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화가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화백

인간은 자연의 아들
인간은 언제든지 홀로 인간일 수 없다. 어디까지나 인간과 더불어 인간이고 나아가 자연과 더불어 인간이다. 그건 시공을 떠나 변함이 없는 일로서 인간으로선 커다란 축복인 동시에 하나의 굴레이기도 하다. 한국의 독특한 의식구조 가운데 하나인 혈연이나 지연, 학연과 같은 것들도 이런 인식과 습속의 범주 안에서 논의되는 항목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인간의 자식이기도 하지만 자연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자연에 그 인간이란 말이 있다. 자연이 순후하면 인간도 순후하고 자연이 거칠면 인간도 거칠도록 되어 있다. 문화라는 것도 그렇다. 인간의 삶을 떠나 문화가 성립되지 않듯이 자연을 떠난 문화란 애당초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문화는 인간과 인간의 부대낌이기도 하지만 인간과 자연과의 부대낌의 결과, 그 성찰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문화의 한 갈래라 할 예술분야의 경우, 자연과 인간과의 조응관계는 지대한 유대 위에 놓인다. 단순히 우리의 민요 「아리랑」을 예로 들어도 그렇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전국 공통의 「아리랑」이 있는가 하면 「정선아리랑」이라든지 「진도아리랑」,「밀양아리랑」과 같이 지역이름을 딴 「아리랑」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지역마다 인간의 삶이 다르고 자연의 성격이 달라서 그러하다.

이를 그림, 즉 회화에 국한시킬 때 그런 현상은 더욱 두르러지는 경향이 있다. 조형예술이고 색체예술인 회화가 일차적으로 빌리는 것은 자연의 형상과 색체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의 모방 내지는 모사가 회화의 출발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처한 자연의 밝기와 모습에 따라 회화작품이 달라지도록 되어있다고 보아진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은 또 예술의 강력한 모태라 말하는 것에 크게 이의가 없겠지 싶다.

▲ 청전(靑田) 이상범 화백.
청전이란 분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선생. 그분은 한말의 어지러운 시기(1897년)에 충남 공주군 정안면 석송리에서 태어나 일제침략기를 살았고 해방공간과 6․25전쟁을 거쳐 서울의 누하동(樓下洞) 자택에서 1972년 별세할 때까지 이 땅에 살았던 화가이다. 김은호, 변관식, 박승무, 허백련, 노수현 등과 함께 우리나라 근대 한국화 6대화가 가운데 한분이다. 화가의 행적이나 업적은 잠시 뒤로 하고라도 걸출한 한 사람 화가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그분의 고향이 우리가 사는 공주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하기는 청전 선생은 (기록에 의하면) 만 9세가 되던 해(1906년) 고향 공주를 떠나 한 번도 공주 땅을 밟은 적이 없다 하니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는 일이겠다. 그러나 지금이 어떤 세상인가? 신화나 설화와 같이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꾸미며 자기 고장 자랑을 하는 세상 아닌가! 더러는 자기 고장하고는 거리가 먼 인물까지 빌어다가 자기 고장 문화의 자랑거리로 삼지 않는가?

더구나 청전 선생은 씨족적인 뿌리로 보아서도 공주와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공주에는 몇몇 거대성씨(巨大姓氏)가 있는데 조선조 정종대왕의 아드님인 덕천군(德泉君) 후손인 전주 이 씨도 그 가운에 한 문중이다. 현재 공주 지역에서 만나는 인물 가운데 하(夏), 은(殷), 주(周), 용(鎔)자가 들어간 이름들은 필경 그 덕천군 후손이기 십상이다. 하(夏)자 항렬 위가 건(建)자이고, 그 위가 상(象)자인데 이상범 선생 이름자의 가운데 글자인 상(象)자가 바로 그 ‘상’자인 것이다.

화가로서의 청전
이 땅에서 그림을 조금이라도 알고 또 좋아하는 사람치고 청전이란 이름과 그분의 그림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청전 선생이야말로 한국의 근대화단이 성립된 이래 가장 먼저 대중들에게 어필된 화가이며 끊임없이 사랑을 받아온 화가 가운데 한분이다. 인간이 잘 나거나 특별해서가 아니다. 그림이 특별해서이다. 그러면 그림으로서 어떤 점이 특별한가.

무엇보다도 청전 선생의 그림의 소재로 다루는 자연이 지극히 한국적인 자연이라는 데에 있다. 그저 멀리 갈 것도 없다. 오늘날이야 많이 변하고 사라지고 그랬지만 그 당시로선 대문 밖으로 한 발자욱만 나가면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풍경들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이전의 기암절벽이나 높은 산이 아니다. 신선풍이 감도는 가옥이나 정자, 속세를 떠나 유유자적하는 인물도 아니다. 그저 친근하고도 흔해빠진 풍경이요 쓸쓸하고 적막하기까지 한 정경이다.

오히려 선생은 우리들의 사라져버린 옛날의 모습, 일테면 산이나 들, 개울이나 나무들까지도 복원하여 화폭에 옮겼으며 그 가운데 한국인의 아련한 정서와 숨결을 불어넣고자 노력했다. 이것은 실상 하나의 혁신에 가까운 일이다. 우리로부터 유리되었던 우리의 정신과 혼을 우리 안으로 불러들이는 참으로 눈물겹기까지 한 작업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기탐구요 자기회복이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선생의 그림에 반하게 되는 것이고 깊이 빠져들게 되는 것일 것이다.

▲청전 이상범 화백 작-30년 잔추(殘秋).
청전 선생의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사람의 마음이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 어딘지 모를 머나먼 곳, 아스라한 곳으로 한사코 길을 떠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정녕 그림 속 어딘가에 우리의 혼곤한 영혼을 쉬게 할 낙토가 분명 있을 것만 같은 환각에 빠지게 된다. 애당초 󰡐무릉도원󰡑이란 것이 정말로 있다면 청전 선생의 그림 속 어딘가에 그 무릉도원이란 것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러기에 일찍이 청록파(靑鹿派) 3가시인 가운데 한분인 박목월(朴木月) 선생(1916∼ 1978)은 당신의 첫 번째 시집 『산도화(山桃花)』(1954, 영웅출판사)에서 󰡐청전(靑田)󰡑 이란 말과 󰡐산수도(山水圖)󰡑란 말을 시어로까지 동원하고 있음을 본다. 이는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니다. 청전 선생의 그림이 동업인 화가나 미술 평론가에게 뿐만 아니라, 타 분야의 예술가들에까지 높은 평가를 받고 있음을 설명해주는 객관적인 자료인 것이다. 그만큼 청전 선생의 그림은 인기가 높고 지명도 또한 높았다.

청석(靑石)에 어리는
찬물소리

반은 눈이 녹은
산마을의 새소리

청전(靑田) 산수도(山水圖)에
삼월 한나절

산도화(山桃花)
두어 송이

늠름한
품(品)을

산이 환하게
티어 뵈는데

한머리 아롱진
운시(韻詩) 한 구(句).

― 박목월,「山桃花․3」전문

▲공주시 정안면 석송리 뒷산 풍경.
전혀 사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경상도 경주가 고향인 박목월 선생이 공주와 전혀 인연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름 아니라 사모님인 유익순 여사의 고향이 공주이다. 청전 선생의 고향이 정안면 석송리인데 반하여 목월 선생 사모님의 고향은 무성산을 경계로 그 정안면 뒷동네인 사곡면 화월리 월안동 마을로 전해진다. 그러고 보면 서로 모르는 가운데 공주라는 한 고장을 두고 두 분의 마음이 이렇게 한편의 시로서 통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남는 말
오늘날 공주지역에서 청전 선생의 흔적을 찾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가까운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가가 남아있는 것도 아니고 고향마을에 청전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는 실정이다. 공주에는 수준 높은 교육기관이 여럿 있고 미술인구도 수월찮은 것 같은데 청전 선생의 그림과 인간을 그리워하며 자주 화제에 올리는 사람들조차 많지 않은 듯싶다. 그렇다고 미술가로서의 청전 선생을 기리는 그 어떠한 사업을 공주사람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도 아니다. 듣기로 공주 사람 그 누구 있어 청전 선생의 그림을 걸어놓고 자랑으로 삼고 있는 한사람도 없어 보인다.

썰렁하다. 휑하니 바람이 인다. 청전 선생의 그림 속에 나오는 늦가을이나 겨울날 저녁때 산야 풍경처럼이나 스산하다. 공주가, 공주 사람들이 이래도 되는가 싶은 의문 든다. 분명 청전 선생은 공주에 고향을 둔 사람이고 씨족적 연결고리가 있는 분이고 마음의 뿌리까지 깊숙이 가진 인물이다. 선생의 그림 속 풍경들은 어릴 적 떠난 공주의 산야를 그리워하면서 그린 그림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공주의 산야와 많이 닮아 있다. 한번이라도 눈여겨보시라. 청전 선생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차령산맥이 우쭐우쭐 흘러가다가 슬그머니 다리를 뻗고 야트막한 산으로 흘러내린 정안면 그 어디쯤의 산자락의 들길과 개울과 마을 풍경이 저절로 눈에 겹쳐오지 않는가.

그의 그림이 한국의 대표적 자연의 표상이 되었다. 비록 화가는 오늘날 세상의 삶을 접고 세상에 안 계시지만 화가의 그림만은 여전히 남아 숨을 쉬며 화가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지 않는가. 공주의 산천은 변했어도 화가의 그림 속에는 공주의 산천이 예전 모습 그대로 살아있어 아직도 꽃이 피고 물이 흐르고 새가 울고 또 사계절을 바꾸고 있지 않는가. 또한 그림 속에 조그만 모습으로 들어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고달픈 삶을 누리면서도 선량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고 있지 않는가.

이즈음에서 공주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청전 선생에 대한 생각을 고쳐 가질 필요가 있다. 서울 사람으로 굳어버린 청전 선생의 인간과 그림을 우리의 것으로 찾아와야 한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 방면의 전문가들이나 실무자들의 몫이다. 그야말로 오늘날 우리는, 왜 우리에게 청전이 소중한 사람이며, 청전이 왜 공주 사람이어야 하며, 왜 청전의 그림이 공주의 그림이어야만 하는가 하는 것을 자문자답해야만 한다. 그래도 청전 선생이 공주와 무관한 인물이라고 고개를 돌리는 분이 있다면 청전 선생이 말년에 한숨 섞어 말했다는 다음과 같은 독백을 들어보시기 바란다.

󰡒나를 알아볼 사람도, 반겨줄 사람도 이미 없지만 죽기 전에 꼭 한번 찾아가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그런데 나는 어쩌다 이렇게 떠나지를 못하는 것인지 나도 알 수 없습니다.

▲설촌(雪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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