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자연미술가협회(야투) 고승현 회장

▲ 고승현 한국자연미술가협회(야투) 회장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는 공주의 야투(野投), (사)한국자연미술가협회가 주관하는 국제적 미술행사이다. 한 때는 도외시의 대상이었으나 이제는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행사가 되었다. 주로 7월과 8월, 한 여름에 공주 금강 변 연미산에 위치한 ‘자연미술공원’ 주변에서 열린다. 국내 작가뿐만 아니라 외국작가들이 다수 참가하여 미술의 잔치를 벌이는데 이러한 훌륭한 미술행사가 우리 공주지역에서 열린다는 점이 참으로 놀랍고 자랑스럽다.

그러나 정작 공주 사람들은 이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에 대해 별로 관심도 없는 것 같고 잘 알지도 못하는 것 같다. 이 행사가 유명한 줄은 더욱 모르는 것 같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역시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는 공주지역에서보다는 전국적으로 알려진 행사이고 한국 안에서보다는 또 국제적으로 명성을 가진 행사이다. 이제는 공주를 자연미술의 메카라고 부르는 실정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러는 것이 아니라 외국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고 있다.

나 자신 오래 전부터 야투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더러는 언론보도를 통해서 알았고 소문으로 알았을 것이다. 야투는 시작할 때부터 조금쯤은 별종의 단체였다. 그들의 미술행위나 주장들이 전혀 새로웠다. 새로움은 때로 혁신적으로 비쳐질 때가 있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 편에서 보면 위협 요소가 될 수도 있다. 자기네들은 조용하고 개인적인 움직임 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눈길은 그다지 평온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야투를 제대로 가까이 알게 된 것은 1999년 여름의 일이다. 그 때 나는 계룡산 아랫마을에 위치한 왕흥초등학교란 조그만 학교의 교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평소 안면이 있던 야투의 고승현 회장과 이응우 부회장이 나를 찾아왔다. 때가 되어 외국의 작가들까지 다수 몰려왔는데 작가들이 들어가 묵을 숙소 마련이 여의치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가 근무하는 학교 건물을 작가들 숙소로 빌려줄 수는 없느냐는 요구였다. 안될 까닭이 없는 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즉각 그러마 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나는 야투의 고문이 되기도 했다.

야투의 고승현 회장과 이응우 부회장은 우리 문화원의 회원이기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공주문화> 2010년 7+8월호에 ‘2010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를 특집으로 꾸미기로 했다. 그리고 ‘문화의 향기’ 난에 고승현 회장에 대해서 싣기로 하고 인터뷰를 청했다. 장소는 문화원 원장실. 날짜는 2010년 6월 16일, 오전 10시 30분. 문화원의 김민영 양이 사진을 찍는 자리에 나는 고 회장과 마주 앉았다. 아래 내용은 고승현 회장과 주고받은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 고승현 회장이 자신의 갤러리 앞에 서있다.

나태주: 고 회장님, 시간을 내주시어 감사합니다. 저희 공주는 전국적인 시각으로 볼 때 미술이 다른 분야 예술보다도 아주 강세입니다. 일찍이 청전 이상범 선생을 시작으로 신현국, 임립, 임동식, 김동유, 고승현을 비롯한 자연미술가 구릅이 그렇습니다. 음악에 공주 출신으로 구두회나 강창식 같은 작곡가가 있기는 하지만 요즘은 활동을 하지 않는 것 같고, 문학의 경우 문인의 수에 비하여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작가가 드문 것이 사실입니다. 유독 미술이 센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 회장은 공주 태생이고 공주에서 오래 살았으니까 한번 이 점을 이야기 해주시지요.

고승현: 예, 지역의 환경이란 우리의 삶과 인간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여러 고장을 여행하다 보면 많은 도시 주변이 난 개발되고 공장이 어지럽게 들어서는 것을 보고 혼란스러움을 느낍니다. 말하자면 집을 한 채 짓더라도 철학이 없는 것이지요. 그냥 공간, 내 땅이 있으니까 집을 짓는다는 식으로 해서 어수선하게 질서 없이 생활터전 내지는 축사나 공장 같은 집들이 들어서는 경우이지요.
그러나 공주는 뭔가 다릅니다. 지리적으로 볼 때, 큰 강물인 금강이 우선 도시의 중심을 흐르고요, 계룡산을 비롯하여 주변에 높고 낮은 산이 둘러서 있고 샛강들이 아름답게 금강과 연결되어 있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집을 한 채 지을 때도 어떻게 지을 것인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지요. 자연에서 영향을 받아 집 한 채를 짓더라도 그래도 공주사람들은 다르게 짓습니다. 그래서 우리 공주는 살고 싶은 고장이구나, 다른 도시에 비해 환경적으로 잘 갖추어진 도시구나, 느끼게 되지요. 이것은 행정적 기획으로 가능했던 일이 아녔습니다.
그런 걸 보면서 사람들의 심성도 자연과 문화가 주는 생명력에서 영향을 받았을 줄 압니다. 자연이란 늘 살아 움직이는 것이고 또 창조 그 자체잖아요. 계절의 변화에 따라 움직이는 것, 꽃이 피고 지는 것이 생명에 대한 창조이거든요. 그런 쪽에서 역시 영향을 받아 공주의 미술계가 탄탄한 것이 아닌가 짐작을 하게 됩니다.

나태주: 올해 ‘2010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가 있는 해이지요? 왜 공주에 자연미술비엔날레인가, 왜 다른 도시가 아니고 공주인가, 묻고 싶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우연은 없지요. 우연을 빙자한 필연이 있을 뿐이지요. 비엔날레의 존재이유와 자연미술 비엔날레의 시발에 대한 말씀을 부탁합니다.

고승현: 비엔날레 이전에 야투-야외 현장미술연구회가 있었습니다. 통칭 야투라고 부르고 비엔날레는 격년제로 갖는 발표행위, 국제전시 형태이지요. 한국에서 자연미술이란 우리 야투구릅이 개척한 자생력 있는 미술 형태의 한 장르입니다. 전에는 자연현장에서의 작업에 관한 구체적 방법론이나 그러한 행위에 대한 이름조차 없었던 영역을 금강유역의 젊은 미술인들이 처음으로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하지요. 야투의 창립전이 1981년이니까, 올해로 정확하게 30년이 되었지요.
그 당시는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시절입니다. 제가 군복무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와 보니 광주시민혁명이 일어나고 있었고 당시의 집권층에 의한 반민주적 군부세력에 의해 엄청난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고 있었습니다. 또 시대적으로는 산업사회가 급속히 팽창되어가는 등,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요동치는 그런 시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시로 집중되는 가운데 예술인들마저도 이른바 제도권 또는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절치부심하며 창작의 열정보다는 협회나 그룹을 만들어 그들의 아성을 지키기 위해 힘을 모을 때였지요.
그러나 저희들은 그 당시 우리들의 터전이었던 공주와 금강을 보면서 미술인으로서 자신들이 하는 일들에 대해 조용히 질문을 했지요. 우리가 하는 미술이란 무엇인가? 그 때 연장자로는 임동식, 유동조, 지석철, 그리고 저 고승현이 있었지요. 아무튼 우리는 금강 변을 같이 거닐며 옛날과 다른 물빛을 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라고 자문을 하며 깊은 상념에 잠기곤 했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 언제부턴가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세 때부터 흐르는 자연의 순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지요. 오늘날 사람들이 도시라고 하는 비 자연적인 환경에서 편의를 쫒아 살다보니까 자연의 순리보다는 인간적인 논리나 자신만의 아집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인위적인 틀 속에 가두고 살아가는듯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와 다르게 우리 인간은 자연 속에서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하는 참다운 것을 배울 수 있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오리지널 미술이 무어냐, 거기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을 던진 거지요. 그래서 미술에 대한 본질과, 미술을 하는 행위의 원형을 찾아보기로 하였지요. 즉 본래의 미술을 찾아보자, 그것이 어떤 고대의 동굴벽화든 원시인들이 생활을 위해 사용하던 도구, 또는 용구들... 인류가 그들의 생존을 위해 만들었던 무언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미술이라고 하는 것이 조형적으로 구도를 잡고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해 형태나 색상 등을 고민하는 그런 미술이 아니라 본래 인간이 자연 속에서 반응했던 창조적 의식, 표현, 그것이 진짜 순수한 미술, 본래의 미술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이 본래의 미술을 찾는다면 인간성의 회복은 물론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사는 것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바로 이러한 예술적 목표를 가지고 결성된 것이 야투입니다.
‘들 야(野)’에 ‘던질 투(投)’. 자연과 교감하고, 자연 속으로 나가서 우리의 생각을 끊임없이 자연에 투여하고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생명의 메시지를 순수하게 받아들여보자는 것이었지요. 그 당시에 이 같은 뜻을 지닌 사람들은 세속적인 잡념을 떠나서 연구회 운영을 위한 어떤 틀을 만들지 않고 모임을 해보자 그랬지요. 그 때 우리들의 모임을 야투-야외현장미술연구회라고 불렀습니다.
야투가 모임의 이름이라면 야외현장미술연구회는 모임의 성격 이었습니다. 처음엔 자연보다도 야외현장이란 말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야투는 처음 20명이 모여 시작했지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연구모임 이었을 뿐, 회칙도 없고 회장도 없었습니다. 다만 사계절연구를 위한 간사가 필요했기에 그 부분을 제가 맡았었지요. 그리고 창립전을 포함한 모든 사계절연구회의 결과물로 연구문집을 흑백으로 만들었습니다.

나태주: 처음 금강대교 위에서 금강 물에 여러 가지 색깔의 천을 늘어뜨린 작가가 기억나는데 어떤 작가였나요?

고승현: 허진권 작가의 작품이었지요. 지금은 목원대학교 교수로 있습니다.

나태주: 그리고 어떤 남자가 모래밭에 옷을 벗고 퍼포먼스를 하던 걸 기억하는데요?

고승현: 예, 그랬지요. 그 당시 여러 회원들이 그런 행위미술을 했지요. 왜 그랬느냐면… 그 시절에는 어떤 적절한 용어조차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요즘엔 자연미술이라고 말하지만… 아 먼저 자연미술이란 이름의 출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네요.
야외현장미술연구회를 운영하다 보니까 ‘실내’의 반대 개념인 ‘야외’라는 말보다는 ‘자연의 생명’이란 메시지가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금강은 자연의 생명이 정말 살아서 움직이는 현장이지요. 물이 흐르는 소리, 갖가지 풀벌레의 울음소리, 그런 생명의 움직임들이 항시 변화하는 현장이 바로 자연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함께 공감한 동료 회원들에게 제가 발의해서 1983년부터 ‘야외현장미술’대신 ‘자연미술’이란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연미술이란 새로운 용어와 함께 우리는 순수자연을 찾아서 작업에 몰입하게 되었지요. 특히 여름에는 서해안 여러 섬들을 즐겨 찾았습니다. 인적이 드문 섬이다보니까(그 당시엔 금강도 마찬가지로 인적이 없었습니다만) 조용하고 깨끗하다는 것 이상으로 순수, 엄숙 등의 정서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선 우리가 걸치고 있는 모든 것이 오히려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초기에는 저마다 현장에서 작업을 하기 위해 이런저런 인공 재료를 준비해서 가지고 갔지만 막상 자연 현장에 도달하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거예요. 오히려 강물에 떠내려 온 나뭇가지나 이끼 낀 돌, 자연의 현상과 그 흔적들을 가지고 작업을 시작한 거였어요. 온몸으로 작업을 하다보니까 내가 입고 있는 옷이 부자연스러워 한 사람 한 사람 옷을 벗기 시작하여 어느 해 여름에는 모두가 누드가 되어버린 거예요. 그것은 아마도 자연과의 일체감을 얻기 위한 행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 고승현 회장 작품.
나태주: 야투를 시작할 때 자연과 순수와 원시(原始)에 대한 열정, 회귀에의 대한 본원에 대한 그리움이 대단했구나 싶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으로 야투가 발전하면서 내 인생과 어떻게 연결되었나, 내 인생에 준 야투의 영향, 내 인생에 준 야투의 공헌, 야투와 나, 시간적 흐름과 함께 이야기를 좀 해주시지요.

고승현: 야투를 처음 시작할 때인 1981년, 금강 백사장에 나가 모래를 보면서 모래가 참 아름답고 깨끗하다고 느꼈지요. 그러면서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모래알들이 우연히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주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일까? 궁금했습니다. 그 같은 끊임없는 의문 속에서 결국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자연미술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자연세계로 향하는 것입니다.
저는 자연미술을 통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세계로 안내하는 역할을 합니다. 자연 속에 전시된 나의 작품을 보러온 사람들에게는 나의 작품을 통해 자연을 느끼고 가기를 원합니다. 내 작업은 하나의 형식이고 나의작품은 자연보다 조금도 더 나을 게 없는 것이지요.

나태주: 말씀이 매우 철학적이고 종교적이고 명상적이군요. 그리고 논리정연하기도 하구요. 아마도 오랜 동안 자연미술 활동을 하면서 세월과 함께 정신의 앙금이 고여 그리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또한 작가적 태도가 지극히 겸허하다는 것도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겸허하다는 건 작거나 낮다는 뜻이 아니고 부드럽고 크고 넓다는 뜻에서 드리는 말입니다.

고승현: 오늘날 우리가 접하고 있는 자연이란 결코 아름답거나 낭만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언젠가 우리에게 엄청난 재난과 재앙을 몰고 오는 존재일 수 있습니다. 어떤 전쟁보다도 더 위협적인 자연이지요.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고 있는 자연의 진실입니다. 여전히 자연은 우리에게 사계절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지만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부분은 자연환경의 변화에 따른 갖가지 문제라고 봅니다.지구의 온난화도 그렇습니다. 태평양 가운데 있는 섬들이 물에 가라앉고 있다는 사실입니다(남태평양의 Tuvalu(투발루)와 키리바시(Kiribati), 마샬공화국). 베니스와 같은 인류의 문화유산도 수장될 수밖에 없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자연을 그동안 곱게 사용하지 못한 탓이고 잘 지키지 못한 탓이지요. 산사태, 쓰나미, 사나운 기후, 지진, 화산폭발 등 오늘날 온순한 자연이 아니라 폭력적 자연이 된 것은 일정부분 그 원인 제공자로서 책임을 회피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지구환경 변화와 관련해서 지금의 자연미술운동은 처음 시작했을 때하고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자연 안에 순수한 메시지와 무한한 생명력을 찾아 낭만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전 세계 자연미술가들과 교류하면서 우리들의 관심이 점차 환경과 생태에 관한 관심이 증대되고 있지요. 최근엔 자연미술을 지향하는 작가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자연미술을 시작한 30년 전만 해도 유럽에는 극소수 몇몇 작가들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뻗어가면서 우리 공주가 그 중심에 서게 되었고 자연미술계의 메카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 고장 공주에서 1991년에 시작한 금강국제자연미술전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고 지금은 비엔날레를 통해 수많은 국내외의 작가들이 참여하여 매우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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