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공주시의회 이창선 부의장

▲ 이창선 부의장<사진 왼쪽 세번째>이 이삼평 14대손 가나가에 쇼헤이<왼쪽 두 번째>와 공주시청 정근성 관광과장<왼쪽 네 번째> 등과 아리타 도석장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공주 한옥마을?··· 몽골촌에서의 숙박 체험

 
방문단 일행은 무령왕탄생지로 전해지는 가카라시마에서 열린 무령왕축제를 마치고 부근에 있는 나고야성박물관을 견학한 후, 송포(마츠우라)군 다카시마에 만들어진 몽골촌 숙박촌으로 들어갔다.

몽골촌은 공주로 말하면 한옥마을에 해당한다. 바닷가 푸른 초원에 하얀 몽골 텐트가 세워진 풍경이 특이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몽골 텐트에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숙소가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곳에 몽골촌이 만들어진 이유는 이 섬이 바로 일본을 침략한 몽골대군이 태풍으로 궤멸된 현장이기 때문이다. 1281년의 일이었으며, 이때 몽골군은 몽골만이 아니라 고려군과 중국 송나라군을 합해 도합 14만 군의 규모였다.

다카시마 역사민속자료관과 문화재센터에서는 주변 해안에서 발굴된 자료들을 보존·처리하고 정리해 전시하고 있다. 복원한 나무 닻, 화살촉, 돌로 만들어진 포탄, 도자기 등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었다.

공주대 윤용혁 교수에 따르면 몽골군이 처음 일본에 쳐들어온 것은 1274년이었는데, 이때는 후쿠오카에 상륙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후쿠오카 해변 12km에 걸쳐 장성을 쌓아 상륙을 저지하려 대비했다. 1281년 상륙에 실패한 몽골군이 대오 정비를 위해 다카시마에 집합했다가 태풍의 피해를 보았다고 한다.

일행은 전시관 관람 후 공주대 윤용혁 교수의 소개로 발굴을 책임지고 있는 오키나와 류큐대학 이케다 교수의 발굴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발굴현장은 전시관에서 바라다보이는 해안이었다. 이케다 교수는 최근에 송나라군 선체가 발견되어 발굴의 중요성이 확산되고 있고, 금년에도 간단한 조사가 예정돼 있다고 말했다.

▲ 일행들이 도자기의 원료를 채취한 도석장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아리타 이삼평 후손과의 만남

6월 2일 이삼평의 도자기 도시 아리타에 도착했다. 동학사 입구 조각공원에 이삼평 기념비가 있어서 이삼평 이름은 익히 들어온 터였다. 임진왜란 때 붙들려와 이곳에서 백자를 만들어 일본 도자기의 조상, 도조(陶祖)로 불리는 인물이다. 처음 다쿠에서 거주하던 이삼평은 몇 년간을 도자기 흙(광석)을 찾아 헤맨 끝에 아리타에서 이 흙을 발견, 1616년부터 백자를 생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3년 후 2016년은 아리타자기 400년이 되는 해이다.

아리타에서는 ‘쿠로카미’라는 필명을 가진 소설 <이삼평>의 작가, 그리고 이삼평의 14대손 가네가에 쇼헤이를 만났다. 쿠로카미는 이삼평 소설을 쓰기 위해 공무원을 일찍 사직하고 1년 동안의 집필 작업 끝에 소설을 완성했다고 한다. 가네가에 쇼헤이는 8년전 공주를 방문한 적도 있으며, 현재 자신이 재현한 초기 아리타 백자를 판매하는 상점을 운영하고 있다. 도자기의 원료를 채취한 도석장, 이삼평의 신사(도산신사)를 거쳐 이삼평의 묘소를 차례로 순방했다. 그리고 쇼헤이 상점에서 이삼평의 채취가 느껴지는 14대손의 자기를 몇 점 구입했다.

아리타는 인구가 많지 않은 산곡의 소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자기의 도시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다. 마침 공주 역시 분청사기로 유명한 지역이고, 동학사 입구에는 아리타의 이삼평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아리타와의 도자기 교류가 앞으로 활성화 된다면 공주 도자기 문화 진흥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봤다.

▲ 일행들이 이삼평 묘소에 참배하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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