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파(靑坡) 이은구(李殷九) 도예가

▲청파(靑坡) 이은구(李殷九) 도예가.
지난 2009년 초여름, 줄장미와 창포꽃이 필 무렵, 같은 교회(공주중앙장로교회)에 다니는 최범수 장로한테서 전화가 왔다. 함께 갈 곳이 있다는 얘기였다. 약속된 장소에 나가보니 또 한분의 동행인이 있었다. 역시 같은 교회에 다니는 이용주 장로였다. 우리는 셋이서 최범수 장로가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이인면 오룡리란 곳으로 향했다. 오룡리는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몽진(蒙塵: 피난) 오셨던 인조 임금의 아드님인 숭선군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언젠가 그 묘소에 세워진 비석의 거북머리를 보기 위해 한번 갔던 기억이 있는 곳이다.

최범수 장로는 가면서 내내 우리가 왜 그 마을에 가는가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그 마을에는 전설적인 효자가 있는데 그 효자의 이야기를 아는 이가 있을까 해서 그것을 알아보려고 가는 참이라 했다. 효자 이야기라? 아름다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좀 부담스런 이야기가 효자 이야기이다. 그 날 우리는 마을을 돌고 이집 저집 다니며 사람들을 찾고 말을 걸어보았지만 최범수 장로가 알고자 하는 이야기를 확실하게 알고 증언해주는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다만 한 두 사람 만나긴 했으나 그들은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자기도 언젠가 들은 적이 있지만 확실히는 모르겠노란 대답일 뿐이었다.

오며 가며 동행한 두 분한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아주 오래 전 이 마을에 중학교 2학년에 다니는 소년이 살고 있었다 한다. 이 소년은 공부도 잘하고 심성이 곱고 행동거지도 바른 사람이었는데 그에게는 아직은 젊은 나이로 중병에 들어 앓고 있는 모친이 있었다 한다. 위로는 누나가 있었고 아래로는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었는데 모친의 병환은 어른들 말로는 주마담(走馬痰: 양성혈관암)이라는 것이었다. 전신의 여기저기에 달걀 크기만큼 한 부스럼이 생겨 끝내는 터지게 되고 거기서 고름이 흘러나오는 까다로운 질명이었다. 어떤 때는 놋대야로 고름을 받아낼 정도로 심했다 한다. 당시는 6․25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적당한 약이나 병원을 만날 수도 없는 시절이었다 한다. 어디서 누구한테선가 소년은 그런 병에는 사람의 살을 먹이면 나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한다. 오래 동안 혼자서 고민을 하던 소년은 어느 날,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던 남동생(이은호 씨)을 시켜 헛간에 꽂아 놓은 낫을 가져 오라 하여 자기의 허벅지 살을 얼만큼 도려내어 동생에게 주면서 절대로 사실을 비밀에 부치라고 부탁을 한 뒤, 그것을 누이에게 전하여 어머니에게 끓여드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년은 집을 나와 앞산 고개를 넘어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떠났다고 한다.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난다. 그 뒤 어머니는 정말로 병환이 나아(꼭 그 이유에서만 아니더라도) 63세까지(1086년도)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한다. 요즘 세상에 이런 일이 정말로 있을 수 있을까? 흔히 사람들은 공주를 효의 고장이라고 말한다. 이에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하나는 이복(李福)이란 인물의 이야기요, 또 하나는 향득(向得)이란 인물의 이야기이다. 이복은 고려 이전 인물로 집안이 가난하여 모시고 살던 모친에게 드리려고 공주시내에서 국 한 그릇을 얻어 가지고 오다가 󰡐국고개󰡑란 곳에서 넘어져 국이 땅바닥으로 쏟아져 엎드려 울었다는 사연을 담은 효자요(『신증동국여지승람』이란 책에 기록이 나옴), 향득(공주 사람들은 향덕(向德)이라고도 부른다)은 신라시대의 효자로 흉년이 심해 아버지가 거의 굶어 죽게 되자 자기 허벅지 살을 베어 고아드림으로 우리나라 역사책에 최초로 기록된 효자이다(『삼국유사』제 5권 孝善편). 정말로 오룡리의 그 소년이 그런 일을 했다면, 그것이 사실이라면 좀 무서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신라시대 향득이 다시 태어나 효행을 실천한 일이나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청파(靑坡) 이은구(李殷九) 작.
그 날 오룡리를 다녀온 뒤, 그 소년에 대해 이 사람 저 사람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알고 보니 그 소년은 아주 옛날 인물이 아니라 최근의 인물이었다. 나이도 나와 별반 차이가 없는 1943년 생(계미 생, 양띠)이었다. 이름은 이은구. 이름에 󰡐은󰡑자 돌림이 들어가니까 공주 토박이 성씨 가운데 하나인 전주 이 씨이고 현재는 경기도 이천에서 󰡐청파요󰡑를 운영하면서 자기를 만드는 이름난 도예가라는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언젠가 공주문화원에서 열린󰡐청파 도예전󰡑을 본 적이 있다. 거기서 아주 섬세하고 아름다운 도자기를 여러 점 보았다. 우리나라의 도예전통을 충실히 지키면서 현대적인 도예기법을 충분히 살려 만들어낸 지극히 아름답고 섬세한 도자기들이었다. 그러나 그 오룡리의 전설적인 소년과 청파 이은구 도예가가 하나의 인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지난 2월 중순경이다. 다시 최범수 장로한테서 전화가 왔다. 바로 그 이은구 도예가가 공주에 내려오니 만나보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연락을 취하여 공주 소학동의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그 자리엔 오룡리에 함께 갔었던 이용주 장로도 합석했다. 수인사를 마치고 바라본 이은구 도예가는 아주 맑은 인상의 인물이었다. 얼굴빛이 특히 맑아보였고 눈빛이 지극히 겸허하며 선해 보였다. 목소리도 크지 않으며 말씀도 자근자근 옆 사람조차 들릴 듯 말듯 했다. 무척 조용하고 사려 깊은 분이란 느낌이 대번에 왔다. 식사를 하면서 뜨문뜨문 그 옛날의 소년시절의 효행에 대해서 이야기가 돌자 도예가는 될수록 그 이야기를 회피하면서 말머리를 딴 곳으로 돌리곤 했다.

"집 아이들도 그 이야기를 자주 하지 말라 하고 자신의 생각도 그래서……"
도예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처음 만났을 때 가졌던 느낌이 결코 빗나가지 않았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그 뒤의 대화는 주로 예술과 도예 쪽으로 진행되어나갔다. 도예가는 초등학교 시절, 공주 동학사 아랫마을 도예마을 터로 소풍을 간 길에 거기서 도자기 조각을 보고 도예가가 되기로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런 뒤 대학생 시절 도예가 스승(曺東憲 선생)을 만나 도예기술을 사사하고, 그 뒤 1976년에 이천(경기도 이천군 이천읍 사음리 사기막골)에서 󰡐청파요(靑坡窯)󰡑를 설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한다. 그러면서 이천문화원장을 12년간이나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국내적으로 우선 알아주지만 국제적으로도 명성이 높아 일본과 미국에서 개인전을 연 바 있고, 특히 외국의 귀빈이 한국을 방문할 때 선물로 기증되기도 했다고 한다. (국가 원수 급으로 여러 사람이 있는데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 프랑스의 시라크 대통령, 일본 천황, 중국의 강택민 국가주석, 이붕 총리 등이라 한다.)

마련된 식사를 마치면서 사진을 한 장 찍겠다고 하면서 카메라를 들었다. 도예가는 아주 수줍은 듯 잔잔한 미소를 띠면서 카메라 렌즈를 똑바로 보지 않았다. 그의 직성이 양띠라 하니 양같이 순하다 할까. 아니면 조선소처럼 어질다 할까. 드물게 보는 맑고도 선한 인상이다. 마침 우리가 만나서 식사를 하고 있던 지역이 바로 그 신라의 효자 향득의 비석이 있는 곳과 멀지 않는 곳이었다. 역시 속의 효자 향득과 현실 속의 효자 이은구. 신라의 효자 향득이 살던 마을 가까운 곳에서 오늘의 효자 이은구 씨를 만나 그날 그렇게 시간을 보낸 일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만 같은 생각이다. 함께 만난 세 분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 차창으로 보니 향득이 자기 살을 베어 내어 씻을 때 시뻘겋게 피가 흘렀다 해서 󰡐혈흔천血痕川󰡑이라 불렀던 개울이 보였다. 어제의 일과 오늘의 일이 결코 멀지 않고 가까움을 다시금 느끼며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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