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오동나무

▲나태주 공주 문화원장.
내가 다녔던 학교나 근무했던 학교 가운데 지금은 없어진 학교가 많다.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시골 학교만 찾아다니며 근무한 탓이리라. 학창 시절의 마지막을 보낸 공주사범학교도 그 가운데 하나다.

지금은 그 이름조차도 사라져 버렸다. 초등학교 교사를 길러 내는 학교였는데 학교 제도 개편에 따라 교육대학으로 바뀐 것이다.

오늘날 공주교육대학교가 있는 자리가 내 마지막 모교가 있던 자리다. 그러나 공주교육대학교에서 모교의 모습을 찾아보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3년 동안 공부했던 2층짜리 그 단아한 교사의 건물도 사라지고 없고 정원도 사라지고 없다.

남아 있는 거라고는 교문 앞에 있던 늙수그레한 은행나무 몇 그루와 사제동행상 뒤의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고작이다.

거기에 대운동장 한구석에 뒤틀린 자세로 서 있는 늙은 오동나무 한 그루가 보태질 뿐이다.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도 그 나무는 이미 늙은 나무였다. 나뭇가지 몇 개가 떨어져 내렸고 몸통은 여러 군데 썩거나 패여 보기 흉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나뭇가지 끝에 만국기 몇 가닥을 걸고 마지막 운동회를 했다. 우리가 사범학교 막내라서 후배도 없이 3학년 150명 졸업생들끼리만 운동회를 했던 것이다. 가을 바람에 쓸쓸하게 나부끼던 만국기가 기억난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나무는 더욱 노쇠해지고 초라해져 갔다. 언제 숨이 넘어갈지 모를 지경으로 수세가 많이 기울고 있었다.

나무의 생김새도 점점 변해져 기이한 모습이 되어 갔다. 해마다 봄이 되면 몇 개의 이파리를 겨우 내미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였다. 거의 괴물 간은 꼴이라 주변에서는 아예 이 나무를 없애 버리는 편이 낫겠다는 의견이 오갔다.

나무가 없어지는 일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이 나무가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다. 메마른 가지 끝에서 작은 가지가 나오고 그것이 자라 몇 해 뒤에는 꽃을 피우기도 했다. 그야말로 죽은 나무 꽃피우기였다.

모도가 죽어 간다고 믿었던 껍질이 아주 사라져 버린 줄 알았는데 손가락같이 가늘게 남은 수피가 점점 자라고 넓어져 나무가 싱싱해졌다.

죽어 가던 나무가 이렇게 다시 살아난 데에는 몇 사람의 숨은 보살핌과 노력이 있었다. 1980년대 초, 당시 문교부 편수관으로 있던 박용진 선생이 공주교육대학 학장으로 부임해 왔다.

그분은 전에 공주교육대학교의 교수로도 재직했기에 학교 시설이나 환경에 대해 애정이 많았다. 돌아온 학교의 구석구석을 살피다가 나무가 죽어 가는 것을 알고 실과 담당인 이충구 교수와 나무를 살릴 계획을 논의하였다.

이 교수는 즉각 나무 둘레에 울타리를 두르고 나무뿌리에 거름을 주기 시작했다. 나무가 좋아지기 시작하고 다시 살아났다.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나무는 해마다 더 좋아져 이제는 아주 씩씩한 나무가 되었다.

하지만 모양새는 어쩔 수 없어 꾸부정한 모습 그대로이다. 기괴하기까지 한 모습이다. 어쩌면 그 모습이 자기답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나무의 이름은 개오동나무. 보랏빛 꽃이 피어나는 참오동나무보다 귀한 나무다. 그래서 나는 개오동나무란 이름 대신에 ‘백오동나무’라고 불러 주고 싶다.

공주교육대학교에 들러야 할 때마다 나는 지향 없이 헤메는 마음으로 이 나무에게 눈길을 맡기곤 한다. “노인장, 안녕하시오? 그동안 살아남느라고 참 고생이 많으셨구려.”

차라리 그렇게 정중한 인사의 말을 건네고 싶은 심정이다. 해마다 웨딩드레스처럼 하얀 빛깔로 눈부시게 꽃을 피우는 오동나무(개오동나무는 참오동나무와는 달리 이파리와 줄기를 내밀고 나서 새 줄기 끝에 꽃을 피운다.)

6월 초순쯤 그 새하얀 꽃이 필 때면 나는 이 나무를 찾아가 그 옆에 잠시 서 있는다. 그래서 나는 오동꽃 피어나는 6월을 향해 까치발을 딛는 심정이 된다. 내가 소년이었을 때 이미 노인이었던 나무. 이제 내가 노인이 되어 이나무 옆에 다시 세게 되었구나.

나무는 이제 나에게 육친과 같은 의미가 되고 부형과 같은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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