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학자 긍암(兢庵) 김연뢰(金淵雷) 선생

 ▲한학자 긍암(兢庵) 김연뢰(金淵雷) 선생.
공주 시내를 다니노라면 가끔 한복 차림의 남자 어른들을 만날 때가 있다. 알지 못하는 그 어딘가에 분명 옛 풍습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을이 있는가보다. 대개 그분들 모습을 보면 예스런 생활을 상당히 고집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더러는 상투차림 그대로이고 백색 두루마기차림일 때도 있고 갓을 쓰고 있을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런 조금은 억지스러운 한복차림이 아니라 현대의 분위기와도 잘 어울리는 한복차림을 하고 있는 남자 어른을 만날 때도 있다. 그분은 특별한 날만 한복을 입는 것이 아니라 일 년 내내 그렇게 한복차림인 분이다. 연세 드신 남자어른에게 󰡐곱다󰡑란 표현이 뭣하긴 하지만 참 고운 모습으로 한복을 입고 다니는 분이다. 그 분이 바로 김연뢰(金淵雷) 선생이다.

김연뢰선생은 오늘날 팔순을 바라보시는 연세인데도 아직도 구 공주 중앙통 거리에서 서예학원을 열고 있는 현역이시다. 공주의 어린 학생들과 어른들에게 붓글씨와 한문을 가르치고 있지만 다만 그것을 다른 학원의 그것처럼 보아서는 안 된다. 이분이 학원에서 학생들에게 붓글씨와 한문을 가르치는 건 기능으로서만이 아니라 생활태도와 삶의 방식, 인격수양의 한 방편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대화된 서당교육이라고나 할까.

공주 사람 가운데 예의범절을 알고 옛날 학문을 사모하는 사람 가운데 이분한테 한 차례라도 묻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니까 이 어른은 서예학원의 원장이면서 공주 사람들의 스승 격으로 자리하고 있는 분이라 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분은 상당기간(15년 동안이나) 공주대학교의 고전연구회에서 지도강사를 맡아 교수와 학생들에게 사서삼경과 고문진보 등 고전을 강의해 왔을 뿐더러 백제문화제 한시백일장 심사(考選)위원의 역할을 오래 동안 담당하기도 했다.

좋은 것은 스스로 소문내지 않아도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어 있고 높은 학문 또한 그 자신 밝히지 않아도 사람들이 찾고 따르도록 되어 있다. 이분의 학문의 깊이는 실로 공주에서만이 아니라 충청권 내지는 호서지방에서 제일이다.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그 이름이 퍼져 오늘날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고 있는 실정이다. 구체적으로는 서울에 있던 문화재청이 대전으로 옮긴 뒤로부터라고 한다.

주로 문화재청이 보물로 책정한 각종 자료를 번역하고 표점(標點: 한자로 된 문장을 구절로 끊어 읽는 표시)을 해주는 일이라고 한다.그 가운데는 이미 중앙의 저명한 학자들이 해놓은 번역 자료를 받아 오류를 바로 잡고 교열하고 감수하는 일도 있다 한다. 그렇게 하기를 5, 6년이고 최근에는 국사편찬위원회로부터 번역한 문헌을 최종적으로 교열해주는 일도 맡아서 했다 한다. 생각해보면 참 귀한 분이란 느낌이 든다.

과거 우리들의 문화유산의 대부분의 기록들은 안 된 일이지만 한글이 아닌 한자로 된 것들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을 읽어낼 수 없다는 것, 읽어내더라도 제대로 바르게 읽어낼 수 없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이다. 공주 거리에 오직 이 한 분이 계시어 대한민국 전체, 그 누구도 풀 수 없는 어려운 문장을 풀고 틀린 부분을 바로잡는다니 이 한 분으로 하여 공주가 스스로 자랑스럽고 가득하고 빛나지 않는가 말이다.

선생의 호는 긍암(兢菴). 그리고 자는 경천(敬天). 나도 다른 사람들을 따라 이 어른을 긍암 선생이라 부른다. 왜 호가 긍암이냐 여쭈면 그 긍兢자가 󰡐전전긍긍할 긍󰡑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평생을 전전긍긍하면서 살라는 뜻인데 조심해서 아름답게 살라는 반어적 표현인 듯싶다. 한번 찾아뵈어야지 오래전부터 생각이 있었다. 하기는 교직에 있을 때는 정년을 하게 되면 이분에게 가서 『논어』를 배우리라 마음먹은 바도 있었다. 미루고 미루다가 오늘이 12월 30일, 2008년이 가기 전에 선생을 찾아뵈올 요량으로 집을 나섰다.

설픗설픗 눈발이 날리는 날이었다. 그동안 선생의 학원이 자리를 옮겨 있었다. 먼저는 3층이었는데 이번에는 2층. 건물로 깨끗했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넓은 강당 같은 교실에 어린 학생들과 어른 두엇이 글씨를 쓰고 있었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선생이 내가 온 기척을 알고 사무실로 안내한다. 연세는 드셨지만 언제 뵈어도 맑고도 온화한 안색이 사람을 그럴 수없이 편안하게 해주는 어른이다.

긍암 선생과는 오래전부터 알고 재내는 사이다. 우선 선생은 내가 공주교육대학 부속초등학교 교사로 있을 때 동직원이었던 김영목 교사의 부친으로 뵈었던 분이다. 김영목 교사는 지금은 대전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감을 하고 있으면서 이름 있는 서예가이기도 하다. 부친인 긍암 선생이 지어준 호가 소헌(紹軒). 이을 소 소(紹)에 마루 헌(軒). ‘선대의 충효 유적을 계승하라’는 깊은 뜻으로 아드님의 호를 그렇게 지으셨다고 한다.

그 선생님에 그 아드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긍암 선생에게 여러 차례 글로서 빚(글 빚)을 진 일이 있다. 바로 고향의 선조들 비문을 받고 또 글씨를 받는 일이 그것이었다. 한두 차례가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선생은 귀찮다 내색치 않고 그 일들을 다 맡아 해결해 주었을 뿐더러 차근차근 가르침을 주기도 했다. 일이 거기서 그치지 아니한다. 선생의 아드님인 소헌은 또 내가 가친의 고희연을 맞아 병풍 한 개를 만들어 드리고자 할 때 내가 지은 시조를 단아하고 힘찬 한글체로 써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긍암 선생 부자(父子)분으로부터 두루 은택을 입은 사람이라 할 것이다.

 
수인사를 차리고 자리에 앉으면서 오늘 선생께 찾아온 용건을 말씀드렸다. 실은 그냥 인사차로 온 것이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해 인터뷰 차 왔다는 것. 왜 한학을 했나 하는 것과 오늘날 세상을 보며 느끼는 점과 인생에 대한 해답은 없는 하는 것을 듣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선생의 고향은 공주가 아닌 아산. 1930년 출생. 선고장(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독실한 한학자셨는데 배일사상(排日思想)이 강해서 끝내 창시개명(創氏改名)에 따르지 않았고 머리를 짧게 자르는 단발령(斷髮令)에도 동참하지 않으셨다 한다.

물론 일본제국주의식 교육제도에도 반대하여 4형제 모두를 신식학교에 보내지 않고 모두 집에 공부시켰다 한다. 일종의 가학(家學)이었던 셈이다. 선생이 공주로 이사 온 것은 15세 때. 일가족이 공주의 유구로 옮겨와 자리를 잡고 연종이란 마을에서 할아버지가 서당을 여셨다 한다. 그 때 가까운 학교의 초등학교 교장이 할아버지를 찾아와 변하는 세상을 살려면 아무래도 신식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설득하여 아우님 세분은 학교교육을 받았지만 선생만은 이미 때가 늦어 한학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말 올곧은 성리학자였던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291) 선생의 학통을 잇는 학자로 남는다.

선생께 다시 인생의 지침이 될 만한 말씀을 듣고 싶다고 청한다. ‘안분낙천(安分樂天: 자기 분수를 알고 거기에 만족할 줄 알며 낙천적으로 세상을 산다).’ 평생을 두고 외우는 말씀이라고 한다. 그렇게만 살면 사람의 기상도 좋아지고 건강도 자연스럽게 좋아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일, 육신의 건강도 그 실에 있어서는 마음먹기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는 말씀이다. 실상 나도 호된 병원 생활을 통해 얻은 화두가 긍정적인 사고요 그 삶이 아니던가.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이 끝내 나 자신을 무너뜨리고 큰 병을 불러왔던 것이다. 그래서 도달한 결론이 작은 일에 기쁨과 감사한 마음을 갖자는 것이었다.

선생의 말씀을 듣다보니 언뜻 수필가 피천득 선생의 생각이 떠올랐다. 세상에 알려진 바대로 피천득 선생은 장수와 명예를 고루 누린 분인데 평생 사모님을 과분한 사람으로 여기며 살았고 자녀들을 과분한 자식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한다. 그랬더니 아내나 지식들도 당신을 과분한 남편, 과분한 아버지로 받아주더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생의 성공의 열쇠가 이 분수를 알고 자기의 삶을 공손하게 지키는 데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이 혼탁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다시 말씀을 여쭈었다. 󰡐천하태평시(天下太平時)엔 여천동선(與天同善)하고 천하란시(天下亂時)엔 독선기신(獨善其身)하라󰡑― 온 세상이 태평한 시절에는 천하와 더불어 선함을 펼치고 온 세상이 혼란스러운 시절에는 그 자신 혼자만이라도 선을 간직하고 실천하라. 그렇구나. 진정 그럴 것이구나. 어찌 세상이 어지럽다고 나까지 나서서 큰소리로 떠들고 어지러운 발걸음으로 다닐까보냐.

선생은 마지막으로 『명심보감』 정기편(正己篇)에도 있고 『논어』 계씨편(季氏篇)에도 나오는 한 구절을 귀띔해준다. 󰡐사람(군자)은 일생에 세 가지 조심할 일이 있다. 젊어서는 혈기가 아직 안정되지 못한 때니 색(이성)에 빠지는 것을 조심해야 하고, 장년의 나이가 되어서는 혈기가 한참 뻗칠 때니 남과 다투는 일을 조심해야 하고 노인이 되어서는 혈기가 쇠약해지기 때문에 욕심을 부리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孔子曰 君子有三戒하니 少之時에 血氣未定이라 戒之在色이오, 及其壯也하야 血氣方剛이라 戒之在鬪오 及其老也하야 血氣旣衰하니 戒之在得이니라. ― 민음사 판, 金鐘武 역 『論語新解』 참조)

아, 이 말씀 속에 일생을 살아가는 지혜가 있었구나. 나이 들면 혈기가 약해져서 육신의 안일함을 따르게 되고 그러다 보니 노욕이 생기게 마련인데 그것을 스스로 경계하는 것이 나이 들어서의 삶의 지혜구나. 모든 삶에 대한 해답은 이렇게 동서양 성현들의 말씀 속에 종교의 경전 속에 이미 들어 있는데 다만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하여 허덕이며 살고 있을 뿐이다.

선생과 말씀을 나누는 시간이 제법 오래 계속되었다. 아직도 학원 쪽에서는 학생들의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서둘러 선생의 사진을 몇 장 찍고 선생의 사무실을 물러나왔다. 선생은 문을 열고 층계참까지 나와 정중하게 손님을 배웅해주었다. 2층 계단을 내려오면서 선생의 말씀만으로도 이 썰렁한 겨울날 하루가 참으로 그윽하고 향기롭고 배가 부르다는 느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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