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공주문화원장.
아내는 이제 내게 여자가 아니다. 나 또한 아내 앞에서 더 이상 남자가 아니다. 우리는 이제 중성의 사람들이다. 서로가 서로의 일부가 되어 버린 사람들이다. 그래서 편안해질 대로 편안해졌고 그럴 수 없이 친숙한 인간관계가 되었다. 우리는 서로가 보호자요, 서로가 기대고 의지할 기둥이거나 조그만 언덕이다. 이게 다 세월이 만들어 준 고마운 선물이 아니고 무엇이랴․․․․․․. 세월의 힘은 막강하다. 그 무엇으로도 당해 낼 수 없는 힘을 가졌다. 34년 세월을 우리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눈만 뜨면 얼굴을 마주했으며, 지지고 볶는 부부 싸움도 남들보다 더 많이 더 열심히 하면서 살아왔다.

아내가 아니었다면 우리 가족의 오늘날 살아가는 모습은 더욱 형편없었을 것이다. 특히 돈 문제에서 지금보다 더 힘들었을 것이다. 요즘이니까 그렇지 결혼 초기 초등학교 교사였던 우리의 경제 사정은 말씀이 아니었다. 교직 생활과 문단 생활을 병행하면서 바깥나들이가 잦았고 매달 일정량의 신간 도서를 구입했기 때문에 우리의 살림은 늘 궁색함을 면치 못했다. 게다가 나에게는 비밀스런 돈빛 까지 있었다. 모두가 바깥 활동을 하느라고 얻어서 쓴 것이었다. 아이들이 생기면서 살림살이는 더욱 힘들어졌다. 그래서 나는 우리집 돈주머니를 둘로 나누었다. 그것은 경작하는 논을 둘로 나누어 두렁을 만든 것에 비견될 것이다. 하나는 내가 가진 논, 또 하나는 아내와 두 아이를 위한 논. 만약 내가 정해진 용돈 이외로 돈이 필요하게 되면 아내한테서 빌려서 쓰도록 하였다. 그리고 돈이 생기면 갚아 나갔다. 그렇게 하여 나의 논에는 물이 마를망정 아내의 논에는 물이 마르지 않도록 하며 살았다.

아내는 참으로 돈을 아끼며 산다. 돈에 대해서 지독한 생각과 실천력을 지닌 사람이다. 그녀는 한동안 한 달에 한 번만 돈을 세는 사람으로 살았다. 무슨 얘기냐 하면 월급을 탄 날에 앞으로 1개월 동안 쓸 돈을 계산하여 요모조모로 쪼개어 이것은 찬값, 이것은 신문 대금, 또 이것은 아이들 용돈․․․․․․․․. 그런 식으로 종이 갈피에 끼워 두고 거기에 적힌 명목대로만 돈을 썼다. 충동구매나 과다 지출이 있을 수 없었고,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돈이 더 들어가면 아예 그 방면에서는 돈 쓰는 것을 중지해 버렸다. 해마다 겨울이 가까워지면 아내는 쌀과 연탄과 김장할 배추를 제일 먼저 사들였다. 그 세가지만 있으면 어떻게든 겨울을 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나름대로의 판단에서 그랬을 것이다.

지금도 마음이 아픈 것은 돈 때문에 아이들에게 마음고생을 많이 시켰던 일이다. 토요일이나 일요일 오후가 되면 우리가 살던 금학동 골짜기 마을로 목마아저씨가 찾아오곤 했다. 큰 길거리에서부터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하는 노래가 들려오면 목마아저씨가 찾아왔다는 신호였다. 목마래야 바퀴가 달린 네모나고 길쭉한 상자 위에 조그만 목마 몇 개를 얹어 끌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래도 동전을 넣으면 목마가 아래위로 끄덕끄덕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해진 시간이 되면 여지없이 딱 멈춰섰다. 아이들은 초라한 목마를 타면서도 신바람이 났다. 목마타기를 좋아하기는 두 아이가 마찬가지였지만 딸아이 민애가 더욱 목마타기를 좋아했다.

민애는 돈만큼 목마가 흔들리다가 멈춰 서도 목마에서 내리려 하지 않고 한동안 제 힘으로 목마를 굴러 보다가 내리곤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내의 주머니 사정은 번번이 목마를 태워 줄 만큼 넉넉하지를 못했다. 엄마가 달래면 다섯 살짜리 병윤이는 그래도 들을만했지만 세 살짜리 민애는 막무가내였다. 목마 아저씨가 저를 태워 주지 않고 그냥 지나가면 강그라지도록(‘자지러지도록’의 방언) 울었다. 그래서 아내는 ‘태극기’노래 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쇠붙이로된 그릇을 세차게 두드리며 민애가 그 노래 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했다. 하지만, 아내의 애달픈 노력도 귀 밝은 민애한텐 통하지를 않아 번번이 수포로 돌아가고, 끝내는 아이를 업고 목마를 태워 주러 가든지 아니면 아이가 발버둥 치며 우는 것으로 결판이 나곤 했다.

나더러 들으라고 그러는 건지 지나가는 말로 그러는 건지 지금도 아내는 가끔 이런 얘기를 한다.
“운동회나 소풍 때에 아이들이 그렇게 좋아하던 켄터키치킨이란 걸 한 번도 시켜 주지 못했던 일이 마음에 걸려요. 점심시간이면 옆에서 밥을 먹는 학부형이 우리가 선생님 가족인 것을 알고 그릇 뚜껑 같은 데에다 켄터키치킨 두어 덩이를 담아서 건네주곤 했지요. 그러면 아이들은 그걸 받아서 좋아라 맛있게 먹었어요. 얼마나 아이들한테 미안한 일이에요. 오죽했으면 병윤이가 초등학교 2학년때 일기에 ‘우리 집은 아빠가 선생질을 하여 근근이 먹고 산다’고 썼겠어요.”

두 아이 가운데 민애는 엄마를 따라 시장에 구경 가는 걸 좋아했는데 시장에 가기만 하면 꼭 한 가지씩 일이 터지곤 했다. 가진 돈은 없는데 무언가 사 달라고 졸라서 그랬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고 아내가 말했다.

“시장 골목을 가다 보니 난전에 딸기 장수가 있었어요. 민애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손을 잡아끄는 거예요.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딸기를 가리키는 거예요. ‘엄마, 딸기, 딸기 사 줘. 딸기가 먹고 싶단 말야.’ 그러나 그 날도 아이에게 딸기를 사 줄만한 돈이 없었지요. 하는 수 없이 딸기 장수 앞으로 가서 말했지요. ‘아주머니, 딸기 네 개만 팔 수 없나요? 아이가 너무나 먹고 싶어해서 그래요.” 그랬더니 딸기 장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이봐요. 어떻게 딸기 네 개를 팔아요.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나 원 참 별사람 다 보겠네.’ 하며 핀잔을 주더군요.”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아내에게 미안하고, 이제는 성인으로 자라 버린 아이들에게 여간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게 아니다. 젊은 시절 나는 결코 고분고분 부드러운 남편이 아니었고, 가정적이려고 노력은 했지만 유능한 아버지, 짬짬하고(‘짭잘하고’의 방언) 자상한 아버지는 못되었다. 우선 내가 하는 일들이 급하고 중요했다. 나름대로 벅차고 힘에 부친다는 생각도 했다. 학교에 가 선생으로 사는 일, 글 쓰는 문인으로 사는 일, 거기다가 방송통신대학을 거쳐 교육대학원에 다니면서 공부하는 일, 교감으로 승진하고 다시 교장으로 승진하는 일, 더러는 사회단체에 참여하는 일 등등. 하나같이 소홀히 하거나 버릴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중요한 일들이었고 가정을 지키며 우리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일 또한 결코 수수방관한 일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나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노라 항변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아내의 숨은 고초와 노고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아내는 일생을 오직 우리 가족만을 위해서 산 사람이다. 아내의 마음속엔 오직 세 사람밖엔 없다. 그 세 사람 외엔 아무도 들어갈 틈새가 없다. 아내의 세상은 세 개의 공깃돌을 가지고 그걸 매만지며 노는 지극히 단순한 세상이다. 남편과 아들아이와 딸아이, 이렇게 세 사람이 아내의 세계 전체였다. 오직 그 세 사람만을 위해 인내하고 염려하고 봉사하고 기다리면서 살아온 사람이 아내다. 아내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도 그 세사람만을 위해서 길게 길게 하고 자신에 대한 기도는 한 문장이나 두 문장 정도말미에 가볍게 보탤 따름이다.

집안 살림밖엔 모르고 산 여자. 보다 넓고 새로운 세상에 대해선 아예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산 여자. 기도하는 능력밖엔 없는 여자. 그러나 살림 솜씨는 기가 막힌 여자. 하나님께 기도하여 한 번도 거절 당해 본 일이 없는 여자. 그런 아내가 쳐 준 마음의 울타리 안에서 우리 집 세식구는 어제도 평안했고 오늘도 평안하고 내일도 평안할 것이다. 여보 이적지(‘이제껏’의 방언) 데리고 살아 줘서 고맙소. 앞으로도 내치지 말고 잘 데리고 살아 줬으면 참 고맙겠소.

아내

새각시
새각시 때
당신에게서는
이름 모를
풀꽃 향기가
번지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당신도 모르게
눈을 감곤 했군요

그건 아직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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