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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윤여헌-오희숙 역사기행
인조 임금이 공주에 머물렀으니
오희숙  |  oheesuk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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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2.05  23: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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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가 탄 지친 군마가 쉬어서 목을 추긴 샘으로 전해지는 ‘소우물’에서 윤여헌 회장이 인조파천이 남긴 흔적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파천 또는 몽진(蒙塵)이라는 말이 있다. ‘임금이 도성을 떠나 난리를 피하는 일’을 일컫는 말이다.

임금이 도성(서울)을 버린다는 것은 자연인의 불행은 말 할 것도 없지만, 한 나라의 중심이 흔들린다는 그 상징적 의미는 무엇으로도 견줄 바 아니다.

역사에서 보면 외침과 내란 등으로 임금이 도성을 떠난 경우는 적지 않다. 임진왜란에 선조가 의주까지 몽진했던 일, 정묘(丁卯)호란에 강화섬에 피난했던 사례들은 잘 알려진 사실들이다.

그런데 공주가 인조임금의 피난처였고 또한 그로 인해 남겨진 흔적이 하나 둘이 아닌데 이것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어 보인다.

1624년 2월 8일, 이괄이 한양으로 쳐들어온다는 기별에 인조는 가마로 명정문(明政門)을 나와 말로 갈아타고 황망히 남행길에 오른다.

양재-과천-수원-직산을 거쳐 천안에 당도한 것이 12일이며, 이때 이미 토적(討賊)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러나 잔적(殘賊)들의 내습을 우려한 일행은 예정대로 공주를 향해 13일 새벽길을 떠난다.
광정창(공주군 정안면 광정리)에 접어든 어가는 석송-오인리-목천-월미-신웅리를 지나 고마나루에 당도하게 되는데, 이때 100여명에 이르는 공주의 유생들이 왕을 맞이하기 위해 나루에 나와 있었다고 전한다.

공주가 인조의 파천지로 정해짐으로서 공주에는 노변(路邊)을 따라 석송동천(石松洞天), 소물(牛井), 인절미, 조왕동(助王洞) 등 인조의 흔적이 여러 형태로 남게 됐다.

   
▲공주향토문화연구회에서 이괄의 난으로 인해 인조가 공주로 파천한 5박 6일간의 행적을 답사했다. 이해준 교수가 정안면 석송리에 있는 석송동천에서 설명하고 있다.
공주시 우성면에는 ‘임금을 도운 마을’이란 뜻의 조왕동이란 마을이 있다. 인조가 공주로 피난 왔을 때 이 마을에 살았던 노숙이 군량미 300석을 상납해 왕과 군사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충성을 다하자, 인조는 노숙에게 상으로 벼슬을 내리고 마을 동곡리를 조왕동이라 부르게 했다는 것.

또 정안면에 석송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인조가 이곳에서도 쉬어 갔으며 바위와 소나무가 있다고 해서 이후부터 이 마을 이름을 석송이라 했고 이곳의 벌목도 막았다고 한다. 현재 석송동에는 석송정이라는 정자와 바위에 새긴 글이 전한다.

그리고 이인면 오룡리에는 숭선군 묘가 있으며 이 묘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이인면 만수리에 인조를 호종해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고 영의정에 추증된 이귀(李貴)의 묘와 신도비도 있다.

특히 인조의 파천과 관련해 인절미와 도루메기에 관한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도루메기 이야기는 공주로 피난 온 인조가 어지러워진 나라를 걱정하며 식음을 전폐하는 날이 많아지자 이를 걱정한 신하들이 음식을 대접하면서 생겨난 전설이다.

한편 일행은 고마나루를 건너고 하고개를 넘어 공산성 안에 있던 충청감영을 행재소(行在所)로 삼고 18일까지 5박6일 동안 머물게 된다.

인조는 공산성에 머무는 동안 정시문과(庭試文科)를 시행했는데 뒷날 3학사로 유명한 홍익한은 이때 5인의 급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 밖에도 공산성 쌍수(雙樹)의 이름도 인조와 관련해서 생겨났다.

이해준 공주대 교수는 “인조의 공산성 파천시 왕으로부터 통정대부의 작위까지 받았던 두 그루의 나무(쌍수)는 죽어 옛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게 됐다”고 안타까워하며 “그래도 나무가 있던 그 자리에 이 옛터를 기념하기 위해 관찰사 이수항이 영조 10년(1734)에 세운 쌍수정이 있는 남아있는 게 다행”이라고 전했다.

쌍수정 동쪽으로 50m의 거리에는 숙종 34년(1708)에 건립된 쌍수정사적비가 있다. 사적비는 380여년전 이괄의 반란과 인조의 남천에 대한 내력, 공산성에 머물렀던 5박 6일간의 행적, 그리고 왕이 머물렀던 공산성에 대한 모습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같이 공주는 인조임금의 주필지로 하여 적지 않은 유적과 구전이 전해지고 있다.

윤여헌 회장은 “문화유산이라면 무덤에서 출토된 ‘금붙이’의 현란함에 곧잘 현혹됐던 눈으로 보면 초라하기 그지없지만 이것이 우리가 살아 온 삶의 흔적이요, 역사의 현장”이라고 강조했다.
 
   
▲석송동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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