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섭 (前청와대 비서관, 前공주시장 후보)
"비단강 감도는 푸른 기슭에, 곰나루 천년 어린 역사를 안고..." 내가 다닌 우성중학교 교가는 이렇게 시작한다.

‘비단강’은 금강의 풀이인데, 그땐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불렀던 것 같다. ‘금강산’은 쇠 금(金) 자를 쓰나 ‘금강’은 비단 금(錦) 자를 쓴다. 충청남도 중심부를 두루 통과하면서 한강, 낙동강에 이어 한반도에서 세 번째로 긴 이 강을 길게 좍 펼친 비단에 견준 것이다.

만약 금강이 없었다면 웅진(고마나루)도 없었고, 따라서 오늘의 공주도 없었을 것이다. 웅진이 백제 왕도가 된 것, 조선시대 충청감영이 놓아진 것, 1932년까지 충남도청 소재지였던 것, 모두 천혜의 금강 물길 덕택이었다. 석장리에서 한반도 최고의 선사시대 인류 유적이 발굴된 것도 강가에서 살아야 했던 그들에게 금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금강은 공주를 있게 하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너그럽게 품어준 존재였다. 하지만 이른바 4대강 공사로 공주보가 생긴 이후 달라졌다. 강은 더 커졌지만 녹조가 성행하고 물고기가 떼로 죽고 큰빗이끼벌레가 창궐한다. 생명의 강이 괴물의 강으로 변하고 있다. 강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심정도 예전과 사뭇 달라졌다.

금강 덕분에 사는 공주사람들에게는 강에 얽힌 추억이 수없이 많다. 늦봄부터 초여름까지 가뭄철에는 강물이 크게 줄어 좁고 긴 비단 모양이었다. 하지만 장마철이면 큰물이 져서 농작물은 물론 사람과 가축들이 상했다. 시뻘건 황토물이 진군하듯 흐르는 모습은 비단내가 아닌 야수의 그것이었다. 놀란 사람들이 철교 위에 모여들여 호호탕탕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정안천이 금강과 만나는 전막 부근에서는 떠내려온 생활도구나 돼지 같은 가축을 건져냈다.

먹는 물로도 쓰던 금강에서 1970년대 후반부터 물에서 냄새가 나고 기형 물고기가 잡히기 시작했다. 상류의 공장들에서 마구 흘리는 오폐수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도 해마다 큰물이 한바탕 쓸어간 후 새로운 생태계가 시작되었다. 공주보에 물을 가둔 2011년부터는 그마저 그쳤다. ‘금강물도 고이면 썩는다’는 진리를 확인하고 있을 뿐.

그 시절 유구천, 정안천 등 지천에서는 고기잡이가 노상 잘되었다. 동네마다 고기를 잘 잡는 친구들이 한둘씩 있어서 '어부'로 불렸다. 투망 같은 제대로 된 어구가 없어도 냇물 풀숲을 뒤져 칠어, 갈갈이, 쏘가리, 모래무지 등을 곧잘 잡아왔다. 통천포 버드나무 숲에 솥단지를 걸어놓고 ‘어부’들이 잡아온 물고기를 다듬고 집에서 가져간 온갖 양념을 넣어 매운탕을 끓였다. 그때 먹던 민물매운탕과 어죽은 평생 우리 입맛의 기준이 되었다. 공주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렇게 금강과 어울려 사는 방법을 잘 알았다. 지금 금강 본류에서는 이런 천렵이 아예 불가능하다.

고등학교시절에는 꼭 곰나루 백사장으로 행군을 나갔다. 교련 행군뿐 아니라 시내의 초․중․고등학교 소풍은 대개 곰나루였다. 학교 운동장보다 몇 배나 컸던 백사장과 솔밭은 우리들의 낙원이었다. 모래밭에서 강아지처럼 천방지축으로 뛰어놀다가 풍성한 솔밭에서 도시락을 먹고 장기자랑을 하던 추억을 뉘라서 잊을까.

곰나루 말고도 금강백사장(지금의 신관둔치공원)이나 우성초등학교 앞 냇물 같은 곳에는 여름 한 철 작은 ‘강수욕장’ 유원지가 생겼다. 초등학교 수업만 마치면 냇물 가서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강바닥이 갑자기 깊어진 곳이 있어 해마다 익사사고가 났다. 친구들과 작당해서 막걸리를 받아다 놓고 백사장에서 놀던 기억이 아련하다. 4대강 공사로 없어진 백사장을 잊지 않기 위해 한쪽에 백사장 유원지를 재현해 봤으면 좋겠다.

1933년 금강교가 처음 생기기 전까지 공주의 강남북 땅을 이어준 것은 오로지 뱃길이었다고 한다. 배다리를 놓고 화물과 자동차가 오가던 때도 있었다는데, 아마 장마철이면 무용지물이 되었을 것이다. 앞으로 금강에 레저용 쾌속 동력보트가 생기는 것도 좋지만, 옥룡동과 시목동을 잇는 장깃대나루, 곰나루와 평목리를 건너는 고마나루에 나룻배 체험장을 만들면 어떨까. 직접 노를 저어 예전 뱃길을 따라가보면서 그대로의 자연을 존중하고 옛적의 어려움을 깨닫는 소중한 체험이 되지 않을까.

좋았던 그 시절의 자연 풍광과 사람살이를 추억담으로 들려주는 어르신들이 많다. 20, 30대 세대까지도 4대강 공사 이전의 금강을 추억한다. 머지않아 금강을 살리기 위해 어떤 결단을 하는 때가 분명히 올 것이라고 믿는다. 사람이 근접하기 어려운, 막힌 금강이 아니라 가까이 가서 만져보고 몸을 담가볼 수 있는 깨끗한 금강이 어서 돌아오기를 바란다. 이것을 마다할 공주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뿐 아니라 미래세대들도 영원히 함께 살아가야 할 금강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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