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에이의 사업가 박형만(朴亨萬) 선생

▲교포 사업가 만희 박형만씨.
해마다 10월이면 공주문화원에서 조용하지만 따뜻하고 향기로운 행사가 열린다. 만희복지사업회에서 생활지원금을 지급하는 행사이다. 주로 공주시내에 거주하는 장애우, 독거노인, 저소득층 가정의 학생, 중증환자를 추천받아 1인당 50만 원의 생활 지원금을 지급한다. 올해도 30명의 수혜자를 정했으니 천 5백만 원의 현금이 지급된 셈이다.

2009년 올해로 벌써 열세 번째 개최하는 행사인데 총지급액수가 1억 7천만 원에 이른다. 액수도 엄청난 액수려니와 1997년에 시작한 이래 한 해도 거르지 않았으니 그 정성이 대단하다. 이런 때 우리는 진정성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진정성이란 정을 갖되 거짓되지 않은 정을 갖는다는 뜻이다. 인간의 마음 가운데 최상의 마음이 바로 이 진정성이다.

생각해 보시라. 누가 이렇게 일관되게 다른 사람, 그것도 이국으로 이민 가서 사는 해외동포가 고향 사람들을 찾아와 한 사람 한 사람 그 아린 부분을 어루만져주는가! 삶이 곤고한 이웃을 챙겨주겠는가! 말로는 쉽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순연한 고향 사랑의 마음이라니! 세상에서 정말로 아름다운 인간의 마음과 그 모습을 찾는다면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화제의 주인공은 앞서도 잠시 밝힌 대로 내국인이 아니다.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교포 사업가인 박형만(朴亨萬) 선생이다. 1937년생, 정축년(丁丑年) 소띠시라니 올해로 고희를 훌쩍 넘긴 연치다. 왜 이분은 이토록 오랜 세월 공주의 어려운 이웃을 골라 당신의 사재(私財)를 헐어 즐겨 봉사하는가?

세상 모든 일에는 까닭이 있게 되어 있다. 박형만 선생은 공주에서 7남매 중 다섯 번째로 태어나 봉황초등학교와 봉황중학교, 공주농업고등학교(현, 공주생명과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건국대학교 정외과에 진학한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젊은 날의 노정(路程)이다. 그러나 가정경제가 뒷받침되지 않아 대학 2학년 때 학업을 중단하고 자원으로 군대에 입대, 만기제대를 한다.

제대한 임시에 5․16 군사혁명정부가 들어서고 서독 광부 모집이 있어 거기에 지원, 105명의 광부의 행렬에 끼어 서독 행을 결행한다. 계약은 3년. 서독에 도착하여 지하 3천 미터 갱도에서 목숨을 건 노동 끝에 2만 마르크의 돈은 손에 넣게 된다. 그 돈을 버는 동안 동료 가운데 10명이나 막장에서 사망했다니 그 고충이야 말할 것도 없는 일이겠다.

서독 광부 계약 기간이 끝날 무렵, 서독 병원의 간호사로 취업 중이던 박숙희 씨와 결혼, 1967년 다시 미국으로 주거지를 옮긴다. 정착한 곳은 미국의 서부 캘리포니아 주의 로스앤젤레스. 오늘날 한인들의 도시로 유명한 나성(羅城)이라 불리는 곳이다. 거기서 주인공은 다시 힘든 삶의 날들을 개척해나간다.

무엇보다도 힘든 것은 언어 소통의 문제.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 기계청소회사에 취업, 시간당 1달러 65센트의 보수를 받는 막노동으로부터 시작하여 끝내 1970년대 중반에는 자동차정비공장을 운영하는 사업가로 발판을 다지게 된다. 그 사이 부인 또한 현지의 병원에 재취업, 가정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일단 사업가로 성공하게 되자 주인공은 여러 가지 사회사업에 영역을 확장해나간다. 1972∼1979년, 재미공주향우회 회장. 1967∼1979년, 남가주서독동우회 회장. 1980∼1982년, 코리아타운번영회 이사장. 1982년, 남가주한국학교재단 초· 중학교 설립위원. 1988∼1989년, 남가주한국학원 이사장. 1988∼2007년, 남가주한인재단 이사. 1997∼1998년, 남가주한인재단 이사장. 2002년, 남가주한국학교 이사장. 2005∼2007년, 한미동포재단 부이사장. 2000년∼현재, 한미동포재단 이사장. 그리고 1997년∼현재, 만희복지재단 설립 운영. 경력으로만 보아도 화려하고 성공한 인생이란 것을 대뜸 짐작할만하다 하겠다.

대개 남을 돕는 사람에게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타고나면서부터 자비심이 많은 사람. 생활이 넉넉한 사람. 성장하면서 고생을 많이 해본 사람. 그러나 진정으로 타인을 돕는 사람은 그 세 가지 면모를 고루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 자신이 빈곤한 사람은 아무리 자비심을 타고 났다 하더라도 남을 돕기 어렵다. 생활이 부유하기만 한 사람은 빈곤한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해 돕기 어렵다. 성장하면서 고생한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나 남을 돕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박형만 선생같이 천성이 자비심이 있고 고생을 하면서 성장을 하였지만 나중에 부유하게 된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형만 선생 같은 분은 참으로 드물고도 귀한 분이라 하겠다. 돈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선뜻 자기 돈을 헐어 남을 돕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에 천사가 살고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현실 속에서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천사가 있다면 바로 박형만 선생 같은 분이 아닐까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형만(사진 오른쪽)씨와 나태주 공주문화원장이 구 읍사무소자리 '디자인 카페' 야외 공원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2009년 10월 20일, 화요일 오전 11시. 공주문화원을 찾은 선생은 약간은 상기된 얼굴이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비행기를 타고 장장 12시간 날아온 고희를 넘긴 노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활기에 차 있었다. 어떤 기대감 때문이었을까? 이준원 공주시장, 김태룡 공주시의회 의장, 김상학 공주교육장 등 많은 공주관내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설립자 인사의 순서를 맞아 단상에 올라서는 벌그레한 얼굴에 만감이 교차되는 표정이 스쳐갔다.

13년 동안 이 행사를 지속적으로 해왔습니다. 살면서 1년 동안 가장 기대되고 가슴 설레는 시간이 바로 이 시간입니다. 미국에 살면서도 저는 오늘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공주를 떠올리고 이 행사를 생각하면 마음이 먼저 비행기를 타고 고향 공주로 달려옵니다. 가슴 속에서 용솟음친다, 그럴까요……

어려서 자랄 때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해방을 맞았고 6․25를 겼었고 5․16을 다 겼었습니다. 27세 때 공주를 완전히 떠났습니다. 저의 집은 봉황동 258번지입니다. 지금이라도 걸어서 찾아가보고 싶습니다. 찾아가면 부모님이랑 형제들이 거기 그대로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착각입니다.

외국에 나가보아야만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는데, 저 또한 그렇습니다. 멀리서 고국을 바라볼 때 애틋한 마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공주는 보수적인 고장입니다. 옛 모습이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공주가 보다 발전된 도시가 되어 관광명소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공주시장님과 공주문화원장님 같은 분들이 합심하여 공주를 세계적인 도시로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공주는 한 번 더 업그레이드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도시입니다.

현재, 미국 경제도 많이 어렵지만 저는 이 행사를 죽을 때까지 그치지 않고 계속할 생각입니다. 비행기 타고 오고 가는 시간 지루하지만 이 행사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갈 때 너무나 홀가분하고 기분이 좋습니다. 그 기분으로 공주에 옵니다.

삼중고의 장애에 시달리며 살았지만 훌륭한 인생을 살았던 저 유명한 헬렌 켈러 여사는 ‘어떤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고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고 들을 수 있는 정상적인 귀를 갖고 있으되 마음속에 꿈이 없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오늘 생활이 조금 곤궁한 분들, 독거노인분들, 장애우들, 소년가장들은 부디 용기를 잃지 말고 이상과 꿈을 보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더욱 더 좋은 미래를 공주에서 이루었으면 좋겠습니다.

만희복지사업운영회의 이름은 박형만 선생의 이름에서 <만>자를 따고 부인 박숙희 여사의 이름에서 <희>자를 따서 합성한 이름이다. 현재 회장은 (전)공주문화원장인 정재욱 씨가 맡고 있고 임원으로는 강영선 (전)충남도부교육감을 비롯하여 박형만 선생의 공주농업고등학교 동문들인 김종항, 윤용호, 이용주, 이종락, 진현동 선생 등이 맡고 있다.

박형만 선생은 현재 미국 LA에서 부동산 임대사업을 하면서 여전히 한인교포사회의 권익을 위해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있으며 한나라 해외동포 미주본부 대표(U. S. HANNARA FORUM PRESIDENT)를 맡고 있다. 주소는 850 S. Bonnie Brae St, Suite 210, LA, CA 90057 U. S. A이고 이메일은 socausa@hotmail.com이며 전화는 213-382-7331(Cell 213-880-8600)이다.

세상살이가 아무리 무상하다고 하지만 향기로운 내음은 멀리까지 가게 되어 있고 아름다운 이름은 오래 지워지지 않는다. 박형만 선생의 미담같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무리 되풀이해도 지루하지 않은 이야기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그 같은 선행은 드물고도 드문 일이다. 따르기 어렵고 본받기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 그랬을 것이다. 공주시(이준원 시장)에서는 이를 특별히 여겨 박 선생에게 2009년 10월 27일자로 제23호 공주 명예시민증을 수여한 바 있다.

이렇게 다시 새해를 맞고 하루하루 살다보면 다시 이 땅에 10월이 올 것이고 그 때쯤이면 백제문화제가 다시 열릴 것이고, 또 지구 반대편에서 가슴 가득 사랑을 품은 머리칼 허연 노신사가 비행기를 타고 공주를 찾아올 것이다. 사람은 우선 얼굴도 중요하지만 악수를 해보면 그 사람의 내면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박형만 선생의 손은 유난히 듬직하고 따스한 손길이다. 그야말로 인간적인 손이다. 근면과 성실과 정직으로 다져진 손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손이다. 그 손을 다시 잡고 웃으면서 인사할 날을 기다려 본다. 생각해보면 이것도 세상의 고달픔을 이겨내는 하나의 힘이요, 드높은 희망이라 하겠다. 
 

▲ 재미사업가 만희 박형만씨가 지난 2009년 10월 23일 명예 공주시민이 됐다. 이날 시장실에서 박형만씨의 명예 공주시민증 수여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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