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상호 세광교회 목사

▲ 이상호 세광교회 목사.
지난 5월 말 안산에 갔다가 세월호 희생자 분향소를 찾았다. 안산 분들은 이미 트라우마가 있어서 그곳에 가기를 주저했다. 분향소로 가는 길은 쓸쓸했다. 곳곳에 문을 닫은 상가들이 눈에 띄었고, 횡단보도에 서서 지방선거 후보자 홍보에 한창인 봉사자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이 곧 운동이 되는 이곳은, 가방을 멘 학생들만 봐도 슬퍼지는 안산시 단원구다.

아파트 단지마다 희생자를 애도하는 펼침막이 걸려있고, 빛바랜 학생들의 무사기원 현수막은 바람에 나부낀다. 화랑공원에 당도하여 분향소를 찾으니 노란 리본이 길게 엮어져 타지에서 온 사람들의 발걸음을 분향소로 인도했다.

분향소로 들어서는 순간, 숨이 멎는 듯 하다. 말이 304명이지 분향소를 가득 채운 얼굴들을 대하게 된다. 이렇게 많은 영정을 본 일이 없고, 이렇게 어린 학생들의 영정을 본 적이 없다. 조용한 충격이 밀려온다. 영정의 아이들이 말을 걸어오는 듯 하다.

안내에 따라 국화꽃 한 송이를 손에 쥐고 기도하며, 봉오리 채 피우기도 전에 져야 했던 아이들을 조문했다. 희생자들의 부모, 형과 언니, 동생들, 친구들이 남긴 사연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좋아하던 간식과 인형 등을 가져온 것이 여러 곳에 쌓여 있었다. 합동분향소는 촬영이 금지 되어 있었지만, 조심스레 카메라를 꺼내 몇 장 찍었다.

“애들아 잘 있는 거지? 조금만 놀면서 기다려. 우리 곧 볼꺼야. 사랑해. 진짜 사랑한다.” (선부동성당 선생님)
“날이 갈수록 보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뽀뽀도 해주고 싶고, 만저보고 싶다. 사랑해 아들...” (아빠가)
“아들아 딸들아 얼마나 외로우니. 이생에서는 못다한 것 이제 천국에서 다시 만나 이야기하자” (인천 마전교회 김유숙 권사)
“○○야 잘 있지? 엄마는 우리 아들 ○○가 엄마 아들이었다는 게, 너무너무 행복하고 감사해. 엄마는 평생 울 아들 잊지 않을 거야. 사랑해. 행복해야 돼.” (엄마)
“○○아 잘지내고 있지? 너무 보고싶다. 너 좋아하는 녹차 사왔어. 맛있는 거 한 번 못사줘서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너의 언니가)
“아쉽고 안타깝다. 이젠 어디서 너를 만날까. 그립다. 아빠에게 다정하게 인사하고 소근대던 너의 모습이... 딸아” (아빠)
“이 사회 그냥 두고 보실겁니까? 다음에는 당신 아이 차례일 수 있습니다. 그냥 두고 보시겠습니까? 모두 함께 해주세요. 진상규명해서 사회를 바꿔야 합니다.” (2학년5반 박○○ 어머님 호소문 中)
“○○야 그래도 다음 세상에도 아빠 아들로 태어날거지?” (아빠가)
“○야 우리 애기. 누나왔어. 오늘 누나 생일인 거 알지? 생일선물로 꿈에 한번만 나와주면 안될까?” (누나가)

영정들 사이사이에는 편지, 메모들과 함께 아이들이 좋아하던 과자와 물건, 태권도 검은띠, 추억사진 등이 놓여 있었다. 조끼를 친구에게 주면서 탈출을 도왔던 정차웅 군과 갑판까지 올라와 살 수 있었는데 친구들이 있는 선실로 들어가 주검으로 나온 양온유 양의 영정 앞에서는 잠시 더 머물렀다.

학생 영정과는 별도로, 희생된 어른들의 영정도 한쪽 벽에 빼곡히 놓여있었다. 어른들 위패에도 많은 십자가가 새겨져 있었다. 이번 참사에서 희생된 교회학교 학생은 개신교학생 76명(단원고74), 카톨릭학생 17명 도합 크리스챤 학생 93명이 희생되었으며, 안산제일교회에서 고등부 7명이 희생되었고, 와동성당에서는 고등부 10명이 희생되었다. 어느 교회학교 교사는 가르치던 고등부 3명을 모두 잃었다. 목회자와 장로들도 그들의 아들과 딸들을 잃었다.

분향을 마치고 일부러 차를 돌려 단원고 앞을 지났다. 여기저기 현수막과 분향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물 차오르는데 “가만히 있어라” 안내방송이 피해를 키웠다. 이제 우리가 가만히 있지 말고 아이들의 무언의 소리에 응답할 때이다. 세월호 사건으로 화난 학부모들이 진보와 보수교육감 비율을 13:4로 당선시켰다. 교육이 진보적이면 역사도 진보하리라. 적폐(積弊 : 오랫동안 쌓여온 폐단)를 없애고 안전하고 정의로운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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