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김정섭 (前 공주시장 후보)

▲ 前 공주시장 후보
천주교 성인 중에 토마스 모어(1498~1535)라는 분이 있습니다. 잉글랜드 왕 헨리 8세가 왕비 캐서린과 이혼하려 했으나 카톨릭 교회법이 허용하지 않아 교황 클레멘스 7세와 대립하던 때, 그는 대법관(대법원장)직에 있었습니다.

헨리 8세는 두 번째 왕비 앤 불린(영화 ‘천일의 스캔들’, 드라마 ‘튜더스’의 주인공)과 결혼하는 데 협조하지 않는 신하들을 차례로 처형했습니다. 그는 6번이나 결혼하고 그중 3명의 왕비를 단두대에 올릴 만큼 전제정치를 했는데, 1534년 ‘잉글랜드 교회의 유일한 수장은 국왕’이라고 선포(수장령)하여 로마카톨릭교회로부터 성공회를 독립시킨 인물입니다.

토마스 모어로 말하자면, 하원의장에 이어 대법관을 차례로 맡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자였습니다. 그는 당시 이단으로 취급되던 루터교도들도 단호하게 처분할 정도로 교리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의 군주가 교리에 반기를 들면, 왕의 명령과 교회 간의 충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그는 공개적으로 반대의견을 표시하지 않습니다. 저항하지 않고 침묵하다가 교황에게 보내는 헨리 8세의 혼인무효 요청 편지에 서명하지 않고 마침내 대법관직을 내놓습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한 처신이었지만, 결국 런던탑에 갇히고 재판에 부쳐집니다.

당대의 법률가이자 인문학자였던 그는 모든 지식과 논리를 동원해 자신을 변호합니다. “나는 하느님에게만 충실할 뿐 왕의 결혼문제에 개입하고 싶지 않다.” “침묵을 처벌할 수는 없다.”고 항변했지만, 반역죄를 벗어나지 못하고 1535년 단두대의 이슬로 스러졌습니다. “왕의 충직한 신하로서, 그러나 하느님을 먼저 섬기는 신하로서 죽는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사후 4백년을 맞은 1935년 성인으로 모셔졌는데, 특별히 ‘정치인·공직자의 수호성인’으로 받들어지고 있습니다. 나중에 성공회에서도 성인으로 모셨습니다.

정치인은 종교인의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주권자(절대왕조에서는 왕, 민주국가에서는 국민)에 의해 선택되어 국민(시민)을 위해 일하는 것이 정치인의 숙명입니다. 한데 자신의 공적 행위가 신앙과 상충할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데도 공직을 수행해야만 할까?

16세기의 토마스 모어는 엄청나게 고뇌했을 겁니다. 신앙을 꺾고 군주의 명에 따르느냐, 믿음을 지키기 위해 군주에게 반기를 드느냐. 토마스 모어는 정작 자신의 책 <유토피아>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편들었습니다. 현실 정치인이자 지성인으로서의 많은 고뇌가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저는 여기에 공주 의당면에서 태어난 절재 김종서(1383~1453)의 삶을 겹쳐서 봅니다. 토마스 모어처럼 그도, 군주에게 꼭 필요한 능력을 발휘하여 당대 체제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분입니다. 장장 48년 동안 문무를 겸비한 관료로서, 태종이 씨 뿌리고 세종이 꽃피운 유교정치체제를 정착, 유지하는 것이 그의 시대적 책무였습니다. 세종 치세를 30년 동안 함께 이끌어온 문종이 2년 만에 별세하고 12살에 즉위한 단종을 보위하는 책임이 운명처럼 더해졌습니다.

당시 수양대군은 현실정치에 공공연히 참견하고 왕위를 넘보며 무뢰배들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만약 김종서가 못 이기는 척 수양과 타협했다면, 그는 태종부터 세조까지 5대조를 모시는 권세가로 대대손손 영화를 누렸을 겁니다. 그는 굽히지 않았습니다. 수양은 정권의 버팀목인 김종서를 먼저 제거하는 것이 쿠데타의 성공요인으로 생각해, 늦은 밤 그의 집을 찾아가 살해합니다. 아들 승규도 함께 살해되고, 며느리와 손녀들은 정인지와 같은 공신들에게 나눠졌으며, 김종서 집안은 3백년 동안 ‘역적’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김종서 사후, 그가 지키려고 했던 조선 통치체제의 기틀이 흔들립니다. 신하였던 수양대군이 비협조적인 조정 신료들을 대거 살해하고 대의명분 없이 왕권을 찬탈한 것부터 유교정치의 기본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비정상이 정상을 뒤엎는 일이 수없이 일어나고, 토지제도를 비롯해 수양의 아버지인 세종치세에 이룩한 중흥의 기틀이 뒤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헌정질서를 지키는 데 목숨을 건 이들은 후일 ‘사육신’ ‘생육신’ 등으로 추앙을 받으며 동학사 숙모전, 노량진 민절서원, 함경도 정북서원, 공주 요당서원 등 전국에 배향(配享)됩니다. 반면 수양 집권을 도운 공신들은 자손만대 잘살았으나 누구도 배향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가 수양의 책사 노릇을 한 신숙주는 ‘배신의 아이콘’으로 민초들에게 찍혀, 쉽게 상해버리는 녹두나물은 그때부터 ‘숙주나물’이 되었습니다.

토마스 모어도 김종서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굵게 장식하는 변혁가, 혁명가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헌정질서를 세우는 데 제 한 몸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기득권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잃을 것이 많은데도 뜻을 굽히고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로써 모든 것을 잃는 모진 대가를 치르고 수백년 간 묻혀있었으나, 마침내 두 위인은 만고의 성인, 충의의 상징으로 부활하여 저 같은 사람에게도 커다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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