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김정섭 (전 청와대 부대변인, 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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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우리 주변에 항상 있었던 건물이 갑자기 없어진 것을 보면, 가슴이 철렁한다. 친근한 공간환경이 급격히 바뀌는 것은 삶에 불안감을 준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환경은 그 자체로 내 삶의 일부이다. 주거환경은 곧 행복의 기본요건이 된다.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의 물결은 주거문제를 야기했다. 주택 부족과 집값 폭등이 나라의 제일 큰 과제였던 때가 있었다. 1988년부터 정부는 200만 호 아파트 건설을 추진해 일산, 분당, 평촌 같은 ‘베드타운형’ 신도시가 생겼다. 주택난과 함께 주거의 질 문제도 제기되었다. 2002년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은 왕십리, 은평, 길음 등 총 34개 낙후지역을 뉴타운 지구로 재개발을 추진했다. 2006년 지방선거, 2008년 국회의원선거는 ‘뉴타운 선거’라고 불릴 정도로 개발공약이 횡행했다.

하지만 오래된 동네들을 전면 철거하는 뉴타운 정책은 주거 약자가 아닌 강자들, 즉 대자본을 위한 사업으로 진행되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무상급식, 보육, 사회적 일자리 등 사람과 복지에 대한 담론이 중요한 투표기준으로 작용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올해 대통령선거에서 문재인 후보는 ‘도시재생 뉴딜’ 사업을 통해 주거복지와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공약했다. 매년 10조 원의 공적 재원을 투입해 1년에 100개 동네씩 구도심과 노후 주거지를 살 만한 곳으로 바꾸겠다는 구상이다. 도시재생사업은 시대 상황과도 부합한다. 한국경제는 장기 저성장 시대에 진입했다. 그동안 성장을 이끌어온 동력이 소진되고 새로운 동력을 창출하지 못하면서 경제의 활력이 크게 둔화되었다. 경제 호황기에 여유자금을 갖고 시행하던 대단위 부동산 개발사업은 힘들게 되었다.

사실 그동안 재개발사업은 건물이 가장 낡고 주거환경이 제일 열악한 곳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가장 돈이 되는 곳, 이른바 사업성이 큰 순서로 추진되었다. 대규모 재개발이 이뤄지자 정작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은 떠나야 했다. 소중한 추억은 지워졌고 동네는 해체되고 주민들은 갈등하고 분열했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재개발이었던가? 낙후된 지역을 재생시켰더니 임대료가 올라 원주민과 상권을 개척한 이들이 쫓겨나는 현상을 일컫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은 이러한 부작용을 상징한다.

얼마 전 찾아가본 서울 성북구의 도성마을(장수마을)은 산비탈에 게딱지같이 붙은 달동네였다. 주거의 질이 낮지만 떠날 수도 없는 저소득층 주민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낡은 주택을 개축하고 좁고 어두운 골목길을 넓고 밝게 만들었다. 작은 경로당, 공동작업장 등을 꾸며 주민들이 평생 이곳에서 살아야겠다는 충족감을 주었다.

이처럼 저성장과 인구감소 시대의 도시재생정책이 중시해야 할 것은 규모나 속도가 아니다. 예전의 대규모 재개발정책은 드넓은 땅을 확보해 큰 건물을 짓고 큰 길을 내는 일이라 대자본만이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을길을 고치고 살던 집을 리모델링하는 일은 동네기업과 개인 기술자도 할 수 있다. 성북구 장수마을에서도 주민들의 집수리 협동조합이 중심 역할을 했다. 가장 절실한 것부터, 함께 사는 사람들이 동의하는 방식으로 마을을 가꾸어 나간다.

도시재생의 철학을 한마디로 말하면, 오래되고 낡았다고 해서 부수고 허무는 것이 아니라 고쳐 쓰는 것이다. 도시는 오래 전에 태어나 앞으로도 함께 살아갈 하나의 생명체라는 인문주의 정신이 밑바탕이다. 서울의 북촌·서촌, 전주의 한옥마을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재개발 대상이 되어 깎여나갔을 낡은 한옥들과 좁은 골목길과 마당을 고쳐 애틋한 추억을 담아 내놓자 적지 않은 지역활성화 효과를 가져왔다. 서울역 고가도로를 공중정원으로 만든 ‘서울로7017’, 공주의 ‘하숙마을’ 게스트하우스처럼, 오래된 도시의 이야깃거리를 캐내어 역사문화 관광자원으로 만드는 것도 도시재생의 중요한 한 갈래다.

주민과 행정, 전문가를 도시재생사업의 세 주체로 들 수 있다. 이 삼박자가 잘 맞아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민이다. 국가의 주인이 국민이듯 도시의 주인은 시민이다. 행정의 속도주의, 성과주의가 작동할수록 시민의 뜻과 엇가기 쉽다. 도시재생사업은 주민들의 욕망과 개별적인 이해관계와 부딪칠 일이 많다. 착실한 대화와 설득이 필요하다. 일방주의는 도시재생과 어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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