼(?)의 나이에 중2‧고1의 두 딸을 두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십대 후반의 자신감으로 충만한 젊은 여성으로 일에 열정을 쏟고 있었다.

아이들도 나이 차이 때문에 탐탁해하지 않는 눈치였는데 십여일 동안 동남아 여행을 셋이 다녀오더니 나만 외톨이가 된 듯싶을 만큼 친해졌고, 나중에 절대로 다시 이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엄마 대신 그 역할을 해줄 엄마가 꼭 필요하다는 마음으로 아빠와 결혼에 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로서는 또다시 누구를 사랑한다고 고백할 자격도 없고, 사랑의 열정도 지난날 다 소진시켜 버린 듯해서 엉거주춤하고만 있었다.

보다못한 이모가 나서서 그녀를 찾아가 한 가정 다시 살려 주는 셈치고 결혼을 해달라고 하셨단다.
내친 김에 지방에 사시는 그녀의 부모님들까지 만나 뵙고 저간의 사정을 말씀드리는 데까지 발전했지만, 기겁을 하신 그쪽 부모님들의 반대로 일은 영 글러 버리는 지경으로 변했고 중간에서 시달리던 그녀도 훌쩍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둘째가 졸업을 앞둔 어느날, 실로 오랜만에 그녀가 나타났다.
졸업식에 꼭 와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단다.
식이 끝나고 돌아가는 그녀에게 난 역시 벙어리 삼룡이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나를 측은히 바라보던 그녀가 예쁜 봉투를 쥐어 주고는 총총히 가버렸다.
봉투 안에는 만년필로 또박또박 쓴 천상변 님의 '귀천(歸天)'이란 시가 들어 있었다.

엘리자베스 브라우닝과 로버트 브라우닝이 서로의 시에 감탄과 존경을 보내다가 그것을 핑계(?)로 만나서 평생 행복한 삷을 살았듯이, 나도 그 시 받은 것을 핑계 삼아 시를 적어 보냈다.
황동규 님의 '바람부는 날'을.
 

얼마 후 간략한 답장이 날아왔다.
"선문답(禪問答) 하듯이 시문답(詩問答) 하는 건가요? 우리, 만나요."

다시 만나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그날, 정말 어느 시처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이 가득차 있었다.

나를 매혹시킨 한편의 시(문학사상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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