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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문화원장  |  tj45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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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3.22  07:5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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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주박물관 자원봉사자회 회장 황규형(黃圭馨) 선생

   
 
   
 
오래 전 이야기
실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어른이다. 아니, 평교사 시절 같은 학교에서 교장선생님으로 모시고 근무하던 분이다. 그래서 나는 이분을 지금도 ‘교장선생님’이라 호칭한다. 그러니까 1985년 3월 1일, 나는 공주교육대학교 부설초등학교에서 근무하다가 공주군(당시는 공주군이었다)의 한 학교로 발령받았다. 마곡사 가는 길목에 위치한 호계초등학교. 발령 소식을 듣고 동료교사 한 사람이 귀띔해주었다. 새로 부임해 가는 학교 교장선생님이 지독하기로 이름만 교장선생님이라는 것. 그러면서 ‘너는 이제 죽었다’는 표정으로 건너다보는 것이었다.

부임하는 날, 전임학교 교장선생님을 따라 호계초등학교란 델 찾아갔다. 처음 보는 학교, 처음 만난 선생님들이었다. 교장실은 따로 없었고 교무실 한 칸을 케비넷으로 막아 그 한 귀퉁이를 사용하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황규형 교장선생님. 교사들이 벌벌 떤다는 그 교장선생님. 그러나 오히려 그분은 핸썸한 신사의 풍모였다. 약간 마른 듯한 체구지만 헌칠한 키에 말쑥한 외모. 안경을 낀 얼굴이 매우 이지적 인상을 풍겼다. 다만 바깥 날씨가 제법 쌀쌀한 날이었는데 교장실이 매우 썰렁하다는 느낌이었다.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다 보니 이분은 소문으로 듣던 바와는 많이 달랐다. 그렇게 함부로 사람들 입줄에 오르내리고 평가될 분이 아니었다. 우선 한 인간으로서 반듯한 분이었다. 한 개인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예부터 신언서판(身言書判)을 들었다. 이는 중국 당나라 시절 관리를 뽑아 쓰는 기준이었다 하는데 황교장 선생님이야말로 그 신언서판이 뚜렷한 분이었다. 언제나 맑고 긍정적인 표정. 또렷또렷 정확한 발음의 조리 있는 말씨. 조신하고 절제된 몸가짐. 그야말로 반듯한 인품으로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었다.

한 사람 교원으로서도 선생은 매우 유능했다. 교원은 그 나름대로 능력을 요구받는 직업인데 무엇보다도 교수능력이 있어야 하고 사무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과의 인화능력이 부수적으로 따른다. 그런데 선생은 그 모든 면에서 탁월한 분이었다. 글씨면 글씨, 말씀이면 말씀, 운동이면 운동, 심지어는 악기 다루는 솜씨까지 남한테 뒤지는 것이 없었다. 그야말로 교사로서의 전범 같은 분이었다. 게다가 선생은 염결성까지 갖추고 있어서 학교 운영과 관리, 그리고 경리 문제에서 깔끔했다. 어떤 때는 지나치다 그럴 정도였다. 출장비에서도 쓰고 남은 돈이 있으면 경리계에 여입(餘入)조치를 하여 주위를 놀라게도 했다. 그래서 실은 선생님들이 싫어하고 꺼리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일종의 경원(敬遠)같은 것이었다. 아, 바로 그것이구나. 처음 발령 받던 날, ‘너는 이제 죽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동료교사의 표정이 조금은 이해되는 듯싶었다.

선생은 신입교사인 나에게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대했다. 인간의 속성이 한 장소나 집단에 오래 머물다 보면 그 장소나 집단에 동화되고 말아 그 좋고 나쁨을 모르게 될뿐더러 판단력까지 흐려지게 마련이어서 처음 들어온 사람이 그걸 말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로 학교의 행사에 대해 물으셨다. 공개석상에서도 그러셨지만 개인적인 자리에서 자주 그러셨다. 가령 학교의 조회나 중간놀이 같은 일상적인 행사에서부터 운동회, 입학식, 졸업식 같은 특별한 행사가 끝나면 나더러 그 의견을 말하라 하셨다. 때로는 퇴근길에 잠시 만나자 살그머니 언질을 주시곤 했다.

선생은 약주를 잘 하지 못하시고 또 다방 같은 한유한 장소를 안 좋아 하신다. 그래서 주로 밥집 같은 데에서 뵈었다. 당시 공주 시장 안에는 ‘함지박’이란 이름의 지하식당이 있었다. 비빔밥을 잘했고 음식이 정갈했다. 어떤 때는 그 집에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선생은 술 실력이 약하다. 그러나 따끈하게 덥혀 유리잔에 담은 정종(백화수복) 한 잔까지는 마다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어떤 날은 이야기에 홀려서 그만 그 한잔을 넘기고 일곱 잔까지 가는 날이 있었다. 그런 다음날은 결국 학교를 빠지거나 종일 배앓이를 하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학교에 급식시설이 되어 있지 않던 시절이었다. 점심식사를 도시락으로 해결하거나 식당을 이용해야 했다. 헌데 학교 근처에 마땅한 식당이 없었다. 도리 없이 학교 뒷집 농가에서 밥을 부쳐 먹어야 했다. 그것도 여자 선생님들은 제외하고 남자 선생님들만 그랬다. 점심시간은 사적인 시간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교장이요 평교사라 해도 평등하게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시간이다. 대화 또한 사적인 대화가 주류이다. 그러나 날마다 정해진 사람들이 마주 앉아 밥을 먹을 양이면 대화가 궁하기 마련. 무미건조함과 무료함, 머쓱함을 달래기 위해 내가 자주 입질을 했을 것이다.

이런 대화 시간을 통해 선생과 한발 마음이 가까워지게 되었다. 내가 시 쓰는 사람이라 그러니 선생이 정지용 시인을 아느냐 물으셨다. 요즘의 정지용은 열려진 인물이나 당시만 해도 판금 안에 갇혀진 인물이었다. 나는 「난초」란 시를 안다고 선뜻 대답했다. 덧붙여 그 시를 다 외우지는 못하고 끝 구절이 ‘난초는 / 칩다’(여기서 ‘칩다’는 오식이 아니다.)로 되어 있다고 말했다. 선생의 표정이 대번에 달라졌다. 어떻게 젊은 사람이(선생의 입장에서) 정지용을 다 알고 또 작품까지 아는가 그런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 어떻게 시골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그런 수준 높은 문학 이야기에 조예가 있느냐 싶었으니까.

그 뒤로 선생과는 교육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사람은 이렇게 어떤 계기에 취미나 관심영역이 같거나 서로 이해의 폭이 겹쳐지면 심정적으로 가까워지게 되어 있다. 일찍이 공자님께서도 ‘나를 깨우쳐주는 자는 상商이로구나, 商이야말로 같이 시를 말할 만하다’(子曰 起予者 商也 始可與言詩已矣 ―『論語』八佾 편)라고 말씀 한 바 있다. 그렇게 되면 그 인간관계(사제, 지위, 연령)를 넘어 마음의 벗이 가능하게 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선생은 이렇게 일반교양이나 지식에만 해박한 것이 아니라 일본어에 능통했다. 아니, 그분은 전공이 일본어였다. 젊은 시절 독학으로 중등학교 일본어 교사 시험에 합격하여 정식으로 일본어 교사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는 분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안 나는 두 권의 책을 구입해 선물로 드렸다. 이미 내가 읽은 책으로 일본의 시가를 번역해서 만든 책(박순만 번역: 『日本人의 詩情』, 김희보 편저『일본 명시선』)이었다. 그런데 그 뒤로 선생으로부터 놀라운 반응이 왔다. 당신이 두 권의 책을 모두 읽어보았는데 번역된 내용 가운데 맘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 고쳐 보았다면서 책을 돌려주시는 것이었다. 책을 살펴보니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아주 많은 부분이 연필로 고쳐져 있었다. 나는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시의 번역이란 산문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그건 실상 한국어와 일본어의 질서에 정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나는 내가 가진 책을 펼쳐 선생이 고쳐서 적어놓은 부분을 일일이 적어놓고 다시 책을 선생에게 돌려드렸다.

선생은 아동 교육이나 수업에 있어서도 해박한 지식이 있을 뿐더러 실천력이 대단했다. 나와 함께 근무하는 동안 선생은 교사들에게 연구수업을 적극 권장하기도 했지만 당신 스스로 학생들의 일기장 검사를 했다. 3학년부터 6학년까지였을 것이다. 학년마다 두 학급씩이었고 학급당 아이들 수도 많았으니까 그 양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해진 날짜와 계획에 따라 일일이 검사를 했다. 그런 다음 잘된 일기장은 따로 골라 몇 사람씩 중간놀이 시간에 운동장에서 전교생을 상대로 읽도록 했다. 요즘 학교 풍토에서는 엄두조차 못 낼 일이다. 담임들 입장에서는 이러한 교장이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운동장 조회 시간에 교사들로 하여금 순번을 정하여 훈화실습을 하도록 권장하기도 했다.

어느 날이었던가. 학교 행사로 해서 선생이 매우 화가 난 날이 있었다. 그날도 선생은 날더러 퇴근길에 좀 보자고 했다. 음식점에 마주 앉았을 때 나는 선생에게 조그만 어조로 말했다.
“교장 선생님, 죄송하지만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보시기에 저희 학교 선생님들 가운데 한 가지라도 교장선생님 보다 나은 능력을 가진 선생님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생뚱맞은 질문이어서 그랬던지 선생은 쉽게 답을 내놓지 못하셨다.
“글쎄요……”
“가령, 가령 말입니다. 글씨쓰기면 글씨쓰기, 수업능력이면 수업능력, 악기다루기, 운동경기 하나에까지 말입니다.”
재차 드리는 말씀에 선생은 비로소 고즈넉한 음성으로 답하시는 것이었다.
“그렇군요. 나 선생 말을 들어보니 한편으로는 그렇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나의 말에 간접적으로 동의한다는 말씀이기도 했다. 내친걸음, 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교장선생님, 평가의 기준을 좀 낮추시는 게 어떨까요. 저희 선생님들 능력이 그만큼인데 교장선생님께서 계속 기대를 하시게 되면 저희들도 불행하고 교장선생님도 불행하실 것만 같습니다.”
선생은 이내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곧장 말씀하셨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빠르고 경쾌한 어조였다. 그 뒤로부터는 선생이 학교 안에서 화를 내는 일이 훨씬 줄어들었다. 이런 선생의 모습을 곁에서 보면서 선생이 매우 외로운 분이구나, 그런 느낌을 갖기도 했다.

   
 
요즘 이야기
선생과 함께 근무한 기간은 길지 않다. 1년이나 1년 반쯤이었을까……. 선생이 인근학교로 전근하게 되었다. 정년퇴임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근무할 학교였다. 선생이 정년퇴임할 때는 나도 교감을 거쳐 전문직(충남교원연수원)에 가 있었다. 퇴임식의 연락을 받고 찾아가 축시를 지어 읽어드리기도 했다. 그건 선생을 ‘대나무’와 ‘소나무’에 비겨서 쓴 시였다. 정말로 선생은 소나무나 대나무 같이 곧고 푸른 기개가 있는 분이다. 그날 선생은 퇴임인사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기도 했다.
“나는 오늘 비록 정년을 하교 학교를 떠나지만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열심히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살아갈 것입니다. 눈이 보이는 날까지는 책을 읽을 것이며 손이 성할 때까지는 글씨를 쓸 것이며 다리가 성할 때까지는 테니스를 할 것입니다.”
조용한 어조였지만 단호한 말씀이었다. 스스로를 다그치는 불퇴전의 각오였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들이란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나날이 바쁘고 거칠게 흐르다 보니 놓치고 챙기지 못하는 일들이 많다. 한동안 마음속에 두고 지냈던 어른인데 오래 만나 뵙지 못했다. 교장 연수를 마치고 인사 차 겨우 한 차례 뵈온 일이 있었지 싶다. 이미 선생은 공주시내 봉황산 아래 옛집을 떠나 아드님 댁(공주시 계룡면 월암리 319번지)에서 기거를 하고 계셨다. 근무하던 학교가 논산이었고 그곳이 딸기가 좋았으므로 딸기를 한 바구니 들고 찾아뵈었지 싶다. 미리 전화 드렸으므로 댁에 계셨다. 얼굴은 조금 변했지만 말씀이나 거동은 예나 다름없었다. 아마도 그날 선생과 밀린 이야기를 한참 나누고 집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이러한 선생을 적극적으로 만나게 된 것은 아무래도 내가 문화원장이 되면서이다. 지난 해(2009년) 7월 1일, 공주문화원장 이·취임식에 오시어 함께 자리해주시고 리셉션 때는 손수 건배제의를 해주시기도 했다. 선생이 그동안 국립공주박물관에 나가 자원봉사자의 일을 하고 계신 것은 진즉부터 안 일이지만 이런저런 회의나 모임을 기회로 오고가면서 자주 뵙곤 했다. 그러나 좀더 선생의 근황에 대해 듣기 위해 우리 문화원의 김민영 양과 공주박물관으로 선생을 찾았다. 선생이 일하시는 날은 매주 화요일 오후 시간. 선생은 박물관 본관 건물 안쪽에 있는 자원봉사자실에 계셨다. 마침 책을 읽고 계셨던지 책상 위에 일본어 책과 일본어 사전이 펼쳐져 있었다. 자리에 앉으면서 대충 찾아온 까닭을 밝혀드렸다. 준비도 없이 즉석에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먼저 나는 선생에게 언제부터 박물관에서 자원봉사자의 일을 하시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여쭈었다. 처음 일을 시작한 것은 1996년. 공주 청년회의소(The Junior Chamber)에서 일본과 교류를 하던 회원들과 학생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뿐더러 일본에서 오는 학생들과 성인들에게 공주박물관(현재 중동에 위치한 충남역사박물관)의 유물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면서 일의 단초가 열렸다고 한다. 그러한 선생이 정식으로 자원봉사자가 된 것은 2005년, 국립공주박물관이 중동에서 현재의 웅진동으로 옮기고 난 그 이듬해부터라 했다. 선생은 자원봉사자이기는 하지만 보통의 자원봉사자와는 구분이 된다. 오히려 역사를 가르치는 엄전한 선생님으로서의 자원봉자사자이다. 내국인에게도 그렇지만 외국인, 주로 일본인들에게 더욱 그러하다. 일본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 대해서,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誌石)을 근거로 하여 『日本書紀』의 잘못된 역사관에 대해서 바로잡아 주신다.

선생의 생년월일은 1925년 9월 18일. 연세가 80하고서도 다섯이시다. 인간은 젊어서 황금기도 중요하지만 나이를 드시고 일정한 직장에서 은퇴한 다음의 날들도 충분히 아름답고 가치가 있고 할 일 또한 많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에 선생은 기꺼이 동의하신다. 선생은 이미 회갑을 넘기면서 그 이후의 삶이 덤으로 사는 날들이니 그동안 사회에 진 빚을 갚는 마음으로 살겠다는 결의를 세우셨단다. 그리하여 정말로 그 이후의 날들은 오로지 인생 전반부에서 진 빚을 갚는 ‘채무상환’의 날로 사셨다 한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하실 거냐는 물음에 선뜻 당신이 쓰러질 때까지라고 하신다. 이 일 말고도 선생은 바쁜 일상을 보내신다. 역시 사람을 대하고 가르치는 일이다. 매주 3회(월, 목, 금요일, 오후 7-9시)에 충남역사박물관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고 계신다는 것이다.

대상은 40대에서 50대의 성인. 일본 관광객을 맞아 홈스테이를 제공하는 분들이라 한다. 일본어를 가르치면서도 선생의 교수법은 특별하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수강생들로 하여금 실수를 하고서도 기쁨을 맛볼 수 있게’ 가르치느냐, 이다. 교육의 대상이나 방법은 달라도 현직에 계실 때에도 선생은 탁월한 교사였고 교직을 떠난 뒤에도 여전히 선생은 탁월한 교사로 남으셨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선생은 스스로도 교원 체질이라고 자인하신다. 어느 날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에도 강단에 서서 이야기를 시작하기만 하면 힘이 솟고 불쾌했던 상황들이 사라지고 좋은 컨디션이 회복 된다’는 것이다. 새삼 천부적인 교사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선생께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소중한 삶의 의욕과 희망에 대해서 여쭈었다. 기다렸다는 듯 선생의 말씀이 시냇물같이 흘러내린다.

“나는 젊은 사람들한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론 숨 쉬는 것입니다. 내가 숨 쉬고 있다는 것, 이것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이게 기쁨이고 이게 행복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잘 모르고 있어요. 몇 해 전, 아내가 운명했을 때 눈을 막 감고 난 뒤 만져보니 체온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요. 한 가지 차이점은 숨 쉬고 있지 않다는 거였어요. 우리가 숨 쉬고 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해요? 우리는 이 숨을 쉰다는 것 자체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요, 기쁨이요, 행복, 그 원천이라는 걸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아요. 내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하나의 희망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과 확신에 대한 발언이다.

“나도 언젠가는 이 숨이 멎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자식들과 상의를 했어요. 애비가 세상에 태어나 오늘날까지 건강하게 살았고 또 남들한테 그다지 손가락질 당하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다 남들의 덕이야. 그런데 내놓을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내가 죽고 나면 내 몸을 병원에 의학용으로 기증해다오. 땅에 묻어 썩거나 화장해서 사라질 육신보다는 그게 값있게 쓰여지지 않겠느냐? 물론 자식인 너희들 입장으로서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이것은 내 뜻이야. 너희들 생전에 내가 죽은 날을 기억하고 그날 모여 나를 회상하고 추모해주면 그것으로 만족인 것이지, 이것을 7-8년 전에 이야기해 주었고요, 결심하기는 40년 전이었어요.”
역시 선생은 당신의 삶에 대해서 책임질 줄 알고 사후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선진한 생각을 가진 분이시다.

선생은 예전 교장 선생님으로 모시고 있을 때에도 특별한 분이셨고 선진한 분이셨다. 그래서 왜 다른 사람들은 내가 아는 걸 모를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왜 하지 못할까,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지식이나 삶에 대한 탐구, 아니면 발견, 그런 면에서도 그렇고, 하고자 하는 실천력 면에서도 그렇다. 오늘날 나이가 드셨지만 여전이 선생은 특별한 분이시다. 그래서 나는 선생에게 그동안 살아오면서 외롭지 않으셨느냐고 엉뚱한 말씀을 드려보기도 한다.
“사실 외로웠지요. 그렇지만 나는 젊은 시절 이래 당구나 바둑, 화투, 댄스, 마작 같은 것들을 전혀 할 줄 모릅니다. 왜 못했느냐? 그런 걸 시작하면 남들과 겨룰 만큼은 해야 할 텐데 거기에 투자할 시간이 아까웠어요. 그래서 내 영역이 아니다, 치지도외(置之度外)를 한 것입니다. 사람이 시간을 아끼며 살아간다는 것은 젊은 시절이나 나이든 시절이나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나는 지금도 할 일이 너무나도 많고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허락된 시간이 너무나 많지 않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부디 젊은 분들은 이 점을 서둘러 알아서 시간을 아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것은 실상 지행합일(知行合一)에 관한 문제다. 사람이 알거나 말하기는 쉬워도 그것을 실천하며 살기는 어렵다. 선생이야말로 인생을 조각품처럼 평생 동안 다듬으며 완성해가는 분이라 여겨진다. 우리 주변에 이렇게 연세가 드셨음에도 불구하고 맑은 정신으로 바르게 꼬장꼬장하게 자신을 고누며 살아가는 어른이 계시다는 건 많은 위로를 준다. 그것이 실상은 하나의 희망이다. 부디 선생의 지상의 날들이 앞으로도 더욱 알차고 빛나고 아름다우시기를 기원 드린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나는 선생께 지극히 개인적인 부탁 하나를 드린다. 그것은 번역시집을 갖고 싶은 소망이다. 다른 나라 말은 모르거니와 영어 번역시집과 일본어 번역시집은 한권씩 가지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 소원을 밝히면서 선생에게 내 시를 일본어로 번역해주시었으면 어떨까 말씀드렸다. 잠시 망설이는듯하다가 선생은 그 일을 해 보마 승낙하신다.
“네, 그렇게 해보지요.”
예나 이제나 선생의 결단과 표현은 명쾌하시다. 앞으로도 자주 이런 일로 선생과 만나 즐겁고도 유익한 인생의 시간이 허락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혼자서 조그맣게 미소 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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