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조의 '아가에게'..영화감독.대중문화평론가 이규형

아가에게

                                       김남조

아가의 머리맡에 햇빛이 앉아 놉니다
햇빛은 아가의 손님입니다

아가가 세상에 온 후론
비단결 같은 매일이었습니다
아직 눈도 아니 뵈는 죄그만
우리 아가

아가는 진종일 고이 잡니다
잠은 아가의 요람
아가는 잠에 안겨 자라납니다

아가는 평화의 동산
지줄대는 기쁨의 시내입니다

아가는 엄마의 등불입니다
아가 함께 있으면
훤히 밝아 오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가와 함께 있으면

                                                                                              영화감독․대중문화평론가 이규형

김남조 시인의 ‘아가에게’를 처음 대한 것은 중학생 때였다. 무슨 시집에서 본 것이 아니고 국어 교과서에 나와 있는 시, 당시에는 시험에 나올지도 몰라 억지로 외우고 주제와 소재, 그 다음에 은유법이 어찌어찌 되는 것을 분석해야 했다.

강렬하게(?) 웃겼던 것은 이 시 내용이 너무 과장돼 있다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앵앵 울어대고 똥싸대는 아기가 뭐 예쁘다고 ‘비단결 같은 매일’이었느니 ‘기쁨의 시내’라느니 해대는 건가. 아무리 제 아기라도 아가 때는 빨리 자라서 꼬마가 될 때까지 귀찮은 존재일 뿐이라고 확신하고 있던 때였다.

내가 그때까지 자라며 본 아기의 인상이라는 건, 버스에서 앵앵거리고 극장 안에서도 울어서 부모가 데리고 나가야 되고, 그놈의 똥오줌 기저귀를 하루에도 몇 차례씩 갈아대고 단 한 시도 가만 놔 둘 수 없는 시한폭탄으로 부모가 보호의 눈을 뗄 수 없는 성가신 존재가 바로 아가라고 여겼다.

그렇게 세월이 지났다. 그리고 내가 아기를 낳았다.
내가 김남조 시인의 ‘아가에게’를 낡고 낡은 ‘한국 명시집’에서 다시 읽은 건 바로 그때였다. 요전에 내가 자발적으로 찾아서 읽은 것이다. 한 자 한 자가 새로웠고 한 줄 한 줄이 비단결이며 시냇물이었다. 내가 이 시를 정말정말 절실히 실감한 것은 아가가 나에게 기적적인 힘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조재임을 체험하고 더더욱 그러했다. 스타워즈의 에피소드가 아닌 이규형과 아가의 에피소드를 들어보시라.

겨울밤 관객이 텅텅텅텅 정말로 텅 빈 극장에서 난 영화를 보고 있었다. 작품은 본인이 감독한 ‘헝그리 베스트5’. 개봉한 그 영화는 한국 영화 흥행 사상 최악의 결과를 기록한 참패였다. 안 그래도 손님 없는 마지막 회는 극장 전기값이 아까웠지만, 그래도 돌아가고 있었다.

극장 안의 상황을 말하자면, 저쪽 반대편 다섯 살 난 아들을 데리고 앉아 있는 어떤 남자 그리고 이규형 본인과 이제 겨우 6개월 난 여자(?) 이윤지 그렇게 네 사람이었다.

“윤지야, 아빠 영화가 오늘 비참하게 깨졌다.”
정말 미안했다. 내 친구들은 초등학교 6학년 딸들을 키우고 있는 판국에 이제 6개월 난 딸을 어부바해서 데리고 온 거다.

“고맙다, 아가야. 안 울고 와 줘서……. 이렇게 손님이 없지만 이 작품은 절대 나뿐 작품이 아니야. 딴 건 모르지만 아빠는 정말 뼛속 힘까지 바쳐서 우리 세대 최초의 극장용 만화영화 감독이 된 거란다.”

난 말도 안되는 변명을 윤지 귓가에 해댔다.

신기하게도 딸은 울지도 않고 지루해하지도 않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스크린에 빠져 있었다. 난 거의 죄인 같은 목소리로 딸에게 다짐했다.

“윤지야, 아빠가 오늘은 꼴등을 했지만 인 년 뒤에는 일등 하는 걸 보여 줄게. 꼭 보여 줄게. 고맙다, 이런 영화를 끝까지 봐 줘서…….”

영화가 끝나고 네 명의 관객 속에 섞여 나오면서 나는 딸을 꼭 껴안고 눈물을 삼켰다.

새해가 시작될 때부터 목표를 소박하게 잡았다. 윤지에게 약속한 말만 지키면 된다. 일 년 후엔 꼴등한 아빠가 일등 해서 너와 나의 자존심을 지켜 주마라고 했던 약속.

습관적으로 난 글을 쓰러 나올 때마다 윤지를 안고 나왔다. 동네 공원에 가족이 뭘 먹을 수 있게 나무 테이블이 놓여져 있는 곳이 있는데, 그것이 야외용 내 책상이라 생각하고 거기서 죽쳤다.

아내가 시장에 가거나 어디 갈 일이 생기면 딸을 안고 나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원에서 글을 썼다. 쓰는 게 지겹다 싶을 땐 노는 아기를 봤고, 그러면 자극을 받았고 새로운 힘이 났다. 그때마다 머릿속에 떠올렸던 것이 이 시 ‘아가에게’이다.

나를 매혹시킨 한편의 시(문학사상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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