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곰을 들고 나와 마법의 세계를 보여준다 해도 사람들은 심드렁해할 것이다. 나귀가 트림하고 콧방귀 뀌는 소리쯤으로는 여길라나? 워낙 뜬금없는 이야기가 떠돌아다니는 세상이고 보니 이해는 된다. 사실, 곰 이야기는 하려는 내게도 뜬금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렇게 곰은 갑작스럽고 엉뚱하게 나를 찾아왔다.

때는 1990년이니까 지금부터 27년 전이다. 한 사내가 공주 금학동 골짜기에 터를 닦고 대들보를 올렸다. 그리고 그 해 봄, 아내와 자식 셋을 모두 불러들였다. 그가 수원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 지 5년 만에 문을 닫고 아무 연고도 없는 공주에 뜬금없이 잠입한 삼류 변호사이자 이류 몽상가인 바로 나였다.

나는 공주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10년간 실컷 놀았다. 자식들은 커가고 쌀독은 바닥을 드러냈다. 다시 변호사 개업을 했고 자식들이 다 자라자 5년 전 다시 사무실 문을 닫았다.

나는 밤마다 총각이 몽정하듯 몽상했다. 길을 인도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왜 내가 쥐꼬리만큼도 몰랐던 공주로 이주할 생각을 했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생각해보라. 상식적으로 공주는 생각이 있는, 장년의 전문인이라면 꿈에도 택할 곳이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공주는 북으로는 차령고개, 동으로는 마암고개, 서로는 칠갑산고개, 남으로는 우금티고개에 깊이 둘러싸인, 기어가는 버스나 겨우 다니는 꽉 막힌, 외진 곳이었다.

몽상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신비의 길을 찾아나서는 사색의 탐험가다. 나의 몽상은 끝내 신비의 안개 저 너머에 있는 인연의 실타래를 따라 나섰고 드디어 금강변 곰나루 곰사당에 공주의 수호신으로 모셔져 있는 자그만 돌곰상에 이르렀다. 웅신(熊神)이라는 돌곰상을 보는 순간 얼어붙어버린 나에게 그 돌곰은 시공을 뛰어넘어 나의 인연 줄을 꽉 틀어쥐고 있는 곰할머니로 다가왔다.

마침내 나는 곰할머니를 찾아낸 것이다. 아니 내가 곰할머니를 찾아낸 것이 아니라 곰할머니가 나를 찾아내 이곳 공주로 인도한 것이었다. 나는 전율했다. 철들 무렵부터 나를 감싸고돌던 수수께끼 같은 정체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십대 무렵부터 몸 저 밑바닥에서 들려오던 그 알 수 없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곰나루 곰사당에 고즈넉이 앉아 있는 곰할머니였고, 단군신화에서 하늘과 땅을 이어주며 이 땅의 사람들을 고즈넉이 자궁에 품고 있는 곰할머니였다. 적어도 나의 몽상은 보이지 않는 인연의 실타래를 그렇게 풀어냈다.

그 다음 나의 행적은 뻔했다. 공주박물관과 웅진도서관, 공산성과 무령왕릉, 공주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곰과 관련한 유적과 전설이 나의 발길을 안내했다. 곰 이야기는 몽상의 항아리 안에서 곰삭혀져 갔고, 언제부터인가 박제가 되어 돌이 돼버린 곰의 혼령이 살아나 몽상의 길을 따라 이 땅을 누비며 포효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나는 그 곰이 포효하는 소리를 여러분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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