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나태주 문화원장.
공주 지역에는 금강을 금강이라 부르지 않고 ‘비단강’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나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비단강. 비단 한 필을 다 풀어놓은 듯 아름답게 흐르는 강이란 뜻이다. 참으로 금강은 그 흐름이 부드럽고 순한 강이다. 전혀 소리가 나지 않는다. 무심히 보아서는 흘러오는 쪽과 흘러가는 쪽이 분간이 안 갈 정도다.

공주 사람들이라고 해서 금강이 아름다운 강이고 부드러운 강이고 순한 강이란 것을 처음부터 알 수는 없는 일이다. 비교개념이 있어야 한다. 이런저런 강을 두루 돌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건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 일찍이 문학 모임의 일로 화엄사에 간 적이 있었다. 마침 여름 장마철이었는데 지리산 옆을 스쳐 가는 섬진강에 물이 불어 강물이 콸,콸,콸, 소리를 내며 흘러가고 있었다. 늘 고요한 금강만 보아 온 나로서는 그러한 섬진강이 꽤나 의아스러웠다. 아! 저렇게 소리를 내며 흐르는 강도 있었구나.

그것은 금강이 부드러운 강이고 소리 없는 강이고 비단 같은 강이란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금강은 남한지역에서는 한강과 낙동강 다음으로 긴 강이고 섬진강과 더불어 4대강에 들어간다.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水分里) 신무산(神舞山) 뜬봉샘(비봉천飛鳳泉)이란 곳에서 발원하여 충청남도 금산으로 처음 발을 들여놓고 충청북도와 대전광역시 지역을 거쳐 공주, 부여, 논산을 두루 흘러 다시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도계를 이루며 흐르다가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과 전라북도 군산시 사이를 빠져 황해 바다로 흘러든다. 장장 401Km로 천 리가 넘는 긴 흐름이다. 유역 면적은 9,885.77k㎡로 남한면적의 10분의 1에 해당되는 넓이이다.

공주 지역에 흐르는 금강은 금강의 중류쯤 된다. 강폭이 넓고 훤칠해 보인다. 흘러 흘러 가며 아름다운 여울이며 소를 만들기도 하고 절벽이며 나루가 있는 풍경을 보여 주기도 한다. 그러나 요즘은 상류 지역에 만들어진 댐들(대청댐, 용담댐)로 수량이 많이 줄어 아쉬운 생각이 든다. 옛날엔 조그만 나룻배가 부강芙江(대전과 청주부근에 있는 포구)까지 올라갔다는데 지금 같아서는 상상도 못해 볼 일이다.

아무래도 금강이 강으로서의 본모습을 보여 주는 건 여름 장마철이지 싶다. 상류 지역에 홍수라도 지면 강폭을 가득 메우고 벙벙하게 흘러가는 황토색 강물이 장관이다. 특히, 공산성 아래 금강대교 난간을 붙잡고 서서 바라보는 금강의 풍경이 제일이다. 그때야말로 살아 숨 쉬는 금강의 실체를 만날 수 있는 기회이다.

한동안 대운하 건설 정책이 입줄에 오르내려 걱정했는데 그게 수그러들어 참으로 다행이다. 남한의 4대강은 청계천하고는 다르다. 청계천은 한정적인 지역이고 일부 계층(상인)의 생활이 걸린 문제이지만 대운하 공사는 전 국토를 재편성하는 일이다. 어찌 그게 만만한 일이겠는가. 그건 산을 모르고 강을 몰라서 세운 정책이다. 산고 강은 그냥 산과 강이 아니다. 역사와 문화와 함께 산과 강이다. 인간과 함께 산과 강이다. 더 나아가 산과 강이 인간이고 인간이 산과 강이다. 결코 단순치가 않다.

인간의 온갖 사랑과 미움, 애증의 세월과 더불어 산과 강인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를 댈 것이다. 무엇보다도 물 부족 해결과 수상교통, 관광, 환경 보존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일들이 필요하다면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면 되는 일이다. 어찌 우리가 금강에 바친 추억과 사랑까지를 추억과 사랑까지를 갈아엎는단 말인가!(그건 한강이나 낙동강, 섬진강 주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공주 사람들에게 금강이란 계룡산과 함께 마음속 깊숙이 각인된 이름이다. 공주 사람들처럼 금강이란 단어를 애용하는 사람들은 어느 지역에도 없지 싶다. 단체 이름이나 기관 이름, 건물 이름, 아파트 이름에 금강이란 말이 안 들어간 곳이 별로 없을 정도다. 심지어 병원 이름, 슈퍼마켓 이름까지 금강이란 이름은 널리 애용된다. 어쩌면 공주 사람들은 금강이란 이름을 공주란 이름과 같은 뜻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학 작품에서 금강이라고 하면 신동엽 시인과 그의 서사시 ‘금강’을 쉽게 떠올릴 것이다. 어떤 면에서 금강은 신동엽 시인의 전유물처럼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기도 하다. 신동엽 시인의 금강은 다분히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시각에서 본 금강이다. 또한 역사의식이 깊게 투영된 금강이다. 과거의 삶과 오늘의 삶을 꿰뚫는 힘을 지닌 금강이다.

백제(百濟)
옛부터 이곳에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거름을 남기는 곳

금강(錦江),
예부터 이곳에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

바람버섯도
찢기우면, 사방팔방으로
날아가 새 씨가 된다.
그러나
찢기우지 않은 바람버섯은
하늘도 못 보고,
번식도 없다.

신동엽 시인은 백제의 고도(古都) 부여 출신이다. 금강이 한 구비 더 흘러내린 논산시 강경 출신인 박용래 시인도 금강을 노래한 시를 썻다. 그것은 ‘황산(黃山)메기’란 시인데 물고기인 메기를 소재로 하여 생명의식을 아름답게 승화시킨 시이다. 더 나아가 생태 문제나 환경 문제에까지 접근하도록 유도해 주는 시이다.

내가 생각하는 금강은 또 다른 빛깔의 금강이다. 사람이 다르니 시도 달라질 수밖에 없고, 금강에 대한 시각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내가 생각하는 금강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정서적이고 생활적인 금강이다. 오래 사귀어 온 애인이거나 정다운 이웃이거나 친구와 같은 강이다. 살가운 누이와 같은 금강이다. 이름 부르면 금방이라도 고개 끄덕여 대답해 줄 것만 같은 금강이고 손을 뻗으면 잡힐 것만 같은 금강이다. 그야말로 지호지간(指呼之間)의 금강인 것이다.

비다강이 비단강임은
많은 강을 돌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알겠습디다

그대가 내게 소중한 사람임은
더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겠습디다

백년을 가는
사람 목숨이 어디 있으며
오십년을 가는
사람 사랑이 어디 있으랴․․․․․․․․

오늘도 나는
강가를 지나며
되뇌어 봅니다.

-나태주,‘비단강’ 전문

금강을 굳이 하나로 볼 필요는 없다. 고정적으로 볼 이유도 없다. 역사 속에 박제된 강으로 보아서도 안 된다. 금강은 현재 진행형의 강이고 미래 지향의 강이다. 살아 있는 목숨으로서의 강이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다양하게 보아야 한다. 자유스럽게 대해야 한다.

금강은 어떤 한 사람의 전유물이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럴 수가 없는 일이다. 말하자면 신동엽이나 박용래나 나태주의 금강만이 아니라는 말이다. 앞으로 나오는 시인들도 충분히 금강의 시인일 수 있다. 요는 얼마나 그가 금강을 마음 깊이 사모하고 오랫동안 간직하느냐는 점이다.
 

저작권자 © 파워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