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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2.13  20: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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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 로렌스 겨울 이야기... 소설가 김채원

겨울이야기

                                                                             D.H. 로렌스

어제 들판은 오직 흩어지는 눈발로 희부옇더니
지금은 가장 긴 풀잎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깊은 발자욱은
눈을 덮고 흰 언덕 끝 솔밭을 향해 걸어갔구나.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안개의 엷은 휘장이 검은 숲과 희미한 유자빛 하늘을 가렸기에
그러나 그녀가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초조하고 차갑게, 흐느낌 같은 것이 싸늘한 한숨에 스며들면서
피할 수 없는 이별이 더욱 가까워질 뿐임을 정녕 알면서도
왜 그녀는 그렇게 선뜻 오고 마는 걸까.
언덕길은 험하고 내 걸음은 더디다.
내가 할 말을 알면서도
왜 그녀는 오는 걸까

 

겨 울 이 야 기

                                                                                    소설가 김채원

이 시를 어느 잡지에서 보았을 때 가위로 오려 놓았다.
그러다가 시간이 한참 흐른 뒤 무엇을 찾던 중 해묵은 공책 갈피에서 빠져나와 방 안에 굴러다녔다. 무엇인가 하고 주워 읽어 보았고 그리고는 일기장에 스카치테이프로 다시 붙여 놓았다.

‘겨울이야기’의 정경은 왠지 모르게 사람의 가슴을 쥐어뜯는다.

가슴을 손 하나가 와서 거머쥐는 것 같다. 그저 단지 눈 들판 저쪽으로 사라져 간 보이지 않는 여자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눈 들판 저쪽으로 사라져 간 그녀를 쫒아서 험한 언덕길을 더딘 걸음으로 걷고 있는 남자가 있다.

우리는 여기서 벌써, 그러니까 두 남녀의 뒷모습에서 피할 수 없는 이별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

아니 그보다 첫 연 “어제 들판은 흩어지는 눈발로 희부옇더니”에서부터 이별의 감정이 훅 끼쳐져 오고 있다.

이러한 감상은 우리들 마음속에 이별의 감정이 이미 내재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아마도 언제 어디서나 이별을 느끼며 살고 있을 뿐인지 모르겠다.
한 장의 스케치가 저절로 그려진다.

그녀의 발자국만 찍혀 있음에도 그녀의 실루엣아 내게 보인다.
그 여자가 서양여자인지 동양여자인지의 구분은 별 의미가 없다. 저 검은 숲이 동양의 숲인지 서양의 숲인지도, 눈 또한 그냥 자연의 눈인 것은 인간 근원의 감정과 맞닿아 있는 때문이리라.
 

그녀의 모습은 깊고 고독하다.
그녀의 깊은 발자국은 눈 위를 밟고 지나감과 동시에 심장을 밟고 지나가고 있다. 흐느낌, 싸늘한 한숨, 초조함, 이런 감정이 풍경에 마저 전달되어 풍경 자체가 시름에 빠져 탄식하는 것 같다.
그리고 한 남자가 그녀가 사라져 간 눈 들판 저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그는 이별의 말을 하기 위해 힘든 발걸음을 떼어놓고 있다. 그들이 처음 만난 기쁨의 순간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어떤 식으로 사랑이 싹터 어떤 빛깔로 지속되었을까. 그 기간은 얼마였으며 그리고 왜 이별하는 것일까.

왜 어째서 결국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일까.
이런 의문들은 인생 전반에 대한 의문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에는 해답이 없으며 그저 오직 통과하여 살아 낼 수밖에 없는 불가사이한 삶이 있을 뿐이다.

D.H. 로렌스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작가다.
그의 에세이는 너무 극명하고 아름다워 읽노라면 숨이 가빠진다.
“미는 일종의 체험이지 그 아무것도 아니다. 미는 감지된 그 무엇이며 절묘함의 만열감(滿悅感 )이거나 공감된 절묘감이다. 우리들을 괴롭히는 것은 우리의 미감이 심하게 상처를 입고 둔화되어 있어서 최고의 것을 모두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미란 체험”이라는 이런 정의- 이 세상의 삼라만상을 제대로 정돈해 놓으며 세상 저 속에서 정수를 건져 올려놓는 그와 같은 작가가 있기에 우리는 그의 날개 밑에서 이리도 귀한 선물을 얻어 가질 수 있는 것이리라.

우리의 미감이 심하게 상처를 입고 둔화되어 있어서 최고의 것을 모두 놓치고 있다는-

이 말에서 어떤 위안을 느끼며 무릎 꿇고 싶어지지 않는가.
그가 얼마나 드높은 이상에 그의 머리를 두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분명 최고의 어떤 것이 있을 것임에도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여 지내고 마는 이 나날의 인생에 대해 갑자기 몸부림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앞의 시에서 느끼게 되는 감상이란 바로 ‘공감된 절묘감’인 듯하다.

우리들 저마다 가슴속에 각인되어 있을 스케치,
D.H 로렌스는 남녀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랑은 현세의 행복이다. 그러나 행복은 완전무결한 완성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로 융합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융합이 있으면 반드시 그와 동등한 분산이든 있게 마련이다.
사랑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결합되어 환희와 찬미가 일체가 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이전에 흩어져 있지 않았다면 결합은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 일단 완전한 결합이 이루어지고 나면 더 이상 사랑의 진전은 있을 수 없다. 이런 경우에 사랑의 율동은 조류처럼 완성된다. 만조가 있으면 간조가 있어야 한다. 융합은 분리를 전제로 한다.“

형제애,인류,신을 향한 초월적인 사랑에 대해 그는 극명하게 쓰고 있으나 이 시에 해당하는남녀의 원초적 사랑, ‘융합은 분리를 전제로 한다’에 속한 부분일 터이다.

분리가 되고 나면 새로운 융합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별의 아픔으로 소진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일단 분리된 자아란 새로운 융합을 꿈꾸게 되는 것이리라. 이것이 자연의 이치인가보다. 우리는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으며 새로운 솟구침을 꿈꾸며 기다려야 하는가 보다. 그리고 거기에다 구원을 두어야 하는가 보다.

그런다 한들, 그것을 알고 있다 한들 우리가 갖게 되는 이 정밀(靜謐)한 애착, “내가 할 말을 알면서도 그녀는 왜 오고야 마는 걸까”하는 끝 연이 말해 주는 허를 찌르는 듯한 인생의 수수께끼, 그리하여 저렇고 깊고 고독한 모습으로, 한숨과 흐느낌으로 읊어 대는 이 ‘겨울이야기’에서 나는 종교보다 더한 위로를 얻는다.

소설가 김채원 소개

1946년 경기 덕소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서양학과를 졸업하였다. 1973년 '현대문학'에 '밤인사'로 등단하였다. 작품집으로 자매집 ▲먼 집 먼 바다, ▲ 초록빛 모자, ▲ 달의 몰락 등이 있다. 1989년 '겨울의 환'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나를 매혹시킨 한편의 시(문학사상사)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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