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김정섭 (前대통령 비서관, 前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직대)

 김정섭 前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직대
불안하고 음울한 시절이겠다. 시험을 치른 후 합격여부도 알 수 없는 시기, 대학 혹은 사회라는 큰물로 나아가야 할 때의 막막함. 우리에게도 1983년 대학 입학 학력고사를 치르고, 막연한 해방감에 산으로 들로 나다니고, 같은 처지의 벗들과 웃고 떠들면서 불안감을 삭이던 시간이 있었다. 그러다가 공허함이 찾아들 때면 닥치는 대로 책을 잡았다. 학교 도서관밖에 없었다. 톨스토이면 어떻고 스탕달이면 어떻고 최인호면 어떤가. 세계고전문학 전집, 삼중당 문고 시리즈도 훌륭한 스승이 되어주었다.

금년에 고등학교 졸업 30주년 행사를 준비하면서 여기에 생각이 미쳤다. 무한경쟁 상태에 놓여 영혼이 피폐한 재학생 후배들에게, 학교도 부모도 해줄 수 없는 약간의 틈새를 제공해주면 어떨까? 이에 친구들이 동의해 “졸업 30주년을 기념하여 후배들에게 주는 책 100권”을 기증하기로 했다. 교과서의 제약을 뛰어넘어 세상에 대한 성찰을 넓혀줄 책, 미구에 사회에 뛰어들었을 때 당황하지 않고 응전을 도와줄 책, 가치와 수단이 전도된 현세를 보는 눈을 밝게 해줄 책... 몇 권의 책으로 인생을 바꿀 수는 없지만, 후배들의 삶을 얼마간 풍부하게 해주리라 기대하면서.

먼저, 우리가 발 딛고 살고 있는 이 땅에 대한 지식을 넓혀줄 역사분야의 책을 몇 권 선정했다. 『한권 백제』 『삶이 있는 이야기 충남』은 내가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 재직하면서 펴낸 우리 공주와 충남의 역사 이야기다. 『김옥균-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 『조선 침뜸이 으뜸이라(허임 전기)』 『옛 사람의 학문과 생활』 등은 공주지역의 역사인물 스토리이다. 나의 유전인자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지 단초를 밝혀주는 책들이다.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유홍준 교수의 책들도 함께 봐야 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총 7권으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일본편』은 총 4권으로 갈무리되어 전권을 골랐다. 특히 국내편 제1권과 3권, 일본편 1권에는 우리 공주와 충남의 문화유산에 대해 친절하게 기술되어 있으니 꼭 봐야 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전 20권)』은 만화의 형식이지만 조선시대 500년의 역사를 깊이있게, 때로는 비판적으로 그렸다. 이덕일의 『조선왕을 말하다』를 함께 보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학교 과정에서 배우지 못한 현대사에 대한 맛보기로 『한홍구의 특강』 『지금 이 순간의 역사』 『나의 한국현대사』를 선정했다. 매일 뉴스를 통해 접하는 정치, 경제, 사회 현상에 대해 청맹과니는 면할 수 있으리라. 아울러 할아버지세대를 치열하게 살다 간 『김대중 자서전』과 『장준하의 돌베개』도 울림을 줄 것이다. 한편 『역사용어 바로 쓰기』는 ‘해방’과 ‘광복’이 어떻게 다른가,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민족주의 등의 용어를 오용, 남용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한겨레신문에서는 각계 인사들의 특강을 개최하고 책으로 펴내는데, 『21세기에는 바꿔야 할 거짓말』 『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 『길은 걷는 자의 것이다』 등이 보기에 부담 없을 것 같아 골랐다. 『거꾸로 희망이다』 『너는 나다-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하다』도 앞으로 부닥칠 정규직-비정규직 문제, 인권과 복지에 대한 인식, 어떤 것이 가치있는 삶인가 하는 생각의 지평을 넓혀줄 책들이다. 김두식 교수의 『헌법의 풍경』 『불편해도 괜찮아』, 김제동의 『김제동이 만나러 갑니다』도 학생들이 사회현상을 접하기에 친절하게 씌여졌다.

하지만 청춘은 여전히 불안하다. 불확실한 미래가 두렵다. 기성세대가 생각하기에도 성장력의 저하, 저출산 등으로 청춘들에게 이 사회를 물려주기 민망하다. 청춘들은 스스로 강해져야만 하는 것일까? 이러한 담론을 다룬 책들도 골랐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건투를 빈다』 『생애 최고의 날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등이다. 여기서 힘과 위로를 얻기도 하겠지만, 때론 영악하게, 때론 변칙적으로 도전하는 정신도 배워야 한다. 『스티브 잡스 전기』 『질문이 답을 바꾼다』 『좀 다르게 살아도 괜찮아』 『세상을 바꾸는 천 개의 직업』 『1만 시간의 법칙』 『모티베이터-동기를 부여하는 사람』 등이 어느정도 이에 부응할 것이다.

세계와 인류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책들도 젊은이들에게 필요하다. 『총, 균, 쇠』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오래된 미래-나다크로부터 배운다』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키워드 인문학』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와 같은 책을 한 권 독파하고 나면, 앞으로 공부할 학문의 갈래를 선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흔히 인문학 고전을 읽으라고 말하지만,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논어-사람의 길을 열다』 『사기 교양 강의』와 같은 고전 해설서가 원전에 직접 도전하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 이러한 책 읽는 법과 글쓰기에 대해서는 『청춘의 독서』 『책 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대통령의 글쓰기』가 발을 넓혀줄 것이다.

30년을 먼저 산 선배들이 한 세대 뒤의 후배들에게 100권의 책을 기증한 자체가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뜻있는 한 사람의 후배가 선택해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그중 몇 권에 불과할 것이다. 그 한 권의 책이 불안 속에 미래를 염려하는 후배에게 지남철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책을 더 자주, 많이 접해야겠다는 다짐이라도 줄 수 있다면, 책 속의 어느 한 줄이 그의 가슴이 뛰게 하고 주먹을 불끈 쥐게 할 수 있다면, 이것도 기성세대가 미래세대에게 해줄 수 있는 일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기증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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