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춘당한의원 1대 원장, 문중대 선생

▲연춘당한의원 문중대 1대 원장
언제부턴가 공주 구시가지 중심부분. 제민천 반죽교 다리 건너편, 공주우체국과 공주문화원 사거리 한 모서리에 한의원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앞으로 옛날 공주읍사무소 건물(지금의 ‘디자인 카페’)과 공주경찰서(지금의 ‘공주시 청소년 문화 센터’)가 건너다보이는 자리다. 한의원 이름은 ‘연춘당한의원.’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만나는 한의사 선생님은 언제 뵈어도 온후하고 인자한 인상을 가진 분이었다. 늘 해밝은 창문 쪽에서 손님을 맞았던 것 같다. 나직하고 둥그렇고 울림 있는 목소리. 말씀도 나직나직하니 조용했다. 그러나 기품이 있고 상대방이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위엄이 느껴졌다.

진맥하는 손길이 매우 부드럽고 정성스러웠을 것이다. 약값이 또 비싸지 않았다. 그래서 드나드는 손님이 많았다. 공주시내 사람뿐 아니라 멀리 사는 사람들까지도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았다. 나도 물론 손님 가운데 한 사람. 한의사 선생님은 늘 진맥을 하고 나서는 나더러 허열(虛熱)이 있다는 말씀과 함께 자기가 타고난 몸의 능력〔原力〕보다 더 많은 힘을 사용하면서 사는 체질이란 진단을 내놓곤 했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방송통신대학을 거쳐 교육대학원을 다니며 허덕대던 시절이었지 싶다.

이 분이 바로 연강(延岡) 문중대(文重大) 선생이다. 선생은 공주 태생이 아니다. 1919년(음력 1월 7일) 황해도 연백군 봉서면에서 부친 문윤우(文潤祐, 호 恥齋) 씨와 모친 정복순(鄭福順) 여사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인 문윤우 선생은 당대의 한학자로 후학을 가르치며 농사를 짓는 분으로 효성이 지극한 분이었다. ‘모친이 병환으로 등창이 심하자 입으로 고름을 빨아 완치케 하고, 부친이 작고하자 삼년 상중에는 엄동설한에도 항상 윗목 냉돌에서 자고 평소 부친의 자리였던 따뜻한 아랫목엔 자지 않았으며 3년간 묘 옆에 묘막을 지어 거처하면서 봉양을 드리니, 손과 발, 무릎이 닿는 자리는 잔디가 자라지 않았다고 한다.’(<반향 공주 문화 소식지>, 1998년 10월호 참조)

그래서 이러한 효행이 <연백군지(延白郡誌)>에 소상히 기록 바 되었고, 연백군에서 ‘문효자(文孝子)’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뿐더러 선생은 항일 정신에도 투철하여 당시 징용에 끌려갈 위기에 3년 동안 벙어리 행세를 하여 수모의 기회를 모면했다고 한다.

옛말에 ‘효자 집안에 효자 나고 충신 집안에 충신 난다.’는 말이 있다. 이러한 부친 아래서 지란 아드님은 또 어떠했을까? 문중대 선생 역시 효심이 지극한 분으로 부모님 살아생전 한 차례도 그 말씀을 어긴 적이 없었고, 부친이 노환으로 와병 중에는 부친 옆에서 잠을 자면서 부친의 손과 자신의 손을 끈으로 연결, 부친의 몸 상태를 살폈다 한다. 부인 고분임(高粉任) 여사 역시 남편을 좆아 효심이 깊어 신관동에 기거하시던 시부모님에게 매일 따뜻한 식사를 거르지 않고 날라 드렸다 한다. 이러한 양주(兩主)의 효행이 알려져 부부가 효자, 효부 상을 나란히 받은 바 있다고 한다. 과연 효자 집안에 효자 난다는 말이 허언(虛言)이 아님을 증명하는 사례라 하겠다.

선생이 고향을 떠난 것은 1942년, 24세 때의 일로 충남 논산에 거처를 정하고 부친의 소망에 따라 한의업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본성이 인자하고 온후한 선생은 논산에서 살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베푼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절은 일제 말기에서부터 광복의 공간. 그리고 6․25 전쟁 전후. 너 나 없이 궁핍하고 살기 어렵던 때. 이런 시절을 맞아 선생은 춥고 배고프고 헐벗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의 손길을 아끼지 않았다.

셋째 아드님(현 연춘당한의원의 문형권 원장)의 회고에 의하면 “매일 아침마다 밥을 지어 논산 시내 걸인들에게 식사 제공을 했고, 당신의 생신 날 같은 때에도 특별한 음식을 만드는 걸 말리시고 그 돈으로 역시 걸인들을 모아 음식접대를 했다.”고 한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런 일을 누가 시킨다고 해서 하겠는가.

선생이 공주로 거처를 옮긴 것은 1962년. 현재의 연춘당한의원 자리에 같은 이름으로 한의원을 열고 공주 사람들을 치료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선생은 인술 또한 그 인품만큼이나 온후하고 인자하여 사람의 병을 잘 다스려주는 것으로 호남 일대에 소문이 널리 퍼져, 명의로 칭송을 받기에 이르렀다. 의술이 뛰어나니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니 재화가 모임은 자연스러운 귀결.

그러나 선생은 자신의 치부(致富) 보다는 이웃과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지향했다. 소문을 내지 않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기부의 정신을 실천한 것이다. 기부(寄附, donation). 동서고금을 통해 그것은 가장 귀한 인간의 덕목 가운데 하나다. 자기가 가진 것 가운데 넘치는 부분을 덜어 다른 사람을 위해 쓴다는 것. 두고두고 칭송받아 마땅한 일이다.

선생이 생전에 실천한 기부의 미담에 대해서는 일일이 거론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당신이 마련한 농토에서 농사를 지어 추수가 끝나면 먼저 공주시에서 추천하는 어려운 몇 백 세대에의 가정에 쌀을 전하기를 30여 년 동안 계속했으며, 관내 노인회관 10여 곳에 동절기에 연탄을 희사한 일, 몇 군데 기관(반죽동노인회관, 봉황동사무소, 신관동파출소, 공주라이온스클럽회관)의 신축건물 부지를 희사한 일 등이 그것이다.

그런 가운데 선생이 가장 관심을 기울여 재산을 희사한 분야는 장학 사업이다. 수십 년에 걸쳐 남모르게 불우학생에게 장학금을 수여한 일은 물론이거니와 공주지구 라이온스클럽 장학재단 설립 당시, 막대한 금액(19***년 당시 1억 원)을 희사하기도 했다. 해서, 주위에서는 선생의 호를 따서 ‘연강장학재단’을 권유했으나 선생은 그러한 사적인 명예를 거부하는 단호함을 보였다.

일상생활 가운데 선생의 근검절약은 또 대단했다고 전한다. 사회에 환원하는 자금을 동원함에도 수십 개의 통장에 조금씩 돈을 불입하여 마련했고 물건 아껴 쓰기를 몸소 실천한 분이었다. 겨울철에도 난방을 거의 하지 않은 서늘한 방에서 기거했고, 평소 약주를 자시지 않음을 물론 담배를 피우지 않았으며 심지어 신문에 딸려온 광고지를 모아 그 이면을 메모지로 활용할 정도라 했다.

그런가 하면 의료행위를 쉬는 틈틈이 의학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을 뿐더러, 공주의 문사들과 함께 조직한 ***사에 자주 나가 한시 짓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시인이기도 했다. 이렇게 지은 시들을 모아 1980년, 선생의 회갑일에 자손들이 『延岡壽宴詩集』을 출간해드린 바도 있다.

이러한 어른의 송덕비가 세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 1994년 선생의 고귀한 봉사정신을 기리기 위해 공주사람들이 뜻을 모아 공주시 신관동(신관파출소 옆)에 ‘연강 문중대 선생 송덕비’가 세워졌다. (현재 이 송덕비는 옥룡동 한전 건물 옆으로 이전되었다.) 송덕비뿐만 아니라 선생에게 수없이 많은 상찬의 기회가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대통령 표창, 장관과 도지사로부터 각종 표창장, 공로상, 감사장 100여회) 선생은 1993년(음력 7월 5일) 별세하여 공주시 의당면 원곡리 선영하에 묻히셨다.

한 사람이 복을 지으면 후손이 그 복을 받도록 되어 있다. 선생의 이러한 선행과 세상을 두루 이롭게 한 그야말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은 고장에서 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까지 축복이 되어 흐르고 있다. 선생의 장남인 형익(亨益) 씨는 대전한방병원 원장을 지낸 석학이고, 차남인 형진(亨振) 씨는 서울에서 출판업을 운영하는 사업가이며, 삼남 형권(亨權) 씨는 부친의 가업을 이어 오늘날 연춘당한의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듣기로 선생은 남평문씨(南平文氏)의 후예로 멀리 고려조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시초인 충숙공(忠肅公) 문극겸(文克謙) 선생의 29대 손이며 그 사이에 목화의 전래로 유명한 문익점(文益漸) 선생도 20대조가 된다고 한다. 역식 명문가 집안의 후예답다.

오늘날 충숙공 문극겸 선생의 사우(祠宇) 고간원(叩諫院)이 우리 공주시 유구읍 추계리에 전한다. 어쩌면 선생이 공주로 삶의 근거지를 옮긴 것은 이러한 선조의 옛 자취를 찾아 그리 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한다. 어쨌든 지난날의 한때 우리 공주 땅에 문중대 선생 같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진정으로 실천한 어른이 사셨다는 것은 공주 사람으로서 매우 가슴 뿌듯한 일이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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