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어교수 연남(燕南) 김기평(金基平) 선생

 
50년 전의 은사님
김기평 선생님은 내가 공주사범학교 학생일 때 선생님이셨던 분이다. 국어 과목을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1962년도. 벌써 50년 가까운 옛날의 일이다. 지금은 이미 여러 선생님들이 세상에 계시지 않을 뿐더러 공주지역에 살고 계시지 않으니 김기평 선생님은 공주에서 가까이 뵈올 수 있는 유일한 은사님이시다.

잠시 선생님의 연보를 살펴보면 선생님은 1921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시어 대구사범 심상과(본과)를 졸업하시고 잠시 초등교단에 계시다가 공주사범대학 국어과를 졸업하시고 공주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교사, 공주사범학교 교사를 거쳐 공주교육대학교 교수로 정년퇴임을 하시고 지금은 댁에서 공부만 하고 계신 학자분이다. 정년퇴임 후에 『논어 강독』, 『맹자 강독』『대학․중용 강독』 등의 책을 발간하셨으며 현직에 계실 때 충남문화상(학술부문)을 수상하기도 하셨다.

선생님과 내가 보다 가까운 인연이 된 것은 학창 시절보다는 학교를 나와 교직생활을 하면서 공주교육대학교 부설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선생님은 내가 부설초등학교로 전입해 오는 일을 후원해주셨을 뿐더러 부설초등학교에서 근무하는 동안에도 여러 가지로 돌보아주시고 가르침을 주시고 그랬다. 선생님은 성품이 온후하시고 인자하시고 고요하실 뿐더러 남의 신세를 도통 지기 싫어하시는 분이라서 내가 어쩌다 시집이라도 내어 드리면 어떤 방법으로든 꼭 시집 값을 쳐주시는 분이셨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 하시곤 했다.

“내가 자네에게 책 빚을 많이 지고 있네. 언제든 그 빚을 갚고 싶네.”
'책 빚'이라? 처음 나는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선뜻 알아듣지 못했다. ‘책 빚’이란 말은 선생님한테 처음 들어서 배운 말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 말씀을 실천하셨다. 정년퇴임을 하신 뒤 앞에서 밝힌 세권의 책인 사서(四書)를 주해서(註解書)로 출간하여 등기우편으로까지 보내주셨던 것이다. 정년퇴임을 하신 지 16년 만의 일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약속의 실현이시다. 참으로 귀한 일이며 참으로 귀한 어른이시다. 꼭 이 어른이 나의 고등학교 시절의 은사님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공주 땅에서 이런 어른과 함께 공주 사람으로서 오늘도 숨을 쉬면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끝없이 자랑스럽고 감사하고 가슴 따뜻해지는 마음이다.

지금도 선생님이 공주교육대학교에서 정년퇴임식을 하던 날(1986년 8월 28일)의 기억이 생생하다. 선생님은 그 흔한 퇴임문집도 끝내 사양하셨다. 당신은 결코 훌륭한 학자도 아니고 특별한 학문적 업적도 남긴 바 없으므로 퇴임문집을 받을 까닭이 조용히 말씀하시고는 효를 주제로 한 특강 한 시간으로 당신의 교직생활을 마무리하셨다. 그 때 선생님께서는 현직에 있을 때 맘껏 공부를 못했으니 집에 있으면서 공부를 하겠노라 말씀하셨다.

그 때 나는 제자를 대표해서 선생님께 송시 한편을 지어서 읽어드렸다. 시의 내용은 언젠가 나에게 선생님께서 메모해주신 『명심보감』의 성심편(省心篇)에 나오는 글귀인 ‘사향노루는 스스로 향기로운데 어찌하여 일부러 바람을 향해 마주설 것인가(有麝自然香이니 何必當風立가)’에 기본을 둔 시였다. 잠시 다시 옮겨보면 이러하다.

깊은 산속/ 숨어사는 사향노루/ 맑은 물/ 푸른 바람/ 향기론 풀만 뜯어/ 스스로 향기로운/ 사향노루// 어찌하여 일부러/ 바람을 향해 마주서리요/ 어찌하여 향기를/ 자랑하리요// 알아주지 않아도/ 칭찬해 주지 않아도/ 그는 이미/ 스스로 향기로운/ 사향노루인 것을// 선생님/ 김기평 선생님/ 선생님은 그야말로/ 숨어 사는 사향노루// 느긋하다 게으르지 않고/ 천천히 천천히/ 바른 길로만 걸어오신/ 선생님은 사향노루// 어찌하여 향기를/ 자랑하리요/ 어찌하여 이름을 팔고자/ 조바심하리요// 선생님께서는 몸소/ 스승이 무엇이고/ 선비가 무엇인가를/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몸소/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물러나야 하는가를/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본보이셨습니다// 선생님/ 김기평 선생님/ 저희들도 한 마리씩/ 작은 사향노루가 되겠습니다// 외로워도 외롭다/ 말하지 않고/ 슬퍼도 슬프다/ 투정하지 않는/ 깊은 산 속 향기로운/ 사향노루가 되겠습니다.

―「사향노루가 되겠습니다」 전문

모처럼 선생님을 뵙고
실은 자주 찾아뵙고 선생님의 사시는 근황도 살피고 계속해서 가르침도 받고 그랬어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불민하고 지혜롭지 못할 뿐더러 마음의 뿌리가 깊지 못하여 그러지를 못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그랬다. 30년 공주에 살면서 한 두 차례 댁으로 찾아뵈었을까? 공주시 봉황동 옛 거리, 선생님 앞으로 지나며 아직도 선생님이 저 집에 살고 계시거니 그런 심정으로 보낸 오랜 날들이 있었다. 한참 전에는 대문 앞에 나와 다 닳은 비로 도로를 쓸고 계신 모습을 자주 뵈올 수 있었는데 근자에는 그런 모습도 뵙지 못하고 어쩌다 길거리에서 뵙는 것이 고작이었다. 항상 마음 한 구석 송구스럽고 섭섭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 추석을 맞아 큰맘 먹고 한번 선생님 댁을 찾은 일이 있었다. 차마 빈손으로 갈 수 없어 고기를 조금 끊어가지고 가서 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대문이 열리고 선생님이 나오셨다. 여전해 보이는 모습이셨다. 그동안 마당 안의 감나무가 더욱 울창하게 자라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선생님은 언제나 그렇듯이 온화한 얼굴과 나직한 말씨로 왜 이런 것을 들고 왔느냐 나무라듯 말씀하시었다.

그로부터 한두 주일이 지난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문득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식사를 한번 같이하자는 말씀이셨다. 마땅히 모실 일이라서 좋으시다고 대답을 드렸다. 장소가 어디가 좋겠느냐, 그래서 공주의 올드 맨들이 자주 가는 이학식당이 좋겠노라 말씀드렸다. 그렇게 해서 2009년 10월 19일 오후 6시에 이학식당에서 뵙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놀란 것은 선생님께서 낮 시간에 미리 식당에 가시어 음식 값을 미리 내셨다는 사실이다. 남한테 신세 지는 일을 지극히 싫어하시는 선생님의 담백한 성격이 다시금 그렇게 하도록 시키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2010년 신년호 <공주문화>에 선생님의 인터뷰를 따서 실으려고 했던 참이었다. 음식 값 부분은 송구스럽게 되었지만 매우 잘된 일이다 싶었다. 그래서 사진을 찍는 우리 문화원의 김민영 양을 대동하여 선생님과 셋이서 이학식당에 가 모처럼 설렁탕을 먹으면서 선생님의 맑은 말씀을 듣기로 했다. 말씀에 선뜻 응해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리면서 선생님과 나눈 대화를 여기에 옮겨보기로 한다.

대화하는 동안 선생님은 지극히 말씀을 아끼시는 것 같았다. 언제나 그렇듯 조심스럽고 겸허한 선생님이셨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말씀은 더할 나위 없이 온건하면서 정확하고 힘이 있었으며 삶의 원리와 그 근본에 닿아 있다는 것을 여러 차례 느낄 수 있었다. 선생님 앞에 되잖은 이런 저런 말씀으로 너스레를 놓은 스스로가 부끄럽다는 생각을 내내 하게 되었다. 이 나이에 이르기까지도 나에게 삶의 방향과 가르침을 주실 수 있는 은사님이 계시다는 데에 나는 크나큰 만족감과 행복감을 느끼면서 다시 한 번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를 올리는 바이다.

선생님의 아호는 연남(燕南)이시다. 당신이 태어나신 날이 음력으로 제비가 오는 삼월 삼짇날이었으므로 그리 지어셨다고 한다. ‘제비 오는 남쪽’이거나 ‘남쪽에서 오는 제비’란 뜻일 것이다. 아호 치고서는 많이 사랑스럽고 수줍은 아호이다. 어쩌다 공주 시내에서 뵈면 아호를 닮아서 그런지 선생님은 아직도 매우 수줍고 소년 같은 모습을 하고 계시다. 도무지 구순의 어른 같지가 않다. 공주 시내에서 이런 선생님을 마나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고 반가운 일이고 고마운 일이다. 부디 선생님께서 앞으로도 더욱 건승하시어 공주 사람들 곁에 머물면서 향기로운 삶으로 이정표가 되어주실 것을 빌어마지 않는다. 이런 선생님을 모신 나는 분명 행복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겠다.

 
선생님과의 인터뷰
나태주: 선생님, 제가요, 선생님 아시다시피 공주문화원장 일을 보고 있잖습니까. 저희 공주문화원에서 내는 <공주문화>란 소책자 2010년 1․2월호에 선생님 말씀을 듣고 싶었어요. 지난번엔 긍암 김연뢰 선생님 찾아뵙고 말씀 들었고요. 인생의 원로 중에서 삶의 지표가 되는 말씀을 듣고 싶었는데, 사실 선생님은 사범학교 때 저희 국어과를 가르쳐주신 선생님이셨잖아요.

선생님: 3학년 때지?

나태주: 그러시고, 선생님은 교육대학에 계속 계셨고, 그 뒤에 저희들은 모교가 없어졌어요. 사범학교가 바꾸어 교육대학이 되었으니 모교도 없어지고 선생님도 없어져 애달프게 되었는데 선생님이 유일하게 저희들 곁에 계시어 편안하고 좋았지요. 교대 부설초등학교 교사로 제가 들어 올 때도 선생님이 교무과장 하시면서 발을 놓아주셨고 그 뒤에도 계속 돌보아주셨는데 제가 대학교 교수를 좀 해보고 싶었는데 그런 때도 걱정을 해주셨는데 잘 안 되었고, 그러나 이제는 저도 교직에서 정년을 하고 말았으니 부질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지요. 저는 그 바람에 시를 많이 쓰게 되어 좋았다 싶기는 합니다. 선생님, 오랫동안 사실은 그냥 살아계신다고 해서 살아계신 것이 아니고 맑은 정신으로 계속 계시어야만 살아있다고 생각되는데 선생님은 바로 그렇게 맑게 세상을 오래 세상을 사셨지요. 그동안 많은 세월이 변했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떠세요?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사람 사는 방법이 많이 변했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떠세요? 답답하시지요?

선생님: 응? 글쎄.

나태주: 그러면 요즘은 선생님 어떻게 소일하세요?

선생님: 정년 후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한문책에 주를 달아서 해석하는 책을 만드는 일이야. 내가 젊어서 한문 공부를 할 때 주(註)까지 읽어야지 그 글을 뜻을 잘 알 수 있었는데 그런 주까지 해석해놓은 참고서가 없었어. 지금은 그런 참고서가 더러 나오기도 했어. 성백효 교수가 낸 책이 더러 있어. 그래서 나는 한문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주까지 해석해놓은 책을 내야 하겠다 그런 생각을 정년퇴임하기 전에 했었어.

선생님: 그 말씀 하셨어요. 퇴임식 때 선생님께서는 나는 소슈르 같은 언어학자도 아니므로 논문집을 받을 생각이 없다 해서 안 받으셨고 정년 후에 공부를 하셔서 책을 내시겠다 했는데 그 뒤 외람되게 선생님께서 등기 우편으로 보내주신 책을 세권이나 저도 받았지요.
선생님: 내가 정년 때 그런 말을 했던가?

나태주: 하셨어요.

선생님; 난 전혀 기억을 못하는데.

나태주: 그러시고 선생님은 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나태주한테 책 빚을 많이 졌는데, 그 책 빚을 좀 갚겠다, 그런데 그말 씀을 제가 처음엔 못 알아들었습니다. 책 빚이 뭔지. 빚 하면 돈이거든요. 글 빚이란 말은 또 들어봤지만요. 글 빚 지고는 못 산다, 쫒기는 마음이라서 못 산다 그랬었거든요. 책 빚이란 말은 선생님한테 처음 들었고 그 뒤 선생님께서 책 빚을 갚으셨구나, 그렇게 생각했지요. 공주에서도 선생님 기억하고 말씀하는 사람 이제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중회 같은 사람은 자기가 대학교 교수 정년 하고 살아야 할 모델이 선생님이다 그렇게 말을 하기도 하지요.

선생님: 아, 그 때 내 얘기 했다는 게 구중회 교수여?

나태주: 네, 구중회 교수가 공주에서 두 분을 좋아했습니다. 선생님과 또 한 분의 학자였지요. 선생님을 뵐 때마다 사람이 젊어서도 잘 살아야 하지만 나이 들어서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마지막이 중요하다는 것은 저도 예전엔 몰랐던 일이지요. 영화의 끝 장면이 얼마나 중요한가? 영화가 아무리 앞부분이 다 좋아도 끝 장면 처리를 잘못하면 영화 전체가 죽어버리게 되지요. 선생님, 요즘도 계속해서 공부하고 계시지요? 그전에 뵈었을 때 보니 댁의 문간방에서 공부하시던데 지금도 거기서 공부하시나요?

선생님: 응.

나태주: 몇 년이나 그렇게 공부하셨어요?

선생님: 우리 집 서제가 2층에 있거든. 2층 보일라가 고장 나서 2층을 폐방(廢房)하고 아래층에서 그렇게 지내.

나태주: 문간방, 거 환하시던데, 책상이 하나 있고 의자가 하나 있고 아무것도 없더라구요. 지금도 그렇게 아무 것도 안 놓으셨어요?
선생님: 지금도 뭐, 같지.

나태주: 절간 같으세요.

선생님: 허허…

나태주: 옛날에 박정희 대통령이 쓰던 방이 그렇게 아무 것도 없는 벽에다가 아무것도 걸지 않은 방이었지요. 사실 뜻이 있고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아무것도 방에 없잖아요. 거기서 선생님 하루에 몇 시간이나 공부하세요?

선생님: 아침부터 밤 12시까지 공부해. 낮에 서예학원에 가는 시간이 1시간 조금 넘지.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 1시간 반쯤 될 거야. 그것 빼고서는 식사시간, 하루에 두 번을 하지, 나는. 아침 11시 전후에, 저녁 6시에 밥 먹고 늘 책상에 붙어있고 그러지. 그렇게 결심을 해서 사서(四書)는 내가 내서 보내줬지? 그러고 지금 삼경(三經)을 하는데 『주역(周易)』, 『서경(書經)』은 끝냈고 지금은 『시경(詩經)』을 하는 중이야. 3분지 1가량 했어. 죽기 전에 그걸 다 마치고 죽어야 하겠는데 하늘이 명을 허락해 줄지 모르겠어.

나태주: 시력은 괜찮으세요?

선생님: 시력이 … 안경 끼고, 확대경, 확대경 가지고 잔글씨를 보고 그러는데 확대경이 문방구점에 나오는 확대경 가지고는 잘 안되데.

나태주: 아, 그러면 어떻게 하시나요? 안경점에 가서 맞추어야 하나요?
선생님: 안경점에는 없어. 보통 확대경 밖에는 없고, 서울에 남대문시장에 확대경 취급하는 안경점이 있다고 하는데 거기에 가볼까 그래.

나태주: 선생님, 죄송하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몇 년생이신지요?
선생님: 1921년 생. 내년이면 구십이 되네. 그 전에 부속고등학교 근무할 때 일흔 두 살만 살면 족하다 그랬는데 이게 어떻게 장수 바람이 불어가지고 그렇게 살고 있어.

나태주: 선생님처럼 (여러 가지로 괴로우시겠지만) 나름대로 좋은 일을 하시면서 공부하시면서 사시는 것은 아름다우시지요. 아주 고마우신 일이고 아름다운 일이지요. 에머슨이라고 미국의 목사이며 시인이었던 분은 ‘성공’이란 것은 세상을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하나님으로 받은 세상을 좋은 세상으로 바꾸어놓는 것이 성공이다 그랬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좀 좋게 바꾸어 놓는 거지요. 선생님 같은 경우는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하실 수는 없는 일이고 지금 말씀하신 대로 후학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일도 하셨지만 공부를 하셔서 사서를 번역하시고 삼경을 번역하시는 것은 그야말로 주가 없는 책들을 주를 달고 그렇게 하시는 것은 에머슨이 말한 대로 성공한 일이 아닌가, 늘 저는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성공한 사람은 높은 자리에 있고 돈 많고 거들먹거리는 대는 사람이 아니고 세상을 자기가 받은 것보다 좀 낫게 하는 사람이다 그럴 때 선생님이 바로 거기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사는 것이 성공한 삶인지 잘 모르겠지만 난 정년을 할 때 그런 생각을 했어. 내 공부를 해야 하겠다고.

나태주: 정년 하신지 몇 년 되셨지요?

선생님: 지금 여든 아홉이고 예순 여섯에 정년을 했으니까 23년 되었네.

나태주: 실은 선생님 이야기를 제가 글로 써서 제 책에 넣은 일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약속」이란 제목으로 라고 책에 썼지요.
선생님: 아, 그랬어?

나태주: 오늘은 문화원 인터뷰로 제가 글을 만들어서 신년호에 사람이 어떻게 살 것인가, 세상의 길이 보이지 않으니까, 오래 사시면서 공부를 계속하신 어른으로부터 세상을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지 듣고 싶었습니다. 선생님, 혹시 저 같은 사람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좋겠다고 해주실 말씀이 있으면 해주시지요.

선생님: 난 정년을 할 때 이런 생각을 했어. 정년 할 때까지는 공직자로서 공직을 위해서 성실하게 근무를 해야 했기 때문에 나 개인을 위한 공부를 잘 할 수 없었어. 그래서 정년을 하면 다른 사람들처럼 대학에 강의시간 얻어 나와서 강의하는 것을 끊어야지 생각했었지. 더구나 강의시간 얻지 못해 애타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있잖아. 대학원 졸업하고 박사 학위 가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시간을 갖지 않고 내 공부를 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있었지. 무엇을 하면 사람으로 태어나서 남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봉사할 수 있겠는가 생각했지. 『중용(中庸)』이란 책에 이런 말이 있어, ‘치곡(致曲)’이라고. 자기가 가진 일부분을 잘 연마하면 좋은 곳에 다다른다는 뜻이지. 그 얘기가 뭐냐면 ‘성인이 아닌 대현(大賢) 이하의 보통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착한 단서가 나타나면 그것을 키워나가라’, 그 말씀이야. 지금 보통 말하면 특기교육과 통하는 얘기여.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기를, 그것만 잘 키워나가면 성공한다는 말이여.

나태주: 아, 『중용』에 그런 말씀이 있군요.

선생님: 응. 『중용』에 있지. 중용 23장의 인도(人道), 그러니까 사람 사는 길을 가르치는 글인데 여기서 나오는 굽을 곡(曲)자가 중요해. 여기서 곡자는 굽었다는 뜻도 되지만 일부분이라는 뜻도 있어. 자기가 잘하는 것을 자꾸 미루어 키워나가면 나중에는 그 도를 환히 깨달을 수 있다, 그 얘기여. 성인의 경지에 거기 이를 수 있다 그 얘기여. 내가 가지고 있는 잘하는 것 그것이 무언가 그것을 생각할 때 내가 한문 공부할 때 주까지 해석된 책이 없어 그것을 퍽 아쉬워했기 때문에 그것을 내가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해서 죽을 때까지 그 일을 하고 있는 거여.

나태주: 그 말씀이 저희에게 좋은 교훈 말씀이 되네요. 너희들도 자기에게 열린 곳, 좋아하는 곳, 잘할 수 있는 곳, 특기 그것 가지고 열고 나가거라, 그 말씀이시군요.

선생님: 그려, 그려. 나 원장으로 말하면 시를 짓는, 글을 짓는 남다른 재주를 타고 났으니까 그 길을 죽을 때까지 자꾸 밀고 나가야 할 거야.

나태주: 아까 말씀하신 성인의 도까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시를 쓴지 40년이 되었습니다. 연수가 많다보니 소설도 조금은 이해되고 평론도 이해되고 음악이나 그림도 이해가 조금쯤 되는 것 같습니다. 시를 보듯이 그림을 보고 화가가 이런 점에서 그렸겠구나, 알 수 있습니다. 화론집을 보면, 예를 들어 피카소 같은 사람도 이 대목에서 이렇게 되었구나, 그렇게 이해가 됩니다.

선생님: 그려, 응, 그려.

나태주: 아까 말씀해주신 ‘미루어’가 하나의 공이처럼 아주 좋은 단서가 되겠군요.

선생님: 그러니까 시만 전공해나가도 시만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도 깨달아 아는 거지.

나태주: 그것이 옛날 성현이나 옛날 어른들의 공부하는 방법이신가요?

선생님: 응.
나태주: 그런 걸 우리 젊은 사람들도 알아야 하는 건데… 하나를 가까이 하고 나가보면 나머지를 안다는 것,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보면 낮은 봉우리들이 다 보이듯이 모든 것이 그런 거군요. 예를 들어 시로서 나름대로 정상에 올라간 사람은 그림 그리는 사람하고도 작곡하는 사람하고도 편안하게 만나게 되지요.

선생님: 그려, 그려.

나태주: 선생님 말씀을 들어보면 세월에 따라 다르게 들이는 깊이와 울림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선생님, 식사는 잘 하시지요?

선생님: 응.

나태주: 사모님도 건강하시지요?

선생님: 다리가 불편해. 무릎 관절 양쪽 다 수술했어. 허리도 아프고…

나태주: 아, 그러시군요.

선생님: 한문이란 글이 참말로 어려워.

나태주: 선생님이 좀 불편한 상대를 붙잡으셨어요. 한문요.

선생님: 글을 만든 사람은 비상한 머리로 생각을 해가지고 글자를 만들어냈는데, 그 글자를 일반 사람들이 배울 수가 없어. 한문으로 된 글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공부해서 쉬운 말로 전해줄 필요는 있는데 그걸 옛날처럼 모든 사람들이 공부할 필요는 없어. 한문공부는 어려서부터 공부해가지고 머릿속에 다 들어 있어야만 해. 공주에서 볼 것 같으면 긍암 김연뢰 선생 같은 분이 그런 분이지. 그래야 한문을 보고서도 금방 읽어낼 수 있고 그런데 나처럼 일반 교육을 다 받은 다음에 나이가 들어 공부하면 이해는 되지만 외워지지를 않아. 내가 번역하자면 성백효 교수(한국고전번역원)같은 이가 번역해놓은 책을 보고 그러는데, 예산 사람이야. 김연뢰 선생한테 해석하는 것도 들어보고 사전을 찾아가지고 다시 그걸 말이 되게 써야 하거든. 그러니까 시간이 굉장히 걸려. 『시경』을 보면 글자 찾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몰라.

나태주: 안 쓰는 글자라 그런가요?

선생님: 안 쓰는 글자도 많지만 물건 이름, 나무 이름이라든지 꽃 이름이라든지 그런 글자를 찾아보면 어떤 것이 거기에 쓰이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워. 예를 들어서 메뚜기라고 뜻을 나타내는 글자도 그 속에 여치도 들어가고 그래. 비슷한 것을 그 글자로 나타내기 때문에 어려워.

나태주: 그러시군요. 선생님, 마지막으로 옛날 선생님의 학생이었던 저에게 들려주실 말씀이 없으신가요?

선생님: 응, 사회활동이라든지 문화원장 하는 것도 좋지만 나 원장도 자기 공부를 하는 것이 중요해. 자기 공부를 하는데 시간을 많이 쓰라고 말해주고 싶어.

나태주: 예, 선생님. 고맙습니다. 앞으로 살아가는데 좋은 지침으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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