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김정섭 (前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직대, 청와대 부대변인 역임

▲前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직대, 청와대 부대변인 역임ⓒ 파워뉴스
최근 이웃의 한 지방자치단체에서 역사인물축제를 열었습니다.

선정한 인물을 보면, 고려조의 무관도 있고, 조선조 사육신의 중심인물, 항일 독립운동가, 그리고 근대예술을 꽃피운 분들도 있었습니다. 솔직히 부러웠습니다. 그들에게는 나라를 지키고 예술을 발전시킨 자기 고장의 역사인물을 기리려는 기상과 예의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공주에 그만한 역사인물이 존재하지 않는가? 아니죠, 아주 많이 계십니다. 그분들을 기릴 예의와 기상을 우리가 못 갖추었나? 그렇지 않습니다. 국립공주박물관과 도립 충남역사박물관을 비롯한 박물관․기념관들에 관련 자료가 수집되어 있고, 백제문화제를 비롯한 여러 축제와 춘추 제향에서 각기 추모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뭔가 한참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우선 공주의 역사인물이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누군지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제대로 밝히고 알려야만 기릴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그동안의 학술적 연구를 종합하고 분석해서 대략 열댓 분의 인물을 선정해 보았습니다. 공주사람이라면 적어도 이분들만은 제대로 알고 기리자 하는 뜻입니다. 시대순으로 한분씩 간략히 정리해 봤습니다.

웅진백제의 네 번째 군주인 무령왕(461-523)은 공주의 역사인물 중 첫 손으로 꼽을 만합니다. 23년간 재위하며 한성에서 쫓겨 내려온 백제의 국력을 크게 키워 다시 강국으로 중흥시켰고, 중국 남조와 왜국, 인도와 적극적으로 교류해 찬란한 고대문화를 꽃피웠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오른 무령왕릉의 유물이 모든 것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무령왕의 아들 성왕(490?-554)은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유역을 마침내 회복하고 가야와 왜를 적극적으로 포섭했습니다. 공주에 대통사를 창건하고 왜에 불교를 전해주었으며, 15년간 웅진에서 통치하다가 사비로 수도를 옮겨 국력의 비약을 꾀했습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기록된 향덕은 ‘효의 고장 공주’의 상징입니다. 신라 경덕왕 때 공주 소학동에 살던 그는 자신의 허벅지살로 국을 끓여 부모를 구완했으며, 겨울철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드리려다 상처에서 피가 흘러 ‘혈흔천’의 유래를 남겼습니다.

절재 김종서(1383-1453)는 의당면에서 출생한 조선 전기의 명신입니다. 세종의 명으로 6진을 개척해 한반도 북쪽 경계를 확정했고, 행정실무에 밝고 엄정하게 처리해 관료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고려사절요’‘세종실록’을 편찬하는 등 학자의 면모도 뚜렷해, 수양대군에 의해 피살될 때까지 세종-문종-단종으로 이어진 문치시대의 주역이었습니다.

원래 보령 출신인 고청 서기(1523-1591)는 토정 이지함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50대 이후에 반포면 공암에 정착했습니다. 유학은 물론 불학․도학에도 통달한 학자로서, 충청우도 최초로 공암정사(오늘의 충현서원)를 설립하여 공주에 호서유학의 요람을 마련했습니다.

임진왜란의 의병장 영규(?-1592) 대사는 계룡면 태생으로 갑사에서 출가했습니다. 평소 무예를 단련하던 그는 승병 수백명으로 의병장 조헌 휘하에서 주력을 맡아, 왜군으로부터 청주성을 탈환한 후 이어진 금산 전투에서 순절했습니다.

노응환, 응탁, 응호 등 만경 노씨 삼형제는 우성면 출신의 선비입니다. 임진왜란 때 스승 조헌이 공주향교에서 일으킨 의병의 대열에 적극 합류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움으로써 공주유림의 충의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침술의 대가 허임은 조선 선조와 광해군 때의 어의로서, 허준이 추천하여 왕과 세자 등의 병환을 숱하게 치료했습니다. 비싼 약재를 쓸 수 없는 서민들에게 침과 뜸을 널리 보급했으며, 중년 이후에 우성 내산리에 정착하여 <침구경험방>을 펴냄으로써 동아시아 침술의학의 교과서로 삼게 하였습니다.

‘일본 아리타 도자기의 시조’로 불리는 이삼평(?-1655)은 임진왜란 때 끌려간 계룡산의 도공입니다. 그는 1616년에 일본 최초로 백자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고, 아리타 자기는 17,8세기에 유럽으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습니다. 일본 요업계는 내년에 일본자기 탄생 400주년을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초려 이유태(1607-1684)는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유계와 함께 조선 중기 ‘충청 5현’으로 꼽힌 대학자입니다. 특히 시무에 밝아 효종에게 ‘기해봉사’라는 장문의 상소를 통해 국정개혁안을 제시했습니다. 45세 때 금산에서 상왕동(왕촌)으로 입향, 용문서원을 지어 학문을 토론하고 후학 양성에 힘썼습니다.

퇴석 김인겸(1707-1772)은 공주 무릉동 출신의 문인학자입니다. 1763년에 제11차 조선통신사의 삼방서기로 발탁되어 486명의 일행과 함께 11개월간 여행했습니다. 일본에서 보고 느낀 점을 문학화해 8,243구에 이르는 장편 한글가사 <일동장유가>를 남겼습니다.

정안면에서 태어난 김옥균(1851-1894)은 고종 때 고위관료로서 변혁을 꿈꿨던 개화파의 지도자입니다.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 민씨 척족을 몰아내고 집권했지만, 고종과 일본이 지원을 철회해 3일 만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집권 후 선포한 정강에는 ‘문벌 폐지’‘인민 평등’‘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등 진보적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암으로 알려진 프랭크 윌리암스(1883-1962)는 미국 선교사로 공주에 와서 1906년 영명학당을 세우고 1940년까지 교장을 맡았습니다. 일제에 의해 본국으로 추방될 때까지 근대교육을 본격적으로 펼쳤으며, 유우석, 유관순 등 항일운동가들도 다수 배출했습니다.

정안 석송리에서 태어난 청전 이상범(1897-1972)은 조선시대 전통회화의 맥을 이어 근대화단의 거목이 되었습니다. 1936년 동아일보 삽화가로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를 말소해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가 말년까지 즐겨 그린 비산비야(非山非野)의 향토색 짙은 풍경은 어릴적 공주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명창 박동진(1916-2003)은 공주 무릉동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여러 스승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워 많은 무대에 섰습니다. 특히 1960년대부터 판소리 다섯 바탕을 최초로 완창하는 큰 업적을 세웠고, 판소리를 국민들 삶 속에 폭넓게 자리잡게 한 국창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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