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고학자 우재(愚齋) 안승주(安承周) 선생

 ▲안승주 박사의 생전 모습.
1. 한 권의 책이 주는 감동
얼마 전 우리 문화원 이사이며 공주대학교 교수인 이해준 교수로부터 책 한권을 받았다. 『백제를 꿈꾸며』. ‘우재 안승주 박사 추모문집’이란 부제를 달고 있었다. 더러 이런 종류의 책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공주가 아닌 서울권에서 나온 책이었고 또 예술계 쪽 사람들 책이 주로 많았던 기억이다. 공주란 지역의 인물, 그것도 사학을 전공한 분의 추모문집을 본 기억이 없지 싶다.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도 특별했지만 책의 대상인 인물도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머리말에서 역시 우리 문화원 이사이며 공주대학교 교수인 윤용혁 교수는 책을 낸 의도에 대해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재 안승주 선생님께서 세상을 뜨신 지 꼭 10년이 되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처럼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러나 10년 전은 물론 선생님을 뵈었던 20년, 30년 전의 일도 우리에게는 아직 선명한, 살아있는 과거다.
― 윤용혁, 「머리말」

‘살아있는 과거’라? 참 의미심장한, 좋은 말씀이다. 그래서 제자와 지인들이 모여 당초는 ‘논문 모음집과 학술 세미나 개최’ 등을 생각해 보았으나 평소 가깝게 지내던 인사들이 모여 ‘추억의 저녁을 조촐하게 함께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다수의 의견에 따라 추억담을 글로 쓰고 책으로 내기로 하여 이 책이 나오게 되었노라는 사연이었다.

책은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과 2장은 우선 안승주 선생의 글이다. 1장은 비교적 무게가 있는 소논문 형태의 글이고 2장은 가벼운 저널 쪽이나 행사의 식사 같은 글을 모아놓고 있다. 그리고 2부는 직접 선생으로부터 대학에서 사학을 공부하고 그 방면에서 일하는 분들(김정수, 서정석, 양종국, 유장근, 윤용혁, 이귀영, 이남석, 이해준, 이현숙, 이훈, 홍순승)의 글을 모았고, 3부는 동료거나 제자이긴 해도 뒷날 동료가 된 분들(곽종흠, 김병기, 김용무, 김진두, 변우열, 신채식, 이필영, 정하현, 조동길, 조재훈, 최석원, 최덕수)의 글을 모았고, 마지막 5장에서는 학계에서 만난 분들이거나 동료, 고향 후배, 일본인 학자들(박영복, 박용진, 이융조, 이호형, 임영수, 조유전, 정재훈, 니시타니 타다시, 도다 유지)의 글을 실었으며 맨 마지막 자리에 사모님의 글 한편을 올리고 있다.

인물은 비록 가고 없지만 그 뒷자리가 참 향기롭다. 비어 있지만 결코 비어 있지 않다는 느낌이다. 뒤에 남은 사람들의 회고의 글도 편편이 진실되고 아름답다. 이는 누구나 가능한 일이 아니다. 회고의 주인공 입장으로 보아 살았을 때 잘 산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다. 살면서 많은 영향을 주고 좋은 기억을 많이 남겨준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다. 보기 드문 일이다. 인간다운 일이고 본받을 일이고 자랑할 만한 일이다. 감동스런 일이다. 이런 경우만 살펴도 우리 공주가 얼마나 품격이 높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고장인가 하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2. 안승주라는 인물
안승주 선생이 누구신가?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사이, 공주지역에서 전국적으로 가장 이름이 높았던 학자요 대학의 총장이었던 분이다. 잠시 그분의 연보를 살피면, 선생은 1936년 충남 연기군 금남면 대박리 331번지에서 출생하여 고향마을에서 성장,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주 봉황중학교를 거쳐 공주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이른바 ‘공주 사람’으로 편입하게 된다. 그 뒤 선생은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공부하고 다시 공주로 돌아와 공주 영명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공주사대부고 교사, 공주사범대학 교수가 된다. 그로부터 선생은 세상을 뜰 때까지 오로지 대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공주지역의 문화재 발굴에 전심전력하여 이 고장의 고고학 분야에 푸른 기를 세운다.

선생이 고고학적 노력을 기울이고 문화재에 대하여 연구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일반인들의 인식은 물론이요 교육계나 학계에서도 백제 문화재에 대한 평가는 바닥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선생이 직접 기록한 자료에서도 나타나는 바이다.

오랫동안 소외 당해왔던 공주의 백제유적들이 조금씩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문화재를 통한 민족의식을 앙양하는 교육이 고창(高唱)되기 시작할 무렵부터였다. 당시 중학교 교과서 11종 중에서 공주의 백제유적에 대해 취급한 책이 한권도 없을 정도로 공주는 백제 도읍 중에서도 더욱 망각의 지대로 화(化)해 있었던 것이다.
― 안승주, 「무령왕릉 발굴여화」(『백제를 꿈꾸며』, 책 P.79)

선생은 대학원 학위논문(1968년)조차 ‘공주 시목동 고분 조사’를 대상으로 할 정도로 우리 고장 문화재에 대해 뜨거운 애정을 가지고 당신의 학문을 출발시켰다. <당시 공주에는 풍부한 백제문화 유산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유적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공주를 기반으로 이를 연구하는 작업은 지역적으로 매우 절실한 요구였다. 아직 ‘고고학’이 일반화되기 전의 일이었다.>(윤용혁 교수의 글, 책 P.147). 다행히 공주에는 고고학과 백제 문화재에 관심과 열성을 지닌 두 분의 인물이 더 있었으니 한 분은 당시 공주박물관장으로 있던 김영배 선생이고 또 한분은 공주교육대학 교수였던 박용진 선생이었다. 이들은 자칭 ‘공주 트리오’를 형성하여 공주의 산하를 발로 누비고 다니며 문화재를 찾아다녔다.

그리하여 그 이후에 놀랄만한 발굴사업이 속속 학계에 보고되게 된다. 1969년 2차에 걸친 서혈사지 발굴, 1971년 무령왕릉의 발굴. 1974년 부여 초촌면 송국리의 청동기시대 석곽묘 발굴, 1979년 공주 웅진동 고분 발굴, 1980년 공산성 발굴 등. 이들은 김영배 관장과 박용진 교수의 도움을 받아 안승주 선생이 주역이 되어 해낸 주요 발굴의 항목들이다. 특히, 1971년의 무령왕릉의 발굴은 안승주 선생의 ‘학문적 여정에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는 발굴이었다. 이로서 삼불(三佛) 김원용(金元龍) 박사를 비롯한 중앙 학자들과의 교분의 길이 열렸으며 학자로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 선생 자신도 ‘백제 고고학 연구에 대한 자신감과 함께 학문적 안목도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그야말로 백제 고분박사의 면모가 완성된 것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성과는 송국리의 청동기 유물의 발굴이다. 여기에서 한국에서는 최초로 완벽한 형태의 비파형 동검을 비롯한 청동기 유물이 다량 출토된 것이다. 그리고 또 중요한 발굴은 1980년부터 장기간 진행된 공산성 유적 발굴이다. 이 발굴을 통해 만하루가 밝혀지고 쌍수정 광장의 대형 지하 석조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공주의 굵직한 문화재 발굴 가운데 선생의 손길이 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고 주변사람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안승주 선생이야말로 백제 문화재에 관한 한 노련하면서도 집요한 보물찾기 선수였다는 생각을 해본다. 일단 옛 조상들은 아름답고도 귀한 문화재를 만들어 땅속 깊숙이 숨겨놓는다. 수천 년 동안 아무도 그것을 찾아내지 못한다. 그런데 안승주란 이 시대의 탁월한 한 인물이 나타나 그것을 차례차례 찾아내어 세상에 드러내고 빛을 보게 하고 의미부여를 한다. 이야말로 하나의 재미있는 게임이 아니고 무엇이랴. 시대가 안승주 선생을 부른 것이다. 공주가, 공주의 문화재가 안승주 선생을 필요로 한 것이다. 뿐더러 선생 자신이 또 공주를 필요로 하고 요구한 것이다. 이리하여 공주와 안승주 선생은 일방통행이 아닌 상보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고 끝내 상호 완성을 이루게 되었다고 보아진다.

안승주 선생의 연보를 살필 때 성년이 되고 교직생활을 하면서 선생의 생애는 대략 두 단락으로 구별되는 듯하다. 전반부가 오직 고고학 연구에 몰두하면서 학자로서만 산 기간이다. 선생은 1968년, 32세의 나이에 공주사범대학의 교수가 된다. 그로부터 1987년까지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선생은 오로지 학문연구와 제자 육성과 발굴사업에만 몰두하며 산다. 어떻게 보며 대학교수로서 학자로서 본질적이면서 핵심적인 삶을 유지한 기간이다. 80년대 초반엔 대학의 주요보직(교무과장)에 관여할 것을 요청받았으나 핑계를 대어 피하기도 했다고 한다. 비민주적이면서 혼란한 시대 속에서 학문연구 이외의 보직을 맡고 싶지 않은 선생의 판단이 그렇게 하도록 했다는 것이다(사모님 도순성 여사 증언). 그러나 당신의 전공 분야와 관련이 있는 분야의 보직(예를 들어 1978년부터 1982년까지 맡아온 공주사범대학 박물관장 겸 백제문화연구소장)은 마다하지 않고 맡았다고 한다(역시 사모님 증언).

그러나 50대 장년의 나이에 이르며 선생은 1987년 공주사범대학 대학교수협의회 의장직을 맡는다. 교수 직선인데 민주화 바람의 열기 속에 일어난 새로운 변화였다. 이로부터 선생의 삶의 패턴이 달라진다. 이어서 1990년의 직선제에 의한 공주사범대학장 당선. 이 때 종합대학으로 가는 과도기의 기틀을 다지고 내친걸음, 1991년 공주대학교 총장 선거에 당선. 그리하여 안승주 선생은 공주대학교 초대 총장에 취임한다. 지난 날 김영배 공주박물관장, 박용진 교수와 더불어 공주의 산하를 헤매며 땅 속에 묻힌 문화재를 찾던 발로 뛰는 학자로부터는 격세지감이 드는 삶의 형태가 된 것이다.

그 사이, 전국적인 모임의 수장이 되기도 한다. 1989년 한국 대학박물관협의회 회장, 1991년 한국고대학회 회장이 그것이다. 뿐더러 선생은 수차에 걸쳐 전국단위의 학술행사를 유치하고 주관하기도 한다. 대학 총장의 임기를 마친 뒤에는 충남발전연구소장에 취임하기도 한다. 이는 1995년의 일로 교수직을 유지하면서 맡은 자리인데 임기는 3년. 학문적 능력과 행정적 능력을 겸비한 인사를 요구하는 자리였기에 선생에게로 자연스럽게 낙점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생은 연구소장의 임기가 만료되는 1998년 6월 30일에 조금 못 미치는 날인 1998년 6월 23일 새벽에 세상을 뜨게 된다. 서울아산병원에서였다. 집 나이로 쳐서 63세. 만으로는 62세. 대학교수의 정년도 채우지 못한 아까운 나이였다. 신기하게도 선생의 생일이 음력으로 6월 23일인데 세상을 뜬 날은 양력으로 6월 23일이었다고 한다. 우연 치고서는 묘한 우연이었다 하겠다.

3. 회고를 통해서 본 안승주 선생
나는 안승주 선생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고향이 같은 것도 아니고 학교나 직장의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같은 교직에 머물었지만 그분은 중등학교 내지는 대학이었고 나는 초등학교였기에 더욱 뜰 수밖에는 없는 일이었다. 나이 차이도 9년 연상이니 어떤 고리로도 연결되는 바가 없었다. 다만 선생의 생전에 먼발치로 뵈온 일이 있다. 이쪽에서는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선생 쪽에선 전혀 내가 미지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생에 대한 세세한 알음알이는 인쇄자료로 밖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해서 이 글은 한권의 책을 읽고 난 독후감 수준에 머물 수밖에는 없는 일이겠다.

필자 나름대로 유의미하다고 여겨지는 문장들에 방점을 주면서 읽어보았다. 대략 인간으로서의 면모, 학자로서의 면모, 스승으로서의 면모, 행정가로서의 면모로 갈래를 나누어 정리해보면 이러하다.

첫째, 인간적인 면으로 고인을 회고한 말들을 종합해보면 ‘선이 굵은 분, 인간적이면서 꾸밈없는 생활, 최선을 다해 진력하여 일을 이루는 집념, 패기, 너그러움, 세심함, 불꽃같은 치열한 사람, 따뜻한 사람, 바른 사람, 싱긋 웃는 특유의 모습, 군자형, 너그러운 인간미, 호탕한 웃음, 거인다운 풍모, 따뜻한 미소, 솔직 담백, 부드러움, 의리, 생각이 다른 사람을 포용하는 국량, 소탈, 생각이 넓고 크신 분, 온화한 미소, 순진한 표정’ 등으로 집약된다. 일단 큰 외모에 통이 크고 선이 굵은 행동형의 한 남성이 떠오른다. 그런데도 그는 내면적으로 세심함과 부드러움과 온화함 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전형적인 한국의 부성상의 표상으로 보인다.

그 다음으로, 학자로서의 면모를 살피면 ‘정력적인 활동, 백제 고고학의 선봉, 후학에게의 귀감, 백제문화 연구가로서 전국적 명성, 백제사 분야의 최고의 권위자, 학문적으로 복이 많은 사람, 용기와 자신을 가진 사람, 백제고분과 토기 연구의 기본 제공에 공헌한 사람, 백제 연구의 일인자’ 등으로 요약된다. 안 선생은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백제 문화재의 연구에 한국학자로서 첫발을 디딘 장본인으로서 이론과 실제를 겸비하여 그 꽃을 피운 장본인이다. 이 정도면 학자로서도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고 찬사를 받은 셈이다.

셋째로, 스승으로서의 안 선생에 대한 회고를 살피면 ‘개인적인 배려와 도움을 준 선생님, 백제미술사에 온갖 정렬을 쏟은 교수님, 엄하면서 지극히 인간적이고 꾸밈없고 솔직한 면모를 보여주는 스승, 학문의 바탕뿐만 아니라 인생의 본보기가 되어 주신 선생님, 부모보다 아껴주시고 앞날을 걱정해준 스승, 새로 지은 집의 방까지 제자에게 설계하라 한 스승, 친자식처럼 배려하고 아껴주신 스승,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몰입하게 강의, 강직하면서도 엄격한 분, 섬세한 지도, 관후한 성품과 제자 사랑, 부드럽고 자상하면서도 근엄한 모습’ 등으로 나타난다. 이는 최고의 선생님에 대한 최상의 상찬이다. 인간으로서나 학자로서의 면모에 빠지지 않게 스승으로서의 면모에서도 안 선생은 최상의 점수를 얻어내고 있음을 본다. 참으로 인자하면서도 엄격하고 세심한 이 땅의 한 스승상을 보게 된다.

마지막으로,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살피면 ‘현장의 고민을 함께 하는 사람, 폭넓은 인간관계, 필요한 물자지원의 획득 능력, 참모진에 대한 소신 있는 업무 추진 존중, 민주적이면서 사심 없는 단체 운영, 특유의 카리스마, 자율과 부드러움, 넓은 도량과 긍정적 인생관, 후덕함, 정치력, 물 흐르듯 한 관계 맺음, 동료에 대한 티 나지 않는 배려' 등으로 나타난다. 이 또한 보통의 장점이 아니다. 전문 행정가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조건을 고루 갖추었다 하겠다.

이상의 모든 사항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안승주 선생이란 분은 용량이 무척이나 큰 인물로 읽혀진다. 또한 단일한 성품이 아니라 복합적 성품을 지닌 인간으로 파악된다. 그렇다고 상호 모순되거나 이중적인 잣대를 가진 인물이란 말은 아니다. 충돌할 것 같지만 묘한 선에서 조화를 이룬 인성, 결론적으로 말해 군계일학과 같은 인간, 남자 가운데서도 오직 남자 같은 인물의 표상이었다 할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날 제자나 동료들이 그토록 한결 같이 선생의 부재(不在)를 안타까워하고 아쉬워하겠지 싶다.

4. 멈추지 않는 생애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는 점은 정신이 있다는 점이고 문화가 있다는 점이다. 정신과 문화에 의해서만 인간은 인간다워질 수 있다. 유한한 인간의 생명체는 어느 시점에서 끝이 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육체적 생명이 끝난 뒤에도 인간은 완전히 그 존재가 소멸되지 않는다. 죽지 않고 살아간다. 역시 정신과 문화가 하는 일이다. 허지만 누구나 평균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개인차가 있다. 개인에 따라 보다 더 긴 육체적 생명의 종언 이후의 문화적 정신적 생명력이 유지되는 경우가 있겠고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겠다. 문제는 생존해 있을 당시 얼마나 그가 정신적 문화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위에 끼쳤느냐에 있다. 노력과 영향력 여하에 따라 뒤에 남은 사람들에 의해 그의 생명은 유지되고 발전되어 나간다.

그러기에 인간은 생애 가운데 어느 한 단계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단계가 중요하고 특히 죽음의 순간을 잘 맞이할 필요가 있다. 죽음의 과정도 하나의 진화요 성장과정이다. 죽음의 과정은 한 인간의 일생을 마치는 매듭이고 또 완성하는 단계이다. 아무리 그의 일생이 충실하고 훌륭한 것이었다 해도 죽음의 순간과 그 과정이 잘못되면 전체가 흔들리도록 되어 있다. 이는 영화의 라스트 신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되는 문제이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영화라 해도 라스트 신이 좋지 않으면 영화 전편이 나쁜 것으로 되어버리고 만다. 이처럼 인간의 생애도 라스트 신이 중요하고 오히려 라스트 신 이후의 공백이 중요하다. 누군가 도와서 완성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가족이나 이웃, 친지, 후학의 도움이 여기에 있어야 한다.

오가는 이야기가 있겠지만 안승주 선생은 일생을 아주 잘 사신 분이다. 열정과 진정성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타고난 여러 가지 조건이 좋았고 시대를 잘 만났다. 더불어 어울려 산 사람들도 좋은 사람이 많았다. 그러기에 사후에 이렇게 향기로운 자취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 고장 고고학 연구와 백제문화 연구에 있어 안승주 선생은 첫 번째 샘물을 파고 도랑일 길게 낸 원류에 해당된다. 그의 흐름은 한동안 깊고도 맑고 세찼었다. 그러나 안 선생이 이룩한 강물은 그의 육체적 소멸과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한번 시작된 흐름은 관성을 받도록 되어 있다. 오늘날 공주지역에서는 안 선생이 파논 강물에 잇대어 흐르는 여러 갈래의 강물을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 그가 생전에 정성을 다해 길러낸 제자들이다. 그들은 오늘도 대학 강단에서 연구소에서 박물관에서 스승의 강물을 이어 여러 갈래의 강물로 나뉘어 흐르고 있다. 비록 안승주란 인물은 지상에서 그 생명을 다했지만 안승주의 정신과 문화는 계속 살아서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이게 다 안승주 선생이 생전에 뿌려놓은 씨앗의 싹틈과 자람이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그저 아무렇게나 것이 별로 없다. 씨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다. 원인 이 있어야 결과가 있는 것이다. 신관동의 아파트로 사모님을 찾아가 만났을 때 사모님은 당신의 남편께서 제자를 잘 두었고 사람들을 잘 만났다고 하면서 인덕이 많은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그런 오늘날의 모든 현상들이 선생이 생전에 이미 이룩해놓은 결과들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끝나도 끝나지 않는 한 사람의 생애를 보고 있다.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하면서 완성되어가는 한 사람의 생애의 표본을 보고 있다. 안승주란 한 사람의 인생과 생명 종언 이후의 또 다른 삶. 참으로 크고도 환하다. 그의 생애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성장하고 완성되고 보완되어 나갈 것으로 보인다. 두루 아름다운 일이고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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