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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문화원장  |  tj45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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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1.28  21:5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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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속학자 구중회(具重會) 교수

구중회 그 사람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정말로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이라고 생각하며 서슴없이 그 이름을 댈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처지와 생애의 분절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나의 공주시대, 그러니까 1979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30년 동안, 지근거리(至近距離)에 살면서 상호간 영향을 주었던 인물을 찾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구중회란 이름을 대겠다.

구중회는 누군가?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로 문학박사요 시인인 사람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객관적이면서 외형적인 설명 자료일 뿐이다. 굳이 그는 자신의 전공영역을 ‘민속문화 생산 및 유통’이라 적고 싶어 한다. 매우 생소한 학문이다. 허지만 조금만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그것이 허장성세나 고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늘에 이르러 그의 실상이요 또 진심이라는 것을 이내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시집이나 평론집과 같은 문학서적을 여러 권 출간한 문인이면서도 문인이라는 말보다는 민속학자로 불리는 것을 좋아한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그에게 있어 괄목할만한 저서들이 모두 그 쪽에서 나왔다. 근년에 낸 저서만 해도 『옥추경 연구』(2006,서울:동문선), 『능묘와 풍수 문화』(2008,서울:국학자료원),『경책문화와 역사』(2009,서울:민속원) 등이 서울권에서 출판되어 큰 호응을 얻은 책이다. 최근에는 그의 저서 한 권(『경책문화와 역사』)이 인터넷 서점(인터파크 도서)에서 생활사 부문 판매 부수 5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이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시골 교수의 책이 서울 가서 판을 흔들 수 있는가. 마땅히 축하해야 할 일이다. 하기는 저자 자신도 그 사실을 통보받고 놀랐다니까 더 할 말이 없는 일이다.

내가 아는 구중회
실지로 구중회란 인물을 알게 된 것은 앞에서 밝힌 바 30년보다도 훨씬 전의 일로 내가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공주에 다시 왔을 때부터다. 더 정확하게 밝히면 1972년 1월 어느 날, 공주에서 <새여울>이란 이름의 시동인지가 창간되어 그 출간기념회를 갖는 날 밤의 일이었다. <새여울>은 공주교육대학 출신들인 젊은이들이 모여 공주에서 창간된 순수 시동인회인데 당시 상당한 시적인 열기들을 품고 있었다. 나는 비록 공주교육대학 출신은 아니지만 그 전신(前身)인 공주사범 출신이라서 그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서울에서 저명한 문인 몇 사람이 내려오고 대전서도 오고 그래서 나름대로 화려한 행사를 치렀다. 아마도 기념식은 오늘날 공주문화원 건물이 아닌 옛날의 문화원 건물의 회의실에서였을 것이다. 그날 밤 우리는 공주의 ‘중동하숙’이라고 기억되는 한 여관에 머물렀고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떠들고 문학에 대한 담론으로 꽃을 피웠다. 젊은 혈기가 한껏 뻗쳐서 그랬을 것이다. 그날 밤에 여관방에서 함께 밤을 새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구중회다. 얼굴은 제법 나이 들어 보이는데 까까머리를 하고 있었다. 듣기로는 막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하여 공주사범대학의 대학생으로 복귀한 뒤라 했다.

그 때 벌써 나는 교직생활 7년차를 넘기고 있었고 충남지역에서는 부여의 신동엽 시인 이후로 처음 신춘문예에 당선된 입장이라서 나름대로 자존감을 세우고 있을 때였다. 밤이 깊어지자 한 두 사람 잠자리에 들고 몇 사람 안 남아있을 무렵 새삼스럽게 말을 걸고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구중회 그 사람, 까까머리의 제대군인 아저씨였다.

대뜸 당신은 엘리엇을 아느냐? 엘리엇이 말한 전통론이 무엇인지 알고나 시를 쓰는 거냐? 다그치듯 물었다. 솔직히 그 때 나는 「엘리엇 문학론」을 읽지 않았던 처지였다. 모른다 할 까닭도 없고 기죽기도 싫어 어물쩡 이것저것 변설을 늘어놓아 위기를 모면했을 것이다. 실은 그 당시 내 생각으론 영국사람 엘리엇하고 한국 사람인 내가 무슨 상관이냐 강변하고 싶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구중회를 1980년대 공주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동안 그는 박사과정을 거치고 있었고, 시 잡지 <심상>의 신인상 제도를 통해 시인이 되었고, 강원도 지역의 중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모교에 와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대뜸 우리는 만났다. 아마도 민물고기 매운탕을 잘하던 ‘남원집’이란 음식점에서였을 것이다. 그날도 우리는 대중없이 많은 술을 마시고 이런 저런 졸가리도 안 맞는 많은 이야기를 토해냈을 것이다.

구중회와 나와는 이성적 관계가 아니고 감정적인 관계다. 조금은 울컥! 하는 사이다. 만나면 눈빛이 튀고 말이 튀고 행동이 또 튄다. 서로가 호락호락하지 않고 만만치 않다. 이른 바 맞수다. 티각태각 말다툼을 잘했다. 그런데도 어느 선에 가서는 멈추게 된다. 그 이상 가면 안 된다는 것을 서로가 잘 알기 때문이다. 구중회와 나태주와는 물과 기름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오랜 동안 만나오고 공존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래서 주위에서 우리를 아는 사람들(주로 문인들)은 우리 둘이 있어야 자리에 활기가 있다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 구중회와 나태주가 빠진 문학모임이 무슨 재미냐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한동안 구중회는 공주의 문화 판, 특히 문학과 민속 분야의 행사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다. 공주문인협회 회장, 한국민학회 회장, 계룡산 굿 보존회 회장 등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부턴지 공주의 문화 판에서 그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더러 만나는 기회에 그는 대학에서 정년도 가까우니 남은 시간을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겠다는 말을 했다. 정말로 연구실에 틀어박혀 사는 것 같았다. 그런 뒤로 책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가벼운 책이 아니다. 무계 있는 학술서적이다. 아예 그는 해마다 한권씩 책을 내야겠다는 결심을 밝히기도 했다. 한 해에 한권씩 책을 내다니! 그것은 자기와의 약속을 말한다. 자기와의 대결을 뜻한다. 다. 자기가 자기를 단근질하는 것을 말한다. 공주에 이런 불퇴전의 학자가 있다는 건 공주의 자랑이요 긍지다.

   
▲공주대 구중회 교수.
지천이 아니라 원류
한동안 어깨동무도 하고 삐거덕거리면서 잘 지내왔다. 그렇게 늙었다. 공주에 올 때는 다같이 30대 중반이었는데 이제는 60대 중반으로 바뀌고 말았다. 나는 머리칼이 빠진 사람이 되었고 그는 하얀 머리칼의 사람이 되어버렸다. 나는 초등학교 교직이었으므로 62세 정년 나이에 맞춰 이미 정년퇴임을 했고, 구중회는 대학 교원이므로 65세에 맞춰 아직은 현직에 남아있는 것이 조금 다르다. 참 어이없다고나 그럴까.

인간은 누구나 60세쯤 되면 자기 생애를 돌아보게 되어있다고 한다. 그건 우리라고 다르지 않다. 2007년 내가 죽을병에 결려 허우적댈 때도 그는 여러 차례 소리 내어 울었다고 한다. 우정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런 뒤 기적적으로 내가 병원에서 나와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역시 시인이기도 한 이효범 교수가 동석한 자리였는데 그동안 하지 못한 여러 가지 중요한 대화를 나누었고 나름대로 심정적인 합의도 본 바 있다.

구중회와 나태주가 무엇이 다른가?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를 수 있지만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만 볼 때도 많이 다른 점이 있다고 본다. 일찍이 구중회는 호남의 명문인 전주고등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이다. 구중회가 전주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신석정 시인을 비롯하여 김해강, 백양촌(본명 辛槿)과 같은 당대의 이름 있는 시인들이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시절이다. 그런 문학 풍토 아래서 이가림, 강인한 같은 시인이 나왔고 구중회도 고등학교 재학시절 뒷날에 역시 시인이 된 박정만, 이시연(본명 이용숙) 등과 더불어 <길문학동인회>를 결성하여 활동했으며 공주사범대학에 들어온 뒤에도 문학적 열정은 이어져 <수요문학동인회>의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다.

자술연보에 보면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문인의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어 <현대문학>을 정기구독하고, 1학년 때(1963년) 송욱의 『시학평전』을 석 달치 용돈을 모아 구입하기도 했다.>고 한다(구중회, 『충청 시인론』 앞표지 날개 부분). 이런 것으로 보아 구중회는 스스로 강물의 지천(支川)이 되기보다는 원류(原流)가 되기를 소망했던 사람으로 파악된다.
실상 원류에는 원류의 소임과 몫이 있는 법이고 지천에는 또 나름대로 그것이 주어지는 법이다. 문학하는 사람치고 누군들 원류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그게 모두 자기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다. 나만 해도 그렇다. 원류가 되고 싶었지만 지천으로 만족한 사람이다.
그런데 구중회는 아니었다. 누구누구의 후계이기를 단호히 거부한 사람이 바로 그다. 그러다 보니 일생이 고달프게 된 것이다. 멀리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샘물부터 다시 파야 했고 골짜기 물길을 새롭게 터야만 했다. 적어도 그의 패기와 개척정신이 누군가의 지천이 되는 걸 허용하지 못하게 했던 거다.

이런 이야기를 어느 날 금강 가 칼국수 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군시렁 군시렁 나누었을 때 구중회의 눈빛이 갑자기 빛나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기분 좋을 수가! 그러니까 사람은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이 아니다. 나이를 먹으면 뭐가 달라져도 달라지게 되어있다. 그 날 좋든지 싫든지 우리는 산으로 치면 8부나 9부 능선 가까이 올라와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사람임을 확인해야만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실은 가을이 아주 가기 전에 자전거를 타고 금강다리를 건너 공주대학교 구중회 교수의 연구실을 한 차례 찾고 싶었다. 가서 창문 밖으로 보이는 계룡산의 봉우리도 다시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고 겨울을 맞고 말았다. 몇 차례 빈 사무실로 구중회 교수의 전화가 왔다는 말을 전해 들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구중회 교수가 찾아왔다. 웬일이신가요? 좋아 보이시네요. 나쁠 것도 없지요, 뭐. 그의 손을 보니 책 한권이 들려있다. 아, 이거요? 이번에 또 책이 한권 나왔어요. 이제 나는 책 내는 기술자가 됐어요.

그래서 예정에 없던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그는 나이 들면서 몇 가지 자문자답을 했다고 한다. 내가 누구지? 왜 이 시대에 살지? 왜 대한민국에 살지? 조금은 생뚱맞은 발상이긴 하지만 의미 있는 자기 확인인 것만은 확실하다. 오히려 나이든 사람의 것이기에 더욱 진지하고 빛나는 것이기도 하다. 정말로 나이 들어가면서 이렇게 자신에 대해서 엄하게 질문하고 대답을 요구하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 몇이나 될까?

그랬더니 자신이 시인은 물론이거니와 대학교수로 학자로도 다시 생각해야할 대목이 있더라는 것이다. 적어도 대학교수나 학자가 되려면 자기만의 특별한 영역이 있어야 하고 세상을 재는 잣대가 있어야 하는 건데 그것이 어렵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민속학 연구에 매달렸고 책을 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연구를 하면서 특히 서울이란 곳의 벽이 너무 높다는 것을 새롭게 알았노라 한다.

서울이란 곳! 서울이란 곳을 생각하면 나부터도 울고 싶어진다. 그만 막막해지는 심정이 된다. 그야말로 넘을 수 없는 벽이요 건너기 어려운 심연이 서울이란 곳이다. 한두 편 논문 가지고는 안 되었다고 한다. 꿈쩍도 안 하더라고 한다. 그래서 책을 쓰기로 했다고 한다. 한 권 두 권 책이 나가니 서울에서도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아주기 시작하고 이제는 당신이 이 방면에는 정말로 믿을만한 전문가가 아니겠냐는 솔직하고도 진지한 반응이 나왔다는 것이다. 브라보!

이것은 구중회 개인의 승리일 뿐더러 공주의 자랑이요 시골 사는 사람 다 같이의 분풀이 같은 것이다. 재탕의 말이지만 송무백열(松茂栢悅)이란 말을 다시 아니 쓸 도리가 없다. 그래서 이제는 서울의 전문가 집단에서 강연 자리를 모아놓아 강연을 시키는가 하면 출판사로부터 조금은 어렵게 학문적으로 되어 있는 책을 풀어서 대중용으로 써달라는 청탁을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운동선수에 비겨 구중회는 이제 공주라는 한정된 고장의 지역선수가 아니다. 전국 선수이며 대표 선수이며 세계를 향한 올림픽 선수를 지향한다. 요즘 그는 중국이나 일본 쪽 진출을 꿈꾸고 있고 영어로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에 골몰하고 있다. 내년이나 내후년쯤엔 미국에도 한 번 가서 휘익 돌아보며 그쪽 방향으로 진출할 생각도 해보고 있다. 그래서 대학에서 세 강좌 맡아오던 강의도 줄여서 학부 강좌 하나, 대학원 강좌 하나만 남겼다 한다.

이것이야말로 떠나갈 때를 생각하는 사람의 태도다. 일찍이 이형기 같은 시인은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고 「낙화」란 시에서 남겼다. 구중회는 자신의 미래의 삶에 대해서 역사학자 토인비(Arnold Toynbee)의 <도전(Challenge)과 응전(Response)>이란 말에 대입하여 풀이하고 싶어 한다. 이 가운데서도 도전이란 말이 마음에 든다고 한다. ‘응전’은 이미 있던 것과의 관계이지만 ‘도전’은 전혀 새로운 것과의 관계 형성을 말한다. 그것은 새로운 스타일의 창조다. 이전에 있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을 꿈꾸는 정신이다. 여전히 지천이 아니라 원류를 꿈꾸는 구중회의 개척정신이다. 이만하면 구중회의 뒷모습이 정녕 보기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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