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이 된 나그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

  방랑시인이 된 나그네

나그네는 집을 나간 가출자에서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내는 창조자가 된다.
운명과도 같은 지평의 둘레는
나그네의 보행에 의해서 변화하고,
물질의 결핍은 오히려 가벼운 봇짐이 된다.

-이어령(전 문화부장관, 문학평론가)

나그네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리.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한국말 가운데 아름답게 들리는 말은 대개가 다 세 음절로 되어 있다. 거족적으로 치렀던 행사 때마다 새롭게 등장한 조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서울 올림픽의 ‘호돌이’, 대전 엑스포의 ‘꿈돌이’와 ‘도우미’ 가 그렇다. 유행가 가사나 시에서 사랑을 받아온 ‘나그네’란 말 역시 세 음절이다. 더구나 유음(流音)인 ‘ㄴ’자가 앞뒤로 포개져 음색도 곱고 부드럽다.

이 세 음절의 미학을 최대한 살린 것이 박목월의 ‘나그네’이다. 그의 시에서는 ‘나그네’라는 말이 ‘강나루’ ‘밀밭 길’과 같은 낱말들과 세 음절을 기저로 한 리듬을 타고 그 말의 아름다움이 더욱 증폭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목월은 ‘나그네’를 음악적 휴지부로 삼고 있다. "강나루 건너서/밀밭 길을//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의 시행에서 나그네라는 말은 맨 마지막에 못박혀 있다. 그렇다. 나그네는 최종적인 울림으로 못박혀 있는 종지부다.

‘있다’ ‘있었다’ ‘있었을 것이다’와 같이 한국말의 종결어미는 모두 ‘다’로 끝난다. 그래서 현재형이든 과거형이든 혹은 미래형이든 글의 끝에 이르면 언제나 ‘다-다-다’의 기관총 소리를 낸다. 그러니 시의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 말운(末韻)의 효과와 변화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시는 그만두고 산문이라 할지라도 한국말로 글을 쓰다보면 누구나 ‘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런데 목월은 단조롭고 멋없는 ‘다’의 종결어미를 그야말로 깨끗하게 종결시켜 버린 것이다. ‘나그네’의 시행은 총 10행이지만 ‘다’로 끝나는 행은 단 한 개도 없다.
‘나그네’ ‘삼백리’ ‘저녁놀’ 등 모두가 다 체언으로 끝나 있다. 그래서 시각적 이미지만이 아니라 박목월의 나그네는 ‘다’의 돌부리에 채이는 법 없이 달처럼 조용히 무중력 상태에서 떠서 흘러간다.

시의 음악성만이 아니다. 강나루(강물)→밀밭 길 → 술 익는 마을로 이어져 가는 공간의 이미지는 남도 삼백 리의 외줄기의 길로 이음새 없이 연결된다. 그리고 “타는 저녁 놀”에서는 아침해가 떠서 지기까지 온종일 걸어가고 있는 나그네의 지속하고 있는 시간이 내일 모래로 순환하는 시간으로 이어져 간다. 그 공간과 시간의 이음새를 보면 그것을 결코 산문적인 ‘다’의 종결어로는 아우를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마을에서 마을로 황혼에서 황혼으로 끝없이 이동하고 지속하는 그 시간과 공간의 궤적(포토로지)을 스냅 쌋으로 찍은 원거리 풍경- 그러기 위해서는 초점거리는 무한대로 놓아야 하며 셔터는 열려져 있어야 한다.

그때 비로서 땅과 하늘을 나란히 놓은 비유법 “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의 모습이 떠오른다. 밀밭이 구름이라면, 나그네의 모습(둥근머리)은 달인 것이다. 그리고 달과 같은 나그네의 동작을 유포니(euphony : 듣기 좋은 음조)로 나타낸 것이 ‘밀’ ‘달’ ‘길’ ‘술’ ‘놀’ ‘마을’과 같은 ‘ㄹ’자로 끝난 시어들이다. 그래서 나그네의 음운조직은 곧바로 나그네의 움직임을 보여 주는 시각적 이미지(구름에 달 가듯)와 부합한다. 나그네의 시적 리듬은 바로 나그네가 길을 걷고 있는 도보의 리듬과 일치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시에 있어서의 음이나 이미지를 최종적으로 결정짓는 것은 의미의 요소이다. 시에 있어서 소리가 ‘의미의 메아리’라면 그 이미지는 ‘의미의 그림자’인 것이다. 우리의 시선은 그 메아리와 그림자를 가로질러 의미의 심장으로 향한다. 그리고 나그네의 뜻은 무엇인가라고 묻게 된다.

본래 나그네라는 말은 ‘나간 이’ ‘나간 사람’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일상적 차원에서 보면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다. 나그네를 뜻하는 영어의 트레블러(traveller)가 고통이라는 말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교통이 발달한 오늘날이라 하더라도 나그네는 ‘길 고생’을 함유하고 있는 말인 것이다. 하물며 도보의 여행자, 그리고 농경시대의 정주형 문화 속에서 살았던 나그네의 함축적 의미는 결코 긍정적일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시적 차원으로 오면 그 고통과 외로움과 물질적인 결핍마저도 새로운 의미로 역전된다. 산문적 의미로 보면 김삿갓은 거지이지만 시적 차원에 놓으면 사랑받는 방랑 시인이 되는 것과 같다. 니그네의 한발짝 한발짝은 고통이 아니라 새로운 풍경을 펼쳐 가는 보행에 의해서 변화하고, 물질의 결핍은 오히려 가벼운 봇짐이 된다.

멈추지 않는 것, 소유하지 않는 것, 모든 방향으로 열려진 도주로(逃走路, 스키조라인)를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그네다. 쟁기로 굳어 버린 흙을 뒤엎듯이 시인은 일상적 의미의 밭을 갈아 새 흙을 들어낸다. 의미의 경작자인 이 시인의 영토에서는 모든 나그네들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는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멀리 보인다. 그가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이며 그 걸음이 멈춰서는 곳이 저녁 놀이 타는 술 익는 마을이다.

‘술 익는 마을’과 저녁 놀‘ 그리고 ’나그네‘가 최초로 하나의 의미 단위로 합성된 것은 조치훈의 ’완화삼‘에서 였다. 그 시는 목월을 위해서 쓰여진 것이었고 목월이 그에 화답하기 위해서 쓴 ‘나그네’ 에 되풀이되어 나타난 것이 “술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이라는 그 시구이다.

저작권을 두 시인이 공유하고 있는 이 유명한 시구는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가 왜 시가 아닌가를 밝혀 주는 시론(時論)의 좋은 예문이 될 것이다. 동시에 시가 늘 음악적 상태를 동경하고 있으면서 왜 음악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시가 항상 이미지를 추구하고 있으면서도 왜 그림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시가 항상 이미지를 추구하고 있으면서도 왜 그림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그리고 또 시는 어째서 의미를 창조하면서도 어째서 철학이 되어서는 안되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살아 있는 본보기이기도 하다.

“타는 저녁 놀”이 나그네와 결합되면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정지된 시간이 되어 그 시적 의미가 한층 더 강렬해지고 마을과 연결되면 술이 익어 가는 평화로운 발효의 시간이된다. 그래서 저녁 놀은 잔치날을 위해서 혹은 손님을 맞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정밀(靜謐)한 시간이 된다. 그것은 “수술대 위에 마취된 환자처럼 척 늘어진 저녁 노을(T.S. 엘리엇)”이 아니라 술에 붉게 취한 주막의 나그네와 농부의 얼굴과 같은 것이 된다.

‘나그네’(인간)-‘저녁 놀’(시간)-‘술 익는 마을’(공간)이 ‘소리’와 ‘이미지’와 ‘의미’의 세가지 요소로 융합한 연금술 속에서 한국말, 한국마을, 그리고 고통스러운 나그네의 모습은 우리가 한번도 만져 보지 못한 신비한 광석으로 결정(結晶)한다.


나를 매혹시킨 한편의 시(문학사상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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