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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문화원장  |  tj45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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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2.26  22: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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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창 박동진 선생

1. 인물 박동진
근세사 이후, 우리 공주의 문화계 인물 가운데 인당(忍堂) 박동진(朴東鎭) 선생만큼 무게를 지닌 인물,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 또 있을까 싶지 않다. 선생은 이미 공주의 인물이 아니고 한국의 인물이고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 미수(米壽)의 생애. 세월도 길지만 혈혈단신 이룬 업적도 엄청나다.

대개 국악계에서는 기능이 뛰어난 예인에게 명창이란 호칭을 사용한다. 그러나 박동진 선생에게는 국창이란 호칭을 서슴없이 사용한다. 국창(國唱)이란 본래 ‘임금 앞에 불려나가 판소리하던 어전(御前) 광대’를 이르는 용어다. 허지만 현대에 와서는 ‘나라에서 손꼽히는 명창’이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국창 박동진 선생. 그 분은 실로 전설적인 인물이다. 평생을 오직 판소리만을 위해서 살았다. 통상 17세기 후반 무렵, 조선조 중기에 ‘남도 지방 특유의 곡조를 토대로 발달한 광대 한 명이 고수 한 명의 장단에 맞추어 일정한 내용을 육성과 몸짓을 곁들여 창극조로 두서너 시간에 걸쳐서 부르는 민속예술 형태의 한 갈래’가 판소리다.

그러나 판소리는 20세기에 들어와 1960년대까지 여러 가지 복합적 요인에 의해 침체일로에 처하게 된다. 이런 판소리가 1961년 국가에서 ‘국립창극단’을 창립하여 판소리 자체를 중요 무형문화재로 보호하고, 판소리 명창을 인간문화재로 지정하는 등, 판소리를 제도적으로 보존하는 장치를 마련하면서 새로운 도약기를 맞는다.

그 도약기의 중심에 우리의 박동진 선생이 위치하게 된다. 그것은 그냥 저대로 되어진 것은 아니다. 박동진 선생의 필생의 노력과 지향이 있었기 때문이요, 시대가 또 선생을 필요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언제든 시대가 인물을 부르고 인물이 또 시대를 채우도록 되어 있다.

박동진 선생이야말로 한국 판소리계의 중흥조라 할 만한 분이다. 선생은 판소리 완창자로 유명하다. 짧게는 4~5시간, 길게는 8~9 시간, 그 긴 시간을 논스톱으로 판소리 전편을 훑어 내리는 것이다. 선생이 맨 처음 판소리를 완창한 것은 1968년, 5시간짜리 「흥보가」를 완창하면서 부터다. 그 뒤로 「춘향가」(1969년, 8시간),「심청가」(1970년, 6시간),「변강쇠타령」(1970년, 5시간)을 내리 완창했다. 이어「적벽가」(1971년, 7시간), 「수궁가」(1971년, 5시간),「배비장타령」(1972년)을 차례로 완창하기에 이른다. 그야말로 대기록이다. 초인적인 노력의 결과요 전무후무한 업적이다.
선생이 이토록 판소리 완창에 열정을 바친 데에는 아마도 선생 나름대로의 지향과 의도가 있었지 싶다. 20세기에 들어와 판소리의 주된 공연형태는 ‘토막소리’ 위주로 흘러가고 있었다. (토막소리란 판소리 작품 가운데 소리꾼들이 자기 기량과 취향에 맞는 부분만을 잘라서 부르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해 선생은 판소리의 진로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각성 아래 정면 승부를 하고 나선 것이다. 이야말로 정공법이고 학구적인 해결방법이다.

나아가 선생은 판소리의 대중화 노력에도 마음을 아끼지 않았다. 판소리의 본질이 스토리텔링에 있음을 십분 자각한 나머지, 판소리 공연장에서 기존의 아니리(판소리에서 소리꾼이 소리를 하다가 한 대목에서 다른 대목으로 넘어가기 전에 자유리듬으로 사설을 엮어나가는 행위. 말로 하는 말조아니리와 소리로 하는 소리조아니리가 있는데 말조아니리가 주로 사용된다.) 형식을 창조적으로 새롭게 구사한 점이 그것이다. 선생의 아니리는 구수한 재담과 걸쭉한 육담으로 요약된다. 때로는 비속어, 욕설까지도 서슴없이 아니리에 동원했다. 이런 즉흥적인 아니리가 자칫 지루할 법도 한 판소리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대중적인 인기를 모으는데 성공적인 요인을 제공했다.

이런 점에서 선생이야말로 진정한 소리꾼이요 일세를 풍미한 대중적 스타였다고 할 수 있겠다. 대중적 인기는 점점 올라 선생은 1992년 한 TV 광고에도 출연했다. ‘제비 몰러 나간다∼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 이 짧은 말 두 마디는 판소리를 일약 민중의 소리, 대중의 소리로 끌어올리는 효과를 거뒀다. 벽장 위에 올려놓았던 먼지 묻은 문화재로부터 판소리를 우리 삶 가까이로 끌어내리는 놀라운 일을 했던 것이다.

흔히, 공주 사람들은 공주에 ‘쓰리 박’이 있다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박 씨 성을 가진 세 사람의 문화계 인물로 박동진 선생과 야구선수 박찬호, 골프선수 박세리를 묶어서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이것은 너무 무리한 조합이라고 여겨진다. 우선 분야가 다르고 연배나 세대가 또 판이하다. 두 사람은 젊은 세대로 운동선수이고 한분은 나이가 많은 분으로 국악계의 거물이다. 이러한 호칭이나 분류들은 다만 호사가들의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질 따름이다.

   
 
2. 판소리와 함께 한 일생
선생의 출생지는 충남 공주시 무릉동(옛 이름, 충남 공주군 장기면 무릉리 365번지). 오늘날 ‘박동진 판소리 전수관’이 세워진 자리다. 가까이 강변풍경이 건너다보이는 금강의 북쪽 마을. 이 마을에서 선생은 1916년 7월 12일, 아버지 박재천 님과 어머니 최 씨 사이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제적으로 고달프게 유년시절을 보낸 선생은 면서기라도 하는 것이 좋겠다는 부친의 권유에 따라 대전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졸업을 몇 달 앞둔 어느 날, 협률사(協律社:조선 후기 창악인(唱樂人)들이 조직한 예술단체)의 공연을 보고 학교 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만다. 이 공연에서 당대의 최고의 명창들인 이동백, 송만갑, 장판개, 이화중선, 김창룡 등의 소리를 들은 것. 우연의 계기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버린 것이다. 소리꾼이 되기로 결심한 소년 박동진은 청양의 송영두를 찾아가 「춘향가」중에서 「사랑가」,「옥중가」 등을 토막소리로 배우면서 소리꾼으로서의 첫발을 내딛었다.

이어 선생은 큰 소리꾼이 되겠다는 소망을 가슴에 안고 일로 상경을 결행, 서울에서 여러 소리꾼 스승을 찾으면서 이 땅의 소리의 진수를 전수받았다. 1933년 김창진으로부터 「심청가」. 1934년 정정렬로부터 「춘향가」. 1935년 유성준으로부터 「수궁가」. 1936년 조학진으로부터 「적벽가」. 1937년 박지홍으로부터 「흥보가」. 이렇게 소리에 정진하던 중 목소리가 제 기능을 상실하자 절망 속에 몸부림치다가 자살을 기도, 음독을 일하기도 했다. 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산으로 들어가 독공(獨功, 스승으로부터 배운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소리 공부의 과정)을 되풀이 했다.

1952년(37세)엔 득음을 위해 작심하고 고향집 뒷산의 빈 절터에 허름한 초막을 짓고 백일 동안 소리 공부에 들어갔다. 밥 먹는 시간, 밥 짓는 시간, 잠자는 시간 외에는 온통 소리공부에 바쳐진 날들이었다. 이렇게 소리 공부를 마친 뒤 온몸이 뭇고 몸살이 나서 크게 앓았을 때 부친이 인분즙(똥물)을 구해다 먹여 낫게 했다고 한다.

일제 말기와 해방 공간에(1944년∼1952년)에 선생은 조선음악단, 김연수창극단, 조향창극단, 햇님국극단 등에서 고수, 편곡, 무대 감독, 판소리 편곡 등을 담당하며 일하기도 했다. 이 때 작곡하거나 편곡한 작품으로 「노방초」,「진실로」,「이차돈」,「왕자 미륵이」,「바리공주」,「님은 하나이기에」 등이 있다.

드디어 소리꾼 박동진이 한국의 국악계에 발을 붙인 건 1962년(47세), 국립국악원 국악사보로 임명되면서부터였다. 그러면서 앞에서 밝힌 대로 여러 편의 판소리 완창을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사실 판소리 역사상 아주 중요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에 해당한다. 그 이전엔 대개 소리꾼들이 토막소리에 의존해서 소리의 명성을 유지했지만 선생은 이에 정면으로 맞선 혁신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선생은 1973년(58세),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인간문화재가 되었던 것이다. 「적벽가」는 웅장하고 호방한 소리여서 어지간한 소리꾼의 공력 가지고는 접근하기 어려운 판소리로 최고의 소리꾼만이 해낼 수 있는 소리다. 「적벽가」 예능보유자가 됨으로 선생은 진정한 국창의 명예를 얻게 되었다.

선생의 판소리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바가 있었다. 소리에 들이는 공력도 공력이거니와 청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도 대단했지만 평소의 일과는 소리로 시작하여 소리로 마무리하는 생활이었다. 약주나 친구들과 만나 길게 담소하는 것도 별로 즐기지 않았다. 다만 바둑과 낚시만이 취미생활이었다. 선생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 3~4시간씩 소리를 연습하여 하루를 깨우고 자신을 다스려나가는 습관은 평생 동안 이어나갔다.

국립국악원 재직 시절, 새벽마다 가장 먼저 출근하여 경비원을 깨워 연습실로 들어가 소리 공부를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새벽부터 소리 공부를 하던 습관은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지속되었다. 그래서 선생은 평소 이렇게 말씀하곤 했다. “소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이며 축복이여. 평생을 해온 것인데 하루라도 소리 연습을 안 하고 밥을 먹으면 죄를 짓는 것 같어.”

선생은 기존의 다섯 마당의 소리를 전승하여 완창하는데 그치지 않고, 사설로만 전하는 판소리 일곱 마당까지 복원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변강쇠타령」완창(1970년),「배비장타령」완창(1972년),「숙영낭자전」완창(1974년),「옹고집전」완창(1977년)이 그것이다.

뿐더러 선생은 창작 판소리에도 관심을 가져 「성서 판소리」(1972년),「성웅 이순신전」(1974년)을 발표했다. 「성서 판소리」는 초동교회 조향록 목사의 원유에 의한 것으로 당초 망설였으나 동아방송의 주태익 작가가 쓴 대본을 읽고 예수의 행적에 감동 받아 제안을 받아들이고 소리를 부르는 동시에 선생 자신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입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선생은 「신약 성서」,「구약 성서」,「팔려간 요셉」,「모세전」 등, 성서 판소리를 꾸준히 발표하여 판소리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생에게 ‘판소리 전도사’란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또한 선생은 판소리의 국제화에 대한 일련의 노력도 기울였다. 여러 차례 미주 판소리 공연(1981년 미주 일주 국악 공연, 1982년 미국 LA 성서 판소리 공연)을 펼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굵고도 의미 있는 활동으로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상을 받기도 했다.(두 차례의 서울신문사 문화상: 1960년과 1970년, 제1회 한국문화대상: 1966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1980년, 서울시문화상: 1983년, 두 차례의 한국방송대상 국악인상: 1991년과 2003년, 게일문화상: 1994년, 제4회 동리국악대상: 1994년, 자랑스런 서울시민상: 1994년, 자랑스런 충청인상: 1996년, 제 3회 방영일 국악대상: 1996년)

선생이 고향 공주에 내려와 자리 잡게 된 것은 말년의 일이다. 선생의 나이 83세 때인 1998년(11월 23일) 공주시 무릉동에 ‘박동진 판소리 전수관’을 충청남도와 공주시의 지원 아래 짓고 부터이다. 전수관이 완공된 이후 선생은 전수관에 기거하면서 오로지 후진 양성과 판소리 대중화에 힘쓰다가 2003년 7월 8일 오전 9시경, 88세의 일기로 조용히 세상과 하직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거인다운 예술적 생애를 기려 정부에서는 별세 다음날짜로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그것은 문화계 인물로서는 최대의 영예였다.

선생의 생애를 두고 볼 때, 참으로 장쾌한 한편의 드라마를 연상하게 한다. 굳이 문장 형식을 빌린다면 양괄법(兩括法)의 문장과 같다. 공주 고향에서 출생하고 자라, 외지로 나가 예술적으로 크게 성장하고 활동하다가, 말년에 다시 고향에 날개를 접고 정착함이 그것이다. 생애를 두고 끊임없이 고향 공주를 사랑하고 고향의 문화를 위해 무엇인가 좋은 것을 남기고자 노력함도 탁월했다. 그러기에 오늘날 공주에 선생의 기념관이 세워지고 또 활발히 운영되며 선생의 예술혼이 면면히 살아서 흐르는 게 아닌가 싶다.

   
 
3. 박동진제 판소리
판소리는 동편제(전라도 동북지방), 서편제(전라도 서남지역), 중고제(경기도, 충청도) 등 세 갈래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 분류이다. 간혹 박동진 선생의 출생지가 충청도이므로 중고제로 보는 경향이 없지 않지만 전문가들의 보다 깊은 견해는 선생의 판소리를 중고제 그것에 묶어놓기는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비록 선생이 중고제의 가계(家系)를 잇는 김성옥(金成玉, 1795년~1828년, 김성옥→김정근→김창룡, 김창진)의 손자 되는 김창진(金昌鎭) 문하에서 「심청가」를 사사 받기는 했지만 그 뒤 여러 스승을 찾아 골고루 소리를 습득한 바 있을 뿐더러, 그가 판소리계에 두각을 나타낸 것은 「흥보가」(1968년)를 완창하고 뒤이어 여러 편의 판소리를 완창하면서 부터라는 주장에 의해서이다. 하므로 선생의 판소리는 어떤 한 줄기만을 이은 것이 아니라 여러 스승의 판소리를 종합하고 자기화하여 새롭게 만든 판소리라 보아야 한다. 그래서 박동진제 판소리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된다. 박동진제 판소리. 이 얼마나 기분 좋은 표현인가! 우리 공주가 이런 문화적 자산을 품음으로서 얼마나 깊고 그윽한 도시가 되는가!

박동진 선생은 생전에 훌륭한 어록을 심심찮게 남긴 바 있다. ‘아니리가 판소리의 반이다. 좋은 노래도 10분만 들으면 싫은 것이다. 아니리는 좌중의 분위기를 전환시키기도 하고 자기(소리꾼)도 쉬어야 한다.’ 이것은 아니리의 중요성을 지적한 발언이다. ‘만들 이야기가 많어.’ 이것은 또 창작 판소리에 대한 의욕을 밝힌 말이다. ‘소리를 알게 되니 몸이 따라 주지 않는다.’ 이것은 다른 분야의 예술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철들자 죽는다.’는 말처럼 그 무엇인가의 진수를 알만한 때쯤이면 일생의 기력을 소진한 다음이기 십상이다. 아, 이 안타까움이라니! 이것이 진정 인간의 한계이고 애달픔이다.

선생이 남긴 어록 가운데 가장 선생다운 발언은 ‘무대에서 소리하다 죽는 것이 소원’이란 말씀이다. 소리꾼으로서 이보다 더 욕심이 어디 있을까. 식사모임이 아니면 무대의 규모를 따지지 않고 어떤 자리든 소리꾼으로 섰던 선생이요, 비록 돗자리가 준비되지 않은 자리라 할지라도 불평 한마디 없이 소리를 했던 선생이다. 그토록 소리를 사랑하고 소리에 겸허했다는 이야기다.

선생은 비록 육신의 수명을 다해 세상을 떠났지만 선생이 남긴 예술정신과 예술작품은 여전히 오늘에 남아 우리와 더불어 숨 쉬며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예술의 실체요 그 생명력이다. ‘박동진 판소리 전수관.’ 거기에서는 연중 소리에 대한 전수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명창을 배출하기 위한 전문인 양성반, 전국의 일반시민을 위한 판소리 체험반, 판소리에 대한 각종 행사와 지원활동이 그것이다.

건물은 중앙에 가로로 전수관이 위치해 있고, 오른쪽에 세로로 생활관이 있고, 마당의 왼쪽에 선생의 호를 따서 빌려 ‘인당정(忍堂亭)’이란 건물이 있다. 주로 전수관에서는 교습을 받거나 체험활동을 하고 인당정에서는 휴식이나 야외학습을 하고 생활관은 사적인 생활을 하는 곳이다. (선생도 생전에 이 생활관에서 기거했다.) 이러한 전수관의 아래 구역에 ‘박동진 판소리 유물전시관’을 개관한 것은 선생의 사후 최근(2009년)의 일이다. 여기에 가면 선생의 생애 족적과 함께 판소리에 대한 유용한 정보와 선생의 귀중한 유품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은 판소리 전수관 관장이며 전수조교로 일하는 김양숙 명창이다. 김양숙(金陽淑) 명창은 우선 박동진 선생의 수제자로 선생으로부터 여러 작품을 골고루 전수받은 인물이다. 한양대학교 국악과에서 석사학위를 얻은 학구파이며, 1985년 제12회 전국남원 판소리 명창대회에서 일반부 최우수상을 받으므로 전문적 소리꾼으로 출발했다. 그 이후 여러 대회에서 상을 받았으며 많은 공연활동을 하기도 하고 또한 대학이나 중등학교에 출강하면서 교육활동에도 열의를 보이고 있다. 중요한 경력은 199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전수교육 조교로 지정되었다는 점이다. 명실공이 박동진 소리의 대통을 이은 것이다.

또 한 가지. 공주지역에서 박동진 선생을 기리는 유의미한 행사는 ‘전국 박동진 판소리 명창 명고 대회’를 개최한다는 것이다. 충청남도와 공주시가 협동하여 치루는 행사로 해마다 7월에 열리고 있는 이 대회는 판소리 부문(명창부, dfqksqn, 신인부, 학생부, 유아부)과 고수부문(명고부, 일반부, 신인부, 학생부)으로 나누어 경연을 펼쳐 명창부 대상에게 대통령상(상금 1천만원), 명고부 대상에게 국무총리상(상금 5백만원)이 주어진다. 2000년도에 1회를 개최하여 2010년 11회를 기록하고 있다. 선생의 이름 아래 공주가 전국적으로 주목 받는 날이기도 하다.

“지금도 한가한 날이면 선생님의 쩌릉쩌릉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선생님은 이 창문을 열고 저 건너편 대청마루를 망연히 바라보시곤 했어요. 선생님은 평소 말씀대로 하루도 쉬지 않고 소리 연습에 몰두하셨고, 기력이 쇠하여 제대로 앉아 있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북채를 놓지 않으셨어요. 날이 새기 전에 일어나 당신의 목소리로 만물을 깨우시던 선생님, 세월이 갈수록 선생님이 더욱 그리워져요.”

이것은 선생의 수제자이며 박동진 판소리 전수관 관장인 김양숙 씨의 말이다. 한 예인으로서 이만한 제자 한 사람 세상에 얻기가 힘들다. 이만한 사제 간의 인연도 흔치 않은 일이다. 선생이야말로 돌아간 다음에까지도 당당하고 행복한 예술인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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