뱁새울 길

▲나태주 공주문화원장.

폭설 속에서도 산비둘기는 운다

밤사이 눈이 내렸다. 내리더라도 흐무지게('흐뭇하게'의 방언) 아주 많은 눈이 내렸다. 해마다 이렇게 2월 하순쯤 내리는 눈은 폭설형이다. 깜짝쇼처럼 내리는 눈이고 혁명군처럼 온 땅을 점령해 버리는 눈이다. 아마도 겨울이 떠나가면서 마지막으로 주고 싶은 선물이 있었던 모양이다.

우선 아파트 창문을 열고 베란다에서 두어 컷 신비로운 세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러나 그쯤에서 만족할 내가 아니다. 밖으로 나가 이것저것 보면서 사진이라도 찍어 두어야겠다.

이런 날은 눈이 빨리 녹는다. 서둘러 아침밥을 먹고 등산화를 챙겨 신고 밖으로 나갔다. 우선 우금티 쪽으로 가 보기로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눈이 내렸다. 아무도 발자국을 내지 않은 인도가 다소곳이 나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 풍경과 눈옷을 입고 있는 정숙한 수풀을 여러 장 훔쳤다. 그렇다! 이런 때는 훔친다는 말이 제격이다. 본래는 하나님 것이요 대자연의 것인데 주인 몰래 잠시 가져왔으니 훔친게 아니고 뭐란 말인가.

멀리, 마을 앞길에 나와 넉가래로 눈을 치우는 남자들을 보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정겨운 풍경이라 한참 동안 발길을 멈추고 바라 보았다. 노인들인지 두어 삽 치우고 허리를 펴서 먼 곳을 바라보곤 했다.

발길이 우금티의 동학혁명군위령탑 쪽으로 곧장 나아가지 않고 왼쪽으로 돌아 도로를 가로질러 뱁새울로 가려면 조그만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고개라 하기엔 민망한 아주 낮은 언덕 같은 것이다.

고개를 넘기 전, 오른쪽에서 있는 건물은 노인병원이다.  예식장으로 지은 것인데 영업이 안되어 노인병원으로 바꾸자 환자들이 많이 들었다 한다.  결국 젊은이들을 위해 지어진 건물이 노인들을 위해서 쓰이고 있는 셈이었다.

고개를 넘다가 길가에 놓여 있는 낡은 의자 세 개를 만났다.  의자들도 눈을 맞은 채 가지런히 앉아 있었다. 마치 눈이 내려와 의자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밥그릇에 새하얀 쌀밥이 소복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노인병원의 환자들이 볕바른 날 나와 앉아 있기도 했던 의자였겠지 싶었다.

고개를 넘는데 주변의 분위기가 아주 달랐다.  보통 때 같으면 썰렁했을 길이 아주 따스하고 정겨워진 느낌이 들었다. 눈 때문이지 싶었다. 고개 너머에는 사람들한테 버림받은 집이 여러 채 있다.

그러나 오늘만은 그런 집들도 덜 쓸쓸해 보였다. 이 또한 눈이 주는 위안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집마다 개들이 짖었다. 삽살개, 누렁이 , 진돗개 잡종, 가지가지 개들이 줄에 묶인 채 펄떡펄떡 뛰어오르며 내가 낯선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조금 늦은 아침 시간이라 다들 일터에 가거나 외출하고 개들만 남아 집을 지키고 있는 듯싶었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개 짖는 소리조차 짜증스럽게 들리지 않았다. 그래, 짖을 테면 짖어 보아라,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구부러지고 비탈진 길을 내려오는데 다시 눈발이 날렸다. 하늘빛 까지 다시 꺼뭇해지고 있었다. 조금은 더 걷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보면 빤히 건너다보이는 뱁새울로 가는 말랭이(‘마루’의 방언)에 있는 집을 지나쳤다. 할머니 혼자 사시는 집이다.  울타리도 없는 집.  길이 그대로 마당인 집.  문에 자물쇠가 채워지지 않은 걸로 보아 안에 할머니가 계신 듯싶었다.

눈길을 내려갈 때는 부디 발밑을 조심해야 한다.(인생살이 또한 그러할 터.) 조촘조촘 발자욱을 떼어 놓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등 뒤에서 산비둘기가 울고 있었다.  구국구국.  어, 이렇게 폭설이 내린 날에도 산비둘기가 다 우네.

산비둘기 울음소리는 봄이 가깝다는 하나의 신호이다.  아, 그렇구나. 지금은 봄이 분명 가까운 때.  느리게 우는 산비둘기 울음소리 속에 부드러운 봄의 숨결이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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