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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문화원장  |  tj45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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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1.06  23:5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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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향토문화연구회’를 창립한 월당(月塘) 윤여헌(尹汝憲) 선생

   
지난 해(2009년) 7월, 내가 공주문화원장의 일을 맡은 이후, 몇 분 고문 선생님을 다시 모신 바 있다. 공주는 문화나 교육으로 볼 때 그 뿌리가 깊고 학문이나 예술의 차원으로 볼 때도 그 볼륨이 만만치 않은 고장이다. 그런 만큼 고문 선생님을 모시더라도 특별하고 공주 사람들이 다 같이 우러러보는 어른을 고문으로 모시고 싶었다. 고심 끝에 모신 분이 연남(燕南) 김기평(金基平, 전 공주교육대학교 교수) 선생, 긍암(兢庵) 김연뢰(金淵雷, 공주서예학원 원장) 선생, 서연(栖然) 이화영(李華永, 전 공주사범대학 학장) 선생과 월당(月塘) 윤여헌(尹汝憲) 선생이었다. 다 같이 올곧게 평생을 사시면서 학문에 정진하신 어른들로서 고매하신 인격과 아름다운 인생을 가꾸어 오신 분들이다. 공주 사람이면 누구나 ‘선생님!’ 하고 고개 숙여 존경의 일념을 드릴만한 어른들이시다. 이 어른들을 고문으로 모시고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네 어른을 고문 선생님으로 모시고 얼마 뒤 윤여헌 선생을 뵙기로 했다. 2010년 4월 2일 오후 2시. 왜 윤여헌 선생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나는 학연이나 지연, 직장의 인연, 그 어떠한 것으로든 선생을 가까이 모신 바가 없다. 다만 여러 가지 문화행사나 회합 같은 데서 선생을 뵙고 아, 저분이 윤여헌 선생이시구나, 그렇게 생각을 해왔던 날들이 오래였었다. 뵈올 때마다 나직나직 품격을 갖추어 말씀하시고 문제의 핵심을 짚어 온건하면서도 바르게 지도해주시는 것을 보았다. 저런 어른이 계시어 공주가 비로소 공주답지 않겠느냐 그런 감회를 가졌었다.

우리 문화원의 김민영 양은 선생 댁의 위치를 미리 알고 있는 듯 했다. 자동차는 머뭇거림도 없이 공주의 중앙거리를 지나 공주고등학교 정문에서 좌회전하여 금학초등학교 쪽으로 향했다. 그 길은 공주고등학교 담장을 한 바퀴 돌아 다시 큰길로 나오도록 되어 있는 길로 나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길이다. 일찍이 고등학교 다닐 때 하숙을 했던 집이 그 길 가에 있었고 평소 산책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지나다니던 길이기도 하다. 자동차는 공주고등학교 담장을 반쯤 돌아서 한적한 길가에 멈췄다. 진달래꽃 한 그루가 활짝 피어 있는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공주시 중학동 171-1번지. 대문의 오른편 기둥에는 ‘공고담길 29-3’이란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대문은 열린 채였는데 열 개 정도의 시멘트 계단 위에 조금은 높직이 올라앉아있는 단정한 일층 양옥집이었다. 사람의 예감이란 이상한 데가 있다. 김민영 양이 저 집이 바로 윤여헌 선생 댁이라고 일러주지 않았음에도 나는 대번에 그 집이 윤여헌 선생 댁일 거라는 직감을 가졌다. 어쩐지 그래야 될 것만 같았다. 앞에서 밝혔듯이 이 동네는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나 1979년 공주로 이사와 살면서 수시로 오간 골목이다. 그러므로 그 집을 여러 차례 충분히 보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집이 윤여헌 선생 댁일 거라는 생각은 까마득히 하지 못했던 바다.

미리 연락 드렸으므로 선생은 댁에 계셨다. 가볍게 입는 운동복 차림이셨다. 반갑게 웃으면서 손을 이끌어 들인 집은 오래 된 집이지만 높은 천정과 헌칠한 실내공간을 자랑하고 있었다. 선생의 방은 문간 쪽으로 있는 해밝은 방인데 창밖으로 활짝 핀 홍매 한그루가 보였다. 나는 백매는 어디 있느냐 선생께 찾았다. 선생은 다른 쪽 창문으로 보이는 백매를 보여주셨다. 그러면 그렇겠지. 홍매가 있으면 백매가 더불어 있는 법이다. 이런 일 하나만으로도 선생의 삶의 향기가 절로 느껴진다 할 만하겠다.

창문 쪽으로 두 개의 방석이 놓여 있었다. 선생이 마련해놓은 손님의 자리였다. 마주 앉았을 때 선생의 뒤로는 서가가 보였다. 선생이 평생을 손때 묻혀가면서 보아온 서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방안을 둘러보니 여러 가지 선생이 평소 사용하고 있는 물건들이 보였다. 소형 오디오 세트. 다기를 얹은 다탁. 가운데서도 특이한 것은 원통형 모양으로 된 장군이었다. 선생의 말로는 영평사 환성 스님이 주신 물건인데 찻물을 담는 그릇 용도라 했다. 옹기로 된 그릇이라 살아서 숨 쉬는 기능이 있어 물을 담아두어도 보름정도는 변하지 않는다 했다. 보통 그릇의 7부쯤 담아두는데 현재 담겨 있는 물은 연기군 전의면에 있는 비암사(碑巖寺)에서 길어온 물이라 했다.

   
 
선생은 천천히 장군의 아래쪽 꼭지를 틀어 전기포트에 물을 담았다. 찻물이 끓는 동안 방안을 둘러보니 몇 점의 서화가 걸려 있고 눈길 가는 곳에 책상 하나가 보였다. 그 책상은 앉은뱅이 책상인데 아주 오래된 물건으로 보였다. 허지만 크기가 제법 컸고 모양도 짜임새 있고 잘생긴 책상이었다. 또 그 위엔 컴퓨터 모니터가 놓여 있었다. 요즘도 쓰시는 책상인가 보았다.
“선생님, 저기 있는 책상이 선생님 책상이신가요?”
“네, 저 물건은 소학교 5학년 때부터 쓰던 것입니다.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된 유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시군요. 대단히 모양도 단아하고 좋군요. 저도 초등학교 5학년 때 할머니가 사다주신 소나무로 만든 책상이 있었는데 이사 다니는 동안 없어졌습니다.”
“그렇지요. 누구나 이사 다니면 그렇게 되지요. 저것은 지금 공주시내의 국민도서 조금 못 미쳐 있던 목공소에서 만든 것입니다.”

내가 처음 선생을 가까이 뵈온 것은 1990년도 충남교육연수원이 문을 열고 거기서 장학사로 일을 할 때이다. 선생은 공주대학교의 현직 교수로 계셨는데 자주 우리 연수원에 강의를 하러 오시곤 했다. 주로 법학에 관한 강의였고 또 선생의 강사소개서를 보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선생은 ‘공주향토문화연구회’란 단체의 회장을 맡고 계셨다. 나는 조금쯤 어리둥절했다. 그 두 가지 영역이 잘 연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공주향토문화연구회’는 공주지역의 향토사 연구 모임으로 1988년에 공주사범대학 교원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학술모임이다. 그 해에 <웅진문화>란 학회지를 창간한 이래 계속해서 학회지를 발간하고 있으며 1993년부터는 모임의 가입자격을 일반인에게도 개방하여 시민단체로 전환, 운영되고 있다. 주로 문화연구 및 답사활동, 세미나 개최, 향토지 발간, 국제교류 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현재 회원은 86명이다. (디지털공주문화대전 참조)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우리 앞에 선생이 우린 찻잔이 놓였다. 입에 대기도 전에 차의 향기가 느껴졌다.
“선생님, 차 맛이 참 좋습니다. 특히 향기가 독특합니다.”
“아마 그럴 겁니다. 황차란 이름의 차인데 중국에서 온 차입니다.”
“선생님, 어떻게 법학을 전공하신 어른이 향토사학가가 되시었나요?” “공주를 문화도시, 역사의 도시라 그렇게 말들을 하지요. 그러나 내가 젊었을 때는 내놓을 것이 별로 없었어요. 역사를 하는 분들은 민족사다, 한국사다 그런 거창한 것만 다루었지, 지역에 관한 것은 별로 언급을 하지 않고 있었고 그래서 나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향토사학을 시작한 것이지요. 그렇게 모임을 만들어 재작년까지 20년 동안 회장을 맡다가 최석원 교수에게 자리를 넘겼습니다.”

선생은 요즘 우리 문화원에서 내는 <공주문화>에 오희숙 기자를 통해 공주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묵은 이야기, 잊혀진 이야기를 풀어내고 계시다. 매회 아주 귀중한 자료를 보여주시어 공주 사람들뿐만 아니라 외지 사람들에게까지 많은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선생님, 요즘도 향토 역사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계신가요?”
“웬걸요. 이제는 나이도 들고 눈도 잘 보이지 않고 그래서 전만 못합니다. 지난 연초에는 공주경찰서에 나가 강의를 했는데 이젠 연대를 외우는 것도 힘들고 그래서 어렵습니다. 이제 나이 여든 셋입니다. 1928년생이니까요.”
“그렇게 되시었나요? 선생님, 오희숙 기자 같은 사람한테 들으니 선생님께서는 외국어를 여럿 구사하신다는데 거기에 대해서도 말씀 좀 해주시지요.”
“아, 젊은 시절 여러 가지로 관심이 많았습니다. 대학에 다닐 때는 독문학자이면서 수필가인 김진섭(金晋燮) 선생한테 강의를 들으면서 문학에의 꿈도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로는 공주고등학교 에서 7년 동안 독일어 교사를 했습니다. 그런 뒤, 1962년도 공주사범대학에 사회과가 생겨 교수로 옮겼지요. 대학에서도 법학과 독일어를 함께 강의했습니다. 나(羅) 원장은 글을 좋아하는 분이니까 내가 책 한 권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선생은 서가에서 한권의 책을 꺼내 놓았다. 『月塘 散文集』. 그 책은 1988년, 선생이 회갑을 맞을 때 만든 기념 문집이었다.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논설 종류의 글이었고, 2부는 향토사 종류의 글, 3부는 문예 분야의 글이었다. 당초 선생이 공주대학교에서 오래 동안 대학신문의 주간으로도 계셨고 향토사학가로 활동하신 것을 알고 있으니 1, 2부의 글은 충분히 수긍이 가는 바이다. 그러나 3부에 실린 여러 편의 수필과 평론, 그리고 번역물에 대해서는 조금은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선생님께서는 문학작품으로서의 글도 많이 쓰시었군요.”
“네. 젊은 시절 이것저것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여기 독일의 작가 하우프트만(Gerhart Hauptmann, 1862.11.15~1946.6.6)의 「鐵路지기 틸」이란 글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 글은 1959년도 <文藝>란 본격 문학잡지의 창간호에 실렸던 글이군요.”
선생은 서가에서 아주 작고도 얇은 책 한 권을 꺼내놓으면서 말씀을 이으신다.
“그것은 여기 있는 이 문고판 책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것이 세계적으로 문고판 서적의 효시가 된 독일의 레크람(Reclam) 판으로 나온 원서입니다. 공주고등학교 교사로 있을 때 번역한 것이지요. 마침 임헌도(林憲道) 선생이 다리를 놓아주어 그런 잡지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참 몰랐습니다. 우리 공주에 이렇게 독일 문학에 대해서도 정통한 어른이 계시다는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특히 레크람 판이란 용어는 라이너어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의 첫 부분에 나오는 용어인데 그 용어를 선생님 댁에서 다시 듣다니 놀랍습니다.”

   
 
나는 여기서 선생과 서울대학교 동기인 이화영 선생이 하신 말을 잠시 상기해 본다.
“윤여헌 선생은 공주의 지성 1호예요.”
어떤 자리에선가 그런 말씀을 했을 때 나는 의례적으로 하는 말씀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말씀이 허사(虛辭)가 아니고 사실이었던 것이다. 내친걸음, 나는 선생에게 다시금 어디선가 들은 말씀을 꺼내놓는다.
“선생님, 언젠가 선생님이랑 몇 분이서 프랑스 신부님한테서 불어를 배우신 일도 있으시다면서요? 거기에 대해서도 좀 말씀해 주시지요.”
“아주 오래 전의 일입니다. 공주 중동성당에 프랑스인 빠이에란 이름의 신부님이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매우 자아가 강한 분이고 강직한 분이라 적당히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타이트하게 공부를 시켰지요. 그분으로부터 한 4년 쯤 불어를 배웠을 겁니다. 함께 공부한 사람 중에 강명경 교수(공주사대), 이인준 교수(공주교대 수학과). 공주사대부고의 조윤장 교감, 그리고 우리보다 앞서 배운 분으로 나중에 공주사대의 불어과 교수가 된 유재경 선생이 있었습니다.”
“아니, 신부님한테 불어를 배워 불어교수까지 되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게 사실입니다. 뿐더러 빠이에 신부는 우리 공주를 아주 많이 좋아하고 사랑한 분이었습니다. 공주의 자연과 공주 사람들을 사랑했지요.”
이쯤에서 윤여헌 선생이 알고 있는 외국어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일제 침략기에 청소년기를 보냈으므로 일본어는 물론 공부했을 것이고 영어는 또 기본일 것이니, 여기에 독일어와 불어를 보탠다면 한국어와 함께 그야말로 5개 국어를 사용하는 실력이다.
“선생님은 참 여러 가지로 능력이 많으시군요. 다섯 개의 언어 구사에다 법학 전공에다가 향토사학 연구에 이르기까지.”
“이것저것 한다는 것은 아무 것도 제대로 못한다는 뜻입니다.”
선생은 또 이렇게 겸양의 말씀으로 마주 앉은 사람의 마음을 주눅 들게 만든다.

“선생님, 그동안 향토사학을 하시면서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인가요?”
“내가 일본어를 좀 해서 여러 가지 의미 있는 일을 했습니다. 관광객으로 일본인들이 공주를 방문하면 그들을 상대로 하여 공주의 백제 문화유적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또 전엔 현지 일본에 가서 강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1994년과 1995년 두 차례, 공주시와 자매결연도시인 야마구찌(山口)시와 공주로터리클럽과 역시 자매결연도시인 누마즈(沼津)시에서였습니다. 각각 ‘백제문화와 일본에 대해’와 ‘한일 우호의 역사’란 제목으로 강연을 했지요.”
“그렇다면 아쉬웠던 점은 무엇이 있을까요?”
“아쉬운 점요? 많지요. 평생 동안 정성껏 모았던 서화자료 10여권을 몽땅 도둑맞은 일이 마음에 가장 많이 걸립니다. 그냥 절도가 아니고 강도가 들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2002년일 겁니다. 공주감영 400주년 기념으로 전시회를 했을 때 관찰사의 간찰(簡札: 편지)이라든지 육필이 있으면 전시회에 도움이 되겠다 해서 10여점 출품을 했는데 그 때 도둑씨가 출품자의 이름을 기억해두었던가 보아요. 2년 뒤인 2004년도에 몽땅 가져갔습니다.”

“그러면 선생님, 요즘엔 무슨 공부를 하고 계시나요?”
“이제 공부도 잘 안됩니다. 요즘엔 『남정록(南征錄)』이란 책을 살피고 있습니다. 이 책은 한글로 기록된 필사본인데 백락완(白樂浣)이란 대관(隊官: 오늘날 군대의 중대장 직위)으로 있던 사람이 동학혁명군을 정복한(자기네 입장으로는 토벌한) 내용을 쓴 책입니다. 일기체로 쓴 책이라지만 일종의 이면사인 셈이지요. 이 책엔 공주의 고유명사도 나오고 당시의 여러 가지 비화(秘話)가 나와서 재미있습니다.”
선생은 지나가는 말씀처럼 공주지역의 유물 유적이 제대로 보존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에 대해서 걱정을 하신다. 예를 들어 산성공원의 쌍수정 아래에 있는 ‘쌍수정 사적비’가 제대로 보존되고 활용되고 있느냐 반문하신다. 그렇게 소중한 자료가 음침한 전각 안에서 썩고 있어야 되겠느냐는 것이다. 이 비석은 상촌(象村) 심흠(申欽)이 글을 짓고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이 글씨를 썼는데 특히 글씨가 안진경체(顔眞卿體)로 쓰여진 귀한 것이라서 일제침략기엔 이 글씨를 탁본하여 글씨체의 본으로 삼을 정도였다고 한다.

선생 댁에 머물며 대화를 하기를 한 시간 남짓. 이제는 물러나야 할 시간이다 싶어 김민영 양과 선생 댁을 나왔다. 선생은 우리가 자동차를 타고 돌아가는 것을 보기 위해 대문의 계단을 내려 행길 가에까지 나와 오래 동안 한 자리에 서 계셨다. 선생과 헤어져 돌아오면서 잠시 생각에 잠겨 본다. 이제는 윤여헌 선생 자체가 공주로서는 하나의 고귀한 인간문화재가 아닐까. 선생의 춘추가 여든 셋이라 하니 더 늦기 전에 선생이 보다 건강하실 때 선생을 모시고 공주의 의미 있는 장소를 찾아다니며 선생이 알고 계신 귀중한 내용들을 전수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다. 가능하다면 시청각 자료를 동원해 기록해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윤여헌 선생이야말로 자랑스런 공주인의 표상이요 공주의 마지막 자존심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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