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김정섭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원장직대

 ▲김정섭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원장직대.
공주에는 인물이 많다. 고장의 역사가 오래 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반도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적이 많아서일까?

종합적으로 보면, 금강과 계룡산으로 대표되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웅진백제의 왕도이자 조선조 300여 년 간 충청감영이 위치한 덕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공주의 자연과 인문 환경이 특출했다는 거다.

하지만 일반시민의 수준에서 ‘공주의 역사인물을 꼽아보라’는 말에 쉽사리 답을 얻기 어렵다. 제대로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우리 지역의 적나라한 현주소라고 생각한다. 자기 정체성을 잘 알지 못하고, 내 것이 소중한 것을 모르고, 휘황한 신기루만을 좇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제안하고자 한다. ‘공주의 역사인물 기념관’을 세우자. 우리 정체성 찾기의 일환이다. 공주의 역사인물을 딱 열 분만 모시자. 그분들의 생애를 기록하고, 유물을 전시하고, 관련 자료를 망라해 도서실과 영상실을 운영하자.

우리 역사에 당당히 기록된 공주의 역사인물에 대해 청소년과 시민들에게 알려주자. 공주를 찾는 외지인들에게 공주의 인물 자랑 좀 하자.

공주는 475년부터 63년간 백제의 왕도였다. 비옥한 금강을 젖줄 삼아 선사·고대 문화를 꽃피웠다. 통일신라 때에는 충청지역 13개 군, 29개 현을 통할하던 웅천주였다.


고려 성종 2년(983년), 전국에 12목을 설치할 때 충남에서 유일하게 공주목이 설치되었다. 선조 32년(1602년)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되어 충북 18개, 충남 36개 고을의 수부가 된 이후 한때 충청도는 ‘공청도’ ‘공홍도’로 불리기도 했다.

1896년 남북도로 분리될 때까지 충청도관찰사가 공주에 주재했다. 충청도의 행정과 군사,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은 1932년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할 때까지 330년 동안 계속되었다.

역사의 중심지였던 만큼 공주의 수많은 역사인물은 우리 고장의 정신적 샘물의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공주의 정신을 형성해온 위인들의 뜻과 행적을 중심으로 <공주 역사인물 10인 기념관>에 모실 열 분을 시대 순으로 생각해보았다.

1. 웅진백제 중흥의 주역, 무령왕 (461~523)

무령은 백제 제25대 왕(재위 501~523)이다. 동성왕이 피살되자 4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왕권을 안정시켰다. 북방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여 고구려와 세력 균형을 이루게 됨에 따라 국제적 지위도 격상되어 양나라로부터 영동대장군 작호를 받았다. 활발한 외교와 교역은 물론, 일본에 정기적으로 문물을 전해주었다. 지방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22개의 담로를 파견하고 농업생산력 증대정책을 펴는 등 백제 중흥의 길을 열었다.

2. 신라시대 ‘공주의 효자’향덕

신라시대 웅천주(공주시 소학동)의 인물로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그의 효행이 전한다. 즉, 755년(경덕왕 14년) 봄, 심각한 기근이 전국을 휩쓸고 전염병까지 돌아 부모 공양이 막연해지자 향덕은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국을 끓여 부모를 봉양하였다.

또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입으로 종기를 빨아 치료하였다. 이를 안 왕이 집과 곡식, 토지를 내려주고 비석과 정려를 세웠다.

부모를 봉양하고자 아물지 않은 다리로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으려다 붉은 피가 냇가를 적셨다고 해서 ‘혈흔천’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3. 충신의 상징, 절재 김종서 (1383~1453)

공주 의당면 월곡리에서 태어나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한 이후 정통관료로 승승장구했다. 특히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함길도관찰사로 파견되어 6진을 개척, 두만강까지 국경선을 확장하였다.

문종 대에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세종실록』의 편찬 책임을 맡았고, 어린 단종에게는 가장 든든한 왕권의 보루였다. 그의 존재는 왕위를 넘보던 수양대군에게 큰 걸림돌로 여겨져 결국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피살되었다. 묘소는 장기면 대교리(세종시에 편입)에 있고, 동학사의 숙모전과 요당서원에 배향되었다.

4. 임진왜란의 물꼬를 바꾼 의승장, 영규대사 ( ?~1592)

공주 계룡면 출신의 승려로, 임진왜란 때 승병 수백 명을 규합하여 청주성의 왜적을 물리치고 탈환했다.

이후 의병장 조헌과 함께 금산 전투에 참가해 호남으로 밀려드는 일본군을 저지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금산 7백의총의 상당수는 계룡산 승병이며, 영규대사 자신도 금산 전투의 부상으로 절명했다. 그의 묘소는 계룡면 유평리에 있고, 갑사에서 매년 10월 추모대제를 올리고 있다.

5. 동아시아 침구의 대가, 허임 (1570 ?~1647 ?)

허임은 1593년 약관의 나이에 궁중 의관으로 발탁되어 침술 치료를 한 공으로 임금으로부터 수차례 포상을 받았다고 왕조실록에 전한다.

출신성분을 뛰어넘어 양주목사, 부평부사를 거쳐 남양부사에 임명되는 등 여러 관직을 맡았다.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시종하여 공주지역에 몇 달간 머무른 인연으로 중년 이후에 공주(우성면 내산리)에 정착했다.

1644년에 조선시대 최고의 침구 서적인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을 간행, 그의 풍부한 임상경험을 후대에 널리 활용하게 하였다.

6. 일본의 도조(陶祖)가 된 이삼평 ( ? ~ 1655)

계룡산 철화분청자기의 고장인 충청도 금강(공주시 반포면)에 살던 도공 이삼평은 임진왜란 중인 1596년 나베시마 나오시게 군대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갔다.

1616년 사가현 아리타에서 고령토를 발견하고 155가구의 도공들을 지휘하여 순백의 자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때부터 아리타는 일본 도자기의 성지가 되었고, 일본 전역과 유럽으로 퍼져나가 막대한 수익과 문화적 선풍을 일으켰다. 매년 5월 아리타에서는 이삼평을 기리는 도조제가 열린다.

7. ‘충청 5현’ 초려 이유태 (1607~1684)

본관은 경주(慶州)로,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공주에 정착하였다. 이조참의, 동부승지 등을 지내고 효종대에 북벌 계획에 참여하였다.

1675년 복상 문제로 제2차 예송이 일어나 남인의 배척을 받아 유배된 이후 공주에 낙향, 충현서원의 원장을 지냈다.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유계와 더불어 ‘충청 5현(賢)’으로 꼽힌다.

예학에 뛰어나 많은 저작을 남겼고, 율곡 이이를 모범으로 삼아 점진적인 경장론(更張論)을 전개하였다. 또한 향촌 조직과 오가작통법 실시, 양전 시행 등을 주장했다. 그의 유지는 공주시 상왕동 용문서원에 전한다.

8. ‘일동장유가’ 남긴 퇴석 김인겸 (1707~1772)

석장리에서 태어난 문향(文鄕) 공주의 대표적 문인이다. 영조 39년(1763)에 일본통신사로 11개월간 보고 들은 문물, 제도, 인물, 풍속 등을 실감있게 묘사한 장편 가사 『일동장유가(日東長遊歌)』를 남겼다.

정철의 『관동별곡』의 맥을 이어, 조선후기 외국기행 가사로서는 홍순학의 『연행가』와 쌍벽을 이룬다. 한양에서 에도까지의 왕복길을 풍부하게 묘사, 당시 사절단의 규모와 양국의 외교모습뿐만 아니라 위트와 해학이 넘치는 훌륭한 기행문으로 꼽힌다.

9. ‘개화혁명’삼일천하의 주역, 김옥균 (1851~1894)

정안면 광정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문장․시․글씨․그림․음악 등에 다재다능했고 퇴계학풍을 공부하였다. 이후 오경석, 박규수 등에게 개화사상을 배웠다.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한 이후 개화당을 만들고 일본의 근대화 실정을 시찰하기도 했다.

조선독립을 추구하는 개화당을 탄압하던 친청(親靑)세력과의 정치적 대립이 점차 첨예해지자 김옥균은‘위로부터의 근대화개혁’을 하고자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삼일천하’로 끝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10년간 일본에 머무르다 1894년 상해에서 피살되었다.

10. 판소리 명창 박동진 (1916~2003)

중요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 보유자였던 박동진은 적벽가뿐 아니라 거의 모든 판소리를 완창하며 판소리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공주 무릉동에서 태어나 당대의 명창이었던 김창진 밑에서 심청가, 정정열에게서 춘향가, 조학진에게서 적벽가를 배웠다.

1968년, 5시간에 걸친 흥부가 완창을 시작으로 춘향가, 심청가, 옹고집전을 비롯해 수많은 판소리 완창으로 명성을 쌓았다. 말년에 후학을 양성하던 박동진판소리전수관에 그의 유품이 전한다.

이렇게 열 분을 선정하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시민 의견을 수렴하고 학술적 고찰을 거치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공주의 역사인물 50인’이라는 책을 편찬한다면, 공주의 정신사를 더욱 풍부하게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학생들부터 시민들까지 공주의 혼과 정체성을 잘 알고 가꾸어가도록 해야 한다. 자긍심과 애향심을 키워줘야만 공주의 발전을 위해 힘쓰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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