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걸 교수의 공산성 및 근현대유적 두번째 이야기

 ▲공주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및 시민들이 지수걸 교수의 공산성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성벽을 오르고 있다.
조선왕조 시기 주요한 나루
… 장깃대나루    지수걸 교수의 공주의 근현대사 두 번째 이야기로 ‘금강 물길과 배다리 철다리’ ‘공주 관문(關文)의 변화’ ‘성 공원 내 공북루 이야기’ ‘성안마을과 공주갑부 김갑순’ 등을 시작한다.

공주는 고개를 넘거나 나루를 건너지 않으면 진입할 수 없는 분지형 도시이다. 따라서 공주의 도시역사를 잘 알려면 금강 물길(포구와 나루)의 역사를 잘 알아야 한다.

지수걸 교수에 따르면, 백제시기 주요 포구는 웅진포구와 나루였으며, 조선왕조 시기 주요한 나루는 장깃대나루(옥룡동 파출소 인근)였다.

일제는 강점 직후 충남도청 소재지인 공주를 중심으로 충남지역 9개 도시를 잇는 방사선형 도로망을 구축했다. 1910년대 중반경 공주대로 북단에 ‘배다리’를 건설한 것도 승합차를 운행하기 위해서였다. 선박 운행 편의를 위해 매일 정기적으로 한 번씩 배다리를 열었다.

 ▲철다리 부근에 가설됐던 배다리가 4대강 사업으로 흔적이 사라지고 말았다.
“4대강 사업으로 배다리 흔적 사라져
···보존해야”    지 교수는 “일제시기 현재의 위치에 금강교, 즉 배다리(1910년대 중반 갈수기 때만 가설해 사용함)와 철다리(1933년 충남도청 이전 보상물)가 만들어 지면서 공주의 교통체계는 나루보다 다리를 중심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며 “4대강 사업으로 배다리 흔적이 사라지고 말았다. 독특한 근현대 유적이므로 보존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현재 위치에 금강교가 건설되면서 공주의 관문이 바뀌고 산성동 지역과 공주형무소가 있던 교동 일대의 개발이 가속화 됐다”며 “조선왕조 시기 이 일대는 산성과 군영, 감옥, 피천마을(백정촌), 사형장, 공동묘지 등 도시 혐오시설이 입지해 있어 사람보단 귀신들이 더 많이 살던 곳 이었다”고 피력했다.

특히 1937년 산성시장이 설립되고 1938년 제민천 제방이 완성되기 전 큰 사거리 이북쪽의 논들은 홍수 때마다 물에 잠겼다는 것이다.

▲활짝 핀 작약이 공북루와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공북루···경치 좋아
연희공간으로 자주 이용    지 교수는 “공산성 북문 누각인 공북루는 경치가 좋아 예부터 연희공간으로 자주 이용됐으며, 누각에 시문(詩文)이 많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며 “구한말 일제시기에도 이곳에서 지역유지들의 시회(詩會·친목회)가 자주 열렸다. 예전에는 누각 옆에 ‘월파당’이라는 방이 딸려 있었는데 해방 이후 붕괴됐다”고 했다.

구전에 따르면 성안마을 언저리에 ‘새장터’라 불리던 곳이 있었는데, 이는 포구를 통해 들어온 바닷물건이 교환되던 비상설 장터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성안마을과 공북루. 공북루에서 답사 참가자들이 지수걸 교수의 설명을 듣고 있다.
성안마을과 공주갑부
김갑순 이야기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후 갑오을미개혁이 진행되던 때 읍성, 산성, 군영 등이 모두 폐지됐으며, 1895년 폐영(廢營)이후 공산성 군영터에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성안마을이며 구한말 공주 산성리는 다른 곳의 지명이다.

특히 공주갑부 김갑순은 군영시설(목재)을 재활용해 군영터에 4천여석의 나락을 보관할 수 있는 5채의 창고를 지었으며, 부속 건물(기와집) 한 채는 리모델링해 작은집으로 활용했다.

군영터에 있던 후락정(後樂亭) 현판이 계룡면 구황리 소재 김갑순의 제실에 한동안 걸려있었는데, 김갑순은 재실을 지을 때도 금강대도(金剛大道) 건물의 목재를 재활용했다.

김갑순은 공산성내 군영시설을 헐어내고 남은 목재로 현재의 광복루(光復樓) 자리에 웅심각(雄心閣)이라는 누각을 지었으며, 해방후 김구가 공주와 마곡사를 방문했을 때(1964년 4월) 그 이름을 광복루로 바꿨다.

지 교수는 “광복루 앞쪽에는 2000년대 초반까지 마을이 존재했으며, 1960년대에는 100여세대가 이곳에 몰려 살았다”며 “백제민속촌 건설을 빌미로 마을을 철거할 때 모두 53호가 보상금을 받고 쫒겨났다. 이와 동시에 성안마을 100년 역사는 역사의 뒤안길에 묻히고 말았다”며 아쉬워 했다.

성안마을에는 토지가 거의 없어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뱃일(선부)과 마차(마부) 일 아니면 여러 가지 막노동을 하며 살았다. 한국전쟁으로 금강철교가 파괴된 후 다리 인근에 나루터가 형성되면서 성안마을 사람들은 1955년 다리가 재개통되기까지 ‘뱃일’로 재미를 많이 봤다고 한다.

 ▲공북루에서 지수걸 교수의 설명을 듣고 있는 답사 참가자들.
 ▲공북루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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