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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지역의 1호 양의사
나태주 공주문화원장  |  tj45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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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12.09  21:5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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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 공제의원 원장 양재순 선생

   
▲양의사 1호 양재순 선생
공주 시가지를 남북으로 흘러 금강으로 들어가는 개울 이름이 제민천이다. 아마도 이 이름은 『맹자』에 나오는 문구인 ‘제세구민(濟世救民) 여민동락(與民同樂)’에서 비롯된 말일 것이다. 오늘날 이 제민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상류지역인 금학동에서부터 하류인 금성동 지역에 이르기까지 20여개가 넘는다. 이렇게 많은 제민천 다리 가운데 첫 번째 다리가 제민천교(濟民川橋). 개울 이름을 따서 만든 다리다. 공주 시가지가 처음 형성되던 시기, 이 다리를 중심으로 옛 공주 시가지가 펼쳐졌던 모양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 제민천교 건너편 서편 쪽 길가 봉황동에 목조로 된 서양 건물이 한 채 서 있었다. 지금은 이 건물이 헐려지고 그 자리가 주차장이 되었지만 그 건물이 바로 공제의원(公濟醫院)이다. 어쩌면 이 병원 이름도 제민천에서 따왔겠지 싶다. 공제의원은 공주지역에서 양의사(洋醫師) 1호 의사였던 양재순(梁載淳) 선생이 인술을 베풀던 병원이었다.

1979년, 내가 공주에 처음 와 살기 시작하면서 우리 아이들이 아프면 자주 가서 치료를 받곤 했다. 삐걱거리는 나무판자로 된 복도를 지나 진료실로 들어가면 아주 많이 연로한 의사 한분이 진료를 하고 있었던 기억이다. 그 분이 바로 양재순 선생이었는데 나는 그분이 공주지역의 1호 양의사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양재순 선생은 1901년 공주시 이인면에서 부유한 가정의 자녀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관계로 1010년대 공주영명학교(구제 10회)에서 수학하였다. 공주영명학교 3학년 재학 시절, 3․1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여지자 선생은 학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분연히 일어나 3․1 독립만세운동에 참여, 선봉에 섰다. 청소년 시절, 민족의식과 애국심이 유난히 강했던 선생이었음을 증언해주는 자료라 하겠다.

선생은 이 일로 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 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선생은 이러한 어려운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명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1922년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문리학과에 진학했다. 평소 봉사정신이 남달리 강했던 선생은 학교 졸업 후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분야가 무엇인가를 고심한 끝에 1923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다시 입학하여 1925년 국가의사고시에 합격했다.

이후 선생은 세브란스병원에서 근무하는 것을 시작으로 함흥 자혜병원, 군산 구암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1927년 공주로 돌아와 공제의원을 개업했다. 공제의원은 공주지역에서 양의사가 개업한 병원으로서는 최초의 병원이었다. 이로부터 선생은 평생 동안 공주지역 사람들의 질병을 돌보는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그리하여 선생은 별세하기까지 63년 동안 기나긴 세월을 고향에서 인술로서 외길 인생을 지속했다.

그런가 하면 선생은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 1946년에 충청남도 보건후생국장을 역임하면서 도정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1940년대에는 공주영명학교 이사장직을 역임, 모교의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또한 평생을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선생은 1958넌 공주제일감리교회 장로로 피택(被擇)되어 시무했으며, 1980년에는 사재(私財)를 투자, 공주시 계룡면 화은리에 화은감리교회를 신축하고 매주 그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는 한편, 지역 주민들에게 무료 진료를 지속적으로 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하기를 20여년.

   
 ▲양재순 선생이 자신의 공제병원 앞에 서있다.

가정적으로도 선생은 다복한 가장이었다. 남다르게 자녀 교육에 열정을 쏟아 세 아들을 의사로 길러냈으며 그 가운데 둘째 아들 경호 씨는 육군의무감(육군소장)을 역임한 인물이기도 했다. 부부간 금슬이 돈독하기로도 이름난 선생은 특히 내외간에도 허튼 말없이 존댓말을 사용할 정도로 그 인품이 반듯했다고 전한다.

선생이 세상을 뜬 것은 1998년 4월 4일, 98세의 생애였다. 평생을 고운 천품과 기독교 정신으로 살았던 선생. 선생은 우리 공주지역에서 두 가지 의미로 기념비적인 위치에 있다. 첫째는 3․1 독립만세운동의 산 증인이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양의사로서 1호 의사였다는 점이다.

선생의 생전에 아이들이 병이 났을 때나마 병원을 찾아가 이러한 선생을 뵈었던 것을 다행한 일로 여기는 마음이다. 그러면서 선생이 환자를 돌보던 그 오래된 목조건물인 공제의원이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관광자원으로 활용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아쉬운 마음을 갖기도 한다.
*이 글은 <반향 공주문화소식>(1998년 11월호)을 참조하여 재구성한 글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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