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주를 떠난 朴方龍 공주박물관장

▲박방룡 전 국립공주박물관장.
지난 11월 25일(2009년), 박방룡 국립공주박물관장이 국립중앙박물관 유물부장으로 영전하여 공주를 떠났다. 2007년 11월에 공주에 부임했으니까 대략 만 2년 정도 공주에 머문 셈이다. 그러나 박 관장이 공주를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아쉬워하는 공주의 인사들이 많았다. 물론 나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사람이 이처럼 어떤 자리에 있다가 다른 자리로 옮길 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섭섭하게 생각해주는 일은 고래(古來)로 아름다운 일이고 뜻이 깊은 일이다. 참 인간다운 이별의 격식이겠다. 봄의 아름다움을 언제 절실히 느끼겠는가? 봄이 저물어갈 때이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그와 함께 할 때보다는 그와 멀어질 때 그의 진가를 확인하게 되는 셈이다.
박방룡 관장. 처음 만났을 때 결코 특별한 인물이 아니었다. 다만 선한 눈빛에다가 둥글둥글한 인상을 지닌 보통의 남정네였다. 그러나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경상도 출신치고는 참 낮고도 부드러운 톤을 가졌다 싶었다. 자분자분,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목소리에는 영혼의 울림 같은 것이 들어있지 싶었다. 어쩌면 그 점이 벌써 특별한 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박 관장을 처음 만난 건 지나간 봄의 일이다. 마침 한국시인협회 봄 야유회를 겸한 국보사랑 시낭독회를 공주박물관에서 첫 번째로 갖겠다 해서 장소 섭외의 역할이 주어져 단신으로 공주박물관장실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찾아온 사연을 듣고 박 관장을 친절하게 이런저런 정보를 주고 도움말을 주었다. 시인협회 회원들이 공주에 오는 날, 박물관 강당이며 여러 가지 시절을 사용하도록 허락해준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 날엔 당신이 미리 약속한 일정이 있어 함께 하기 어렵겠노란 말을 주었다.
그러나 정작 행사가 있는 날 박 관장을 선약을 깨고 박물관에 나와 있었다. 아무래도 서울서 많은 손님이 오는데 그럴 수 없었다는 판단에서였다 한다.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박 관장은 시인협회의 행사에 내내 관심을 갖고 참여하면서 나중에는 몸이 불편하신 원로 회원인 김남조 선생의 휠체어를 손수 밀고 다니며 박물관 내부 곳곳을 설명해드리기도 하는 성의를 보였다. 바라보는 마음이 참 따뜻하고도 고즈넉했다. 고맙다는 생각이 뒤따라왔음은 물론이다.

그 뒤로 내가 문화원장의 일을 맡고 이런 저런 기회에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회의석상이나 개인적인 자리, 식사 자리에서 보니 그는 앞부분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 좋은 사람이었다. 많이 알고 있지만 아는 척 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많이 가지고 있지만 많이 가지고 있는 척 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며 높은 자리에 있지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인 척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처신이 아니다. 게다가 그는 타인을 섬세하게 배려하는 마음까지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공공기관의 업무수행자로서도 특별한 역할을 했다. 기존관념으로는 박물관은 조용한 곳이고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박제된 공간이다. 그것이 기존의 박물관의 현주소였다. 그동안 공주의 박물관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그걸 확 바꾸어놓은 사람이 바로 박 관장이다.

시끌벅적한 박물관. 사람들이 많이 찾아가는 박물관. 살아서 움직이는 박물관. 아이들도 좋아서 찾아가는 박물관. 좀 더 머물고 싶은 박물관. 지역사회와도 소통을 잘하는 박물관. 이것이 바로 박 관장이 바꾸어놓은 국립공주박물관의 모습이다. 박물관으로서도 고맙고 공주로서 감사한 일이다.

올해가 마침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이 되는 해여서 박 관장은 이에 주목, 여러 가지 멋스럽고도 뜻 깊은 행사를 많이 치렀다. 2년 동안 공주에 머무는 동안 박 관장이 기획하고 실천한 일들을 일일이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어렵다. 개괄적으로 알아보면 그는 우선 박물관을 청소년들의 학습공간으로 개방하면서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활용하도록 했다. 또한 지역사회와 연대를 가지면서 유의미한 행사를 창조적으로 많이 개최하여 지역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얻었다.

그 가운데, ‘공주의 명가전’이라든지 ‘공주와 박물관’이라든지 ‘금수강산의 삶과 문화’ 같은 전시회는 다시금 되풀이하기 어려운 전시회로 꼽힐 만하다. 게다가 박물관의 공간과 시설을 십분 활용하여 음악회, 인형극, 마술쇼, 명사초청 강연회 같은 프로그램은 가히 수준급이라 할만하다. 그래서 공주박물관은 공주시민과 함께 호흡하는 박물관이 되었고 공주 사람들은 국립공주박물관을 즐겨 ‘문화박물관’이라고까지 부르게 되었다.

박 관장은 신라 문화권인 경주에 삶과 배움의 뿌리를 둔 인물이다. 자연스럽게 신라 문화권에 대해 깊은 애정을 지닌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박 관장은 그에 못지않게 백제 문화권에 대해서도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보아왔다. 이는 문화에 대한 편견이 없다는 얘기다. 이 또한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아주 특별한 일이다.

비록 박 관장은 공주를 떠났어도 박 관장과 가까이 했던 공주 사람들은 박 관장을 오래 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박 관장 또한 공주에서 살았던 2년 동안의 이런저런 일들을 쉽게 그의 사진첩에서 지우기는 어려울 것이다.

박 관장이 서울로 발령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리고 그 다음날 공주사람들 몇은 공주의 한 음식점에서 모여 이별의 의식삼아 점심식사를 나누었다. 황규형 전 교장. 이화영 전 공주대 교수. 윤여헌 전 공주대 교수. 정재욱 전 공주문화원장, 윤용혁 공주대 교수, 박방룡 관장, 나태주, 그리고 박물관 가족들 몇(존칭 생략).
그런데 이날 식사모임이 박 관장을 보내는 공주 사람들에 의해 주선된 것이 아니라 박 관장에 의해 주선되었다는 점이 다시금 눈물겹도록 특별하다. 박 관장은 이렇게 떠나는 시간대에도 자신을 철저히 낮추고 타인을 배려하는 특별한 마음쓰임을 지닌 사람이었던 것이다. 참 미소로운 한 사람을 우리가 안다 자랑할 만하겠다. 박 관장은 이임한 뒤 공주시청으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아 스물다섯 번째로 공주시의 명예시민이 되었다.


 

저작권자 © 파워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