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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들판을 걸어 갈 때
나태주 공주문화원장  |  tj45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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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12.27  06:4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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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에 남겨진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의 자취

   
▲민족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김구 선생이 공주를 두 번째로 찾았을 때 마곡사를 방문해 찍은 기념사진.
공주가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과 관계가 깊은 고장이라면 저간의 곡절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선뜻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공주 사람이라도 그러할 것이다. 일제 침략기 가장 치열한 독립운동가였으며 상해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 광복된 조국에 돌아와 동포가 쏜 총탄에 목숨을 빼앗긴 애국자 김구 선생. 그렇게 암살 당함으로 동포들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을 슬픔의 옹이를 남겼고 그 옹이로 말미암아 두고두고 사랑과 존경과 안타까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 비운의 정치가 김구 선생. 김구 선생은 젊은 시절에 한 차례, 해방된 뒤에 다시 한번 공주와 아름다운 인연을 갖는다.

알려진 연보에 따르면 김구 선생은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1876년) 어려서부터 심신이 강건하고 의협심이 출중한 인물이었다 한다. 스무 살 되던 해(1896년)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란 곳에서 일본 군사 간첩 토전양량(土田讓亮)을 맨손으로 때려죽이고 해주 감옥을 거쳐 인천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러다가 2년 뒤(1898년) 탈옥에 성공하여 전국을 떠돌게 된다. 공주의 마곡사로 들어와 승려가 된 것은 선새의 나이 22세 때의 일. 법명은 원종(圓宗)이라 했다. 오늘날 마곡사에 가보면 마곡사 뒤편 태화산 등산로가 스쳐 지나가는 길목에 백련암이란 암자가 있는데 그 암자가 바로 김구 선생이 머문 절이라고 안내문이 되어있는데 이는 확인된 바 없는 일이고(김구 선생 전기나 『백범일지(白凡逸志)』어디에도 쓰여있지 않은 내용이므로), 어쨌거나 젊은 시절의 김구 선생은 마곡사에서 스님이 되어 반년 동안 머물다가 떠난다. 그건 망국의 한을 풀기도 하고 잠시 피신을 목적으로 그리 했을 것이란 짐작이 가는 일이다. 이 때까지 김구 선생의 이름은 창수(昌洙)였는데 이 이름도 실은 본명이 아니라 16세 때(1892년) 과거시험에 실패하고 동학에 가입하면서 개명한 이름이다. 더 어렸을 때 이름은 창암(昌巖)이었고 김구란 이름으로 바꾼 것은 그 뒤 세 번째 옥살이를 하던 37세 때(1913년)의 일이고 이 즈음부터 백범이란 아호도 더불어 사용하게 된다.

김구 선생이 공주를 두 번째로 찾은 것은 민족 해방 이듬해인 1946년의 일이다. 선생은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하고 조국이 독립을 되찾게 되자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 국무요원 일동과 함께 개인자격으로 귀국하게 된다. 귀국하여 이런저런 국가적인 일에 신경을 쓰다가 그 이듬해 남한지역을 순회하는 여행을 떠난다. 첫 번째로 찾은 곳이 인천이고 두 번째가 공주였으며 세 번째가 예산이다. 인천을 선두로 방문한 것은 두 번이나 옥살이를 했을 뿐더러 그곳에서 고생을 할 때 크게 도움을 받은 김주경(金周卿)이란 인물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김주경 씨는 첫 번째 옥살이를 할 때 김구 선생을 구출하기 위해 7, 8개월 동안이나 조정의 대신들과 아문의 고관들을 찾아다니며 자기의 전 재산을 탕진하다시피 한 고마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공주를 선택한 것은 물론 마곡사를 돌아보기 위함이었고 예산으로 간 것은 홍구공원의 영웅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의사 댁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선생이 공주를 찾았을 때의 정황은 선생이 직접 남기신 『백범일지』하권에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공주에 도착하니 열 한 개 군에서 10여만 동포가 모여서 나를 환영하는 회를 열어주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열 한 개 군이면 충남의 전체 군쯤 될 것이요, 10여만 명의 동포라면 오늘날로 보아서도 대단한 군중이다. 얼마나 공주 사람들, 더 나아가 충청도 사람들의 환영의 열기가 높았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겠다. 이 때 직접 그 군중에 끼어 김구 선생을 보고 또 가까이 접견한 한 사람이 있다. 이 분은 김구용 시인으로(본명 김영탁, 시인이며 번역가, 성균관대학교 교수 역임) 그 분은 그 당시 계룡산 동쪽의 절 동학사에 칩거하며 공부하는 학인學人으로 지내고 있었다. 거기서 경전과 동서고전을 섭렵, 번역하면서 시도 쓰고 있던 분이다. 김구 선생이 공주를 방문한다는 소문을 듣고 계룡산을 넘어 공주에 와보았더니 엄청난 군중이 모여 있더라고 했다.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였다는 것이다. 시인이 김구 선생을 처음 뵈온 것은 금강교 너머 전막이란 곳. 이 곳은 예전엔 길 양쪽으로 허름한 집들이 들어서 있던 조그만 마을이었는데 거기서부터 김구 선생은 차에서 내려 금강교를 건너 공주시내까지 일행과 더불어 걸어가셨다고 한다. 김구 선생은 평소 차를 타고 가다가도 노인들이 길가에서 당신을 알아보고 고개 숙여 인사를 하면 도무지 송구한 마음 때문에 그냥 있을 수 없다며 꼭 차에서 내려 일일이 악수로 인사를 받았다 했는데 아마도 그 날도 노인들이 노변에 나와 선생께 고개 숙여 인사를 드렸던 모양이다.

   
▲ 마곡사에서의 49제후 기념촬영 장면.

군중에 끼어 선생을 뵈니 일흔 살 노인인데도 걸음걸이가 젊은이 못지 않게 활달했는데 선생은 종아리가 반쯤이나 나온 칠부 바지차림이었다 한다. 또한 바지 안에는 아무 것도 입지 않은 맨살이어서 그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선생은 그 날 밤 동명장이란 공주 시내 중심에 있는 한 여관에서 묵으셨는데 많은 사람들의 방문을 받았다 한다. (동명장은 그 뒤 음식점으로 바뀌어 1980년대까지 운영되다가 지금은 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 마니또란 이름의 팬시점이 서 있다.) 선생을 뵈올 때는 경찰서장이 직접 방문자를 만나 이름과 방문 목적을 받아 적은 뒤, 그 쪽지를 선생께 전하면 접견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시인도 많은 방문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김구 선생을 뵈었는데 김구 선생은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선생과 나란히 앉아서 큰절로 드리는 인사를 받고서는 "나와 함께 광복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말씀하더라는 것이었다. 헌데, 그 눈빛이 어찌나 강렬하고 뜨겁던지 더럭 겁이 나서 대답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그 방을 물러 나왔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김구용 시인이 직접 필자에게 들려주신 것인데 지금은 김구용 시인도 고인이 되고 말았으니 내게도 제법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실감하게 된다.) 이 날이 1946년 4월 27일이고 그 다음날 선생은 동명장을 떠나 마곡사로 향한다. 그런데 선생은 마곡사를 찾기 전에 금강변 공산성에 오르기도 하신다. 공산성 제일 높은 자리에 서 있는 누각인 웅심각(雄心閣)을 둘러보고 조국이 광복이 되었으니 누각 이름을 광복루(光復樓)라 고치는 것이 좋겠다 하여 그 이름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것이 김구 선생이 공주에 다녀가신 첫 번째 흔적이 된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마곡사를 찾던 날 선생을 따르는 정당․사회단체 대표가 350여명이었고 마곡사에서는 승려 대표가 공주까지 마중 나왔으며 마곡사 동구 밖까지 남녀 승려들이 도열하여 젊은 날의 짧은 인연을 잊지 않고 찾아오는 선생을 지성으로 환영했다 한다. 그것은 48년만의 방문이었는데 그 날 밤 선생은 염화실(拈花室)에서 잠을 잤으며 마곡사의 승려들은 선생을 위해 불공을 들여드렸다고 한다. 이튿날 예산으로 떠나기 앞서 무궁화 한 포기와 향나무 한 그루를 기념으로 심으셨다 한다. 지금 마곡사 경내에는 선생이 심었다는 무궁화는 보이지 않고 향나무 한 그루는 그대로 남아 있다. 마곡사 본전이라 할 대광보전(大光寶殿)을 바라보고 마당의 왼쪽 구석에 안내판과 함께 서 있다. 그런데 여러 차례 옮기고 또 옮길 때마다 우듬지를 잘라줘서 그런지 그 수형이 별로 예쁘지 않다. 나무는 김구 선생이 심었다는 명목으로 그나마 목숨을 부지하고 있음만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을까? 그렇다 치더라도 이것이 김구 선생이 공주와 인연 맺은 두 번째 소중하고 아름다운 증표가 된다.

선생은 즐겨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지었다는 오언절구 한시 한편을 친필로 써서 주변 사람들에게 주기도 하셨다. 그 글들이 선생이 글씨를 쓰시던 당시의 연세와 함께 적혀 있는 걸(복사본이긴 하지만) 여러 차례 본 적이 있다. 그 글은 마곡사 뒤편 선생께서 머물었다고 스스로 안내판을 세운 백련암에도 한동안 게시되어 있던 글이기도 하다. 오늘을 어지럽게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조용한 경종과 삶의 가르침이 될 듯 싶어 인용하면 이러하다. (원문: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蹟 / 遂作後日程)

눈 덮인 들판을 걸어 갈 때
발걸음을 어지러히 하지 마시오
오늘 당신이 남긴 발자국
뒤에 오는 사람 이정표 되기 때문이오.

― 서산대사,「눈덮힌 벌판에서」
 
   
▲ 마곡사의 옛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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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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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석
감동입니다.
(2012-01-13 11:4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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